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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강령

2012. 4. 26. 16:22

기획이란 없던 일을 만들어내는 짓이다. 따라서 태반은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바로 그것, 무로의 회귀, 보통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현실과의 사투가 바로 기획이다. 그 싸움에서 이겼을 때, 이 세상에 꼭 필요했던 무엇이 하나 탄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전율과 경외감 속에서 기획하라.

 

  • 제1강령: 혹해야 한다.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보통은 재미와 우스움이지만 그 밖에도 오리지널함, 아름다움, 기본 욕구를 해소시켜 줌, 공감 등의 기본적인 인간의 선호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그 기획만의 별다른 모습으로 충족시켜 주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을 갖춘 것을 보고 혹한다고 한다. 절대 당신의 이름을 드높일 생각으로 기획해선 안 된다. 그런 사심이 투입된 것치고 근본적으로 혹하는 것을 나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 제2강령: 될 것 같아야 한다.
    될성싶지 않은 것에 투자할 바보는 없다. '되면 한다'라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그 기획에 투자하거나 투신할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기본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바로 될성싶으니까 까짓 한 번 해 본다는 심정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어조를 바꾼다. 명심해야 한다. 만약 될 것 같지 않겠으면 될 것 같은 정도와 방향과 방법과 대상으로 바꾸어서라도, 될 것 같게, 그럴듯하게, 하려면 할 수는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기획이 통과된다.
  • 제3강령: 되어야 될 일이어야 한다.
    보통 기획이란 아주 단순한 개인적 일차적 욕망 또는 갈구에서 시작한다. 그 일들의 태반은 굳이 이루어질 필요가 없거나 이루어져선 안 되거나 이루어졌을 때 별로 좋지 않았던 일이다. 그 기획이 실현되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라. 내 기준으로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들먹일 수 있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 듣기 좋은 말로 둘러대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가 납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진짜 이유를 탐험해서 발견하라는 뜻이다.
  • 제4강령: 내재적인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지구력이란 대단한 힘이다. 무슨 일이든 똑같이 30년간 하면 TV에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기획을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힘은 재력도 인력도 아니다. 기획 그 자체의 지구력과 치명적인 매력이 그 기획을 끝까지 끌고 가는 법이다. 1주 전에 꺼냈던 기획이 오늘 막막하다면, 당신은 기획을 한 게 아니라 개꿈을 꾼 것이다. 어떡하면 이것을 계속하여 이끌고 갈 수 있게 할까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올려놓고 풀어라. 여기엔 인력과 재원의 문제가 포함된다. 투자금이 없어 기획하지 못한다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기획에 장기적 생존 능력이 없어 보이니까 투자하지 못하는 것이다.
  • 제5강령: 그 기획의 설명을 아주 길게도 아주 짧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 요컨대 스스로 뭘 기획하고 있는 것인지 더 명확하고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획들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전 전제 설정 설명이 있다. 이게 많으면 많을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딱 세 문장으로, 딱 두 문장으로, 딱 한 문장으로 그 기획을 설명해본 뒤 1000자 이상의 글로, 3000자 이상의 글로 다시 설명해 보자. 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 당신은 그냥 망상을 한 것이다.
  • 제6강령: 혼자만 재밌어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점검하라.
    이것 역시 아주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의 '혼자'란 기획자 본인만 뜻하지 않는다. 기획자 주변, 기획자의 근친, 기획자에 대해 다소나마 알고 있어서 객관이라 할 수 없는 모든 시선을 뜻한다. 객관적인 감상을 찾아라. 누군가가 욕에 가까운 비판을 하고 있다면 이는 매우 좋은 징조이므로 꼼꼼히 살펴 읽고 그 욕한 사람이 다시 더 욱할 만한 패치 버전으로 혹은 그 사람이 팬으로 변할 만한 어떤 반응으로 보답해 주어라. 그런 것이 없었다면, 당신은 학예회를 개최하고 있었을 뿐이다.
  • 제7강령: 맨 처음 생각했던 것에 매달리고 또 매달려라.
    당신은 그 맨 처음 아이디어 때문에 나머지 아이디어를 생각한 것이다. 절대 나머지 아이디어 중 일부 때문에 그 맨 처음 아이디어가 괜찮았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망상 중 하나로 치부할 수 있었던 그 발상을 그렇게나 부풀리게 만들었던 그 최초의 아이디어를 잊지 마라. 또 기억하고 또 고집하라. 여건이 안 돼서 맨 처음 것은 실현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하여튼 절대 잊지 말고 어떻게든 그것을 실현시켜 소원 성취해줄 것인지를 고민하라. 10년 이상 유지되는 기획에는 항상 초심이 지켜지고 있다.
  • 제8강령: 말로 개괄할 시간이 있으면 실행해 본 다음 그것을 보라.
    혼자 머릿속으로만 혹은 모두가 말로만 뭔가를 구상하는 회의실에서는 일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될 일도 안 된다. '우리가 보고 싶어했던 그것'이 눈앞에 실물로 불완전하게나마 나타나면, 그전까지의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장난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논의는 바로 디테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회의를 느닷없이 중단시키고 진척된 내용을 실현해 보라. 누워 있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불을 켜고 시작하라. 그것이 싫다면, 당신은 그냥 '나 이런 창의적인 사람이야' 운운 거들먹거리는 게으름뱅이에 불과하다.
  • 제9강령: 일반 대중이 실제로 접할 분량의 최소 3배 이상을 제작하라.
    한마디로 이것은 생각의 뿌리를 내리라는 의미이다. 식물의 잠재력은 뿌리에 있고 기획의 잠재력은, 나중에 따로 비하인드 설정이랍시고 공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을,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발상과 재료와 구상에 있다. 누가 알아줄 것을 기대하고 구상하지 말라. 당신이 혼자 재밌어할 만한 끝없는 비밀 이야기를 쓰지도 말라. 그 아이디어의 무의식을 만들라는 말이다. 프로그래머들 버그 잡는 심정으로 왜냐는 질문, 어떻게 그러냐는 질문을 천번만번 계속하라.
  • 제10강령: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뛰어넘어라.
    사실 하나. 현실에서, 당신의 기획을, 정말로 재밌게 지켜보는 사람은, 전혀 없다. 사실 둘. 현실은, 당신의 기획이, 없어도, 잘 굴러간다. 사실 셋. 현실에, 당신의 기획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당신은 천재가 아니다. 당신이 나타나서 이 모든 중원 무림을 평정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 좀 하지 말라.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진실이 있다면, 평범한 몇몇 인간이 아이디어 몇 개에 회까닥 돌아서 돈이니 평범한 가정이니 목숨이니 하는 것들을 팔아치워 그 발상에 죽자고 파고든 결과가 그 수많은 천재들이었다는 것이다.

 

쓰고 나니 참 무의미하고 서점 평대에 널렸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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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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