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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반사

2016. 4. 4. 14:05

1.


일로 만났다가 이래저래 안면을 튼 친구가 그 일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프로페셔널 프리랜서가 되어 다른 일들을 받아서 하더니, 문득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더라.

중복기고한 글들과 글이 모자라 실리지 않게 된 것들까지 포함하면 족히 스물 다섯 개 쯤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도통 쓸모 있는 글을 써내지 못하고 있다. 크게 사랑스러운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 기간 생각하고, 오랜 기간 고민하고, 나름 정제해 내놓은 글들은 읽히지 않거나, 쉽게 무시당한다. (출처)


삶이 피폐하고 워낙 바빠 치이다 보니 자기 삶으로 시작해서 자기 애정을 잘 담아 멋지게 내놓는 글이 쉽게 나오지 않고, “시류에 밀려 큰 고민 없이 금방 금방 써내려가게 된 글들이 '더 많이 팔린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는 거다.



2.


이 친구 심정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음, 다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적어도 프로라고 한다면,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떠밀리듯 이어져서 쓰게 되는 글이 잘 나와야 하고, 그걸 부끄러워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걸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 역시 자기 작업 방식의 일부가 돼야 한다. 내가 요즘 기회만 되면 외치는 ‘척수반사’ 이야기다.


나도 절실하게 느끼는 바다. 매일 적당히 쳐야 할 드립이 있고 충분히 채워야 할 지면이 있다. 달성해야 하는 일정량의 생산성과 내놓아야 하는 최소한의 크리에이티브 기준선이 주어져 있다. 요즘 그걸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면, 나도 못 믿을 정도로 해내고 있다. 정말이지, 반사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3.


콧속이 가려우면 재채기를 한다. 허벅지에 뜨거운 기름이 튀면 벌떡 일어나게 된다. 이걸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고민해서 정제한 다음 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이게 이런 몇 가지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과학 상식 정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척수반사라는 개념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사무실에 앉아 듀얼모니터를 바라보며 소제목을 짓고 변수명을 정하고 회의록을 작성하고 각종 자잘한 일들을 하다가 농담을 치다 보면, 내 뇌가 문득 놀라는 일이 왕왕 있다. 손발이 먼저 어떤 일에 대해 반사적으로 조치를 해 놓은 것을, 뇌가 제정신이 들어서 살펴보고 외치는 거다. ‘야 너 미쳤어?’ 근데 또 결과물을 볼작시면 그리 썩 못나지 않아서, 이성과 뇌가 데꿀멍을 먹기를 반복하고 있다. (최근 점점 심해지고 있다.)



4.


예컨대 빠른년생들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쓴 기사를 고칠 일이 있었다. 흩어진 문단들을 내용별로 모으고 손질하고 소제목을 달고… 하다가, 중간에 넣을 짤방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머리가 했다. 그러고서 그 생각을 머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내 손이랑 사무실 키보드가 막 뭔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모두 빠른년생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뇌가 (그리고 이런 척수반사적 드립을 꿈에도 못 꾸었을 원문 작성자가) 기겁했다. “아니 다 좋은데 너무 과격하자나여;;;” 그 말을 듣고 뇌는 ‘어떡하지’ 생각하고 있는데, 손이 멋대로 위키백과 검색을 하고 있었다. 스티븐 호킹, 앤서니 기든스, 그레고리 맨큐.



5.


돌이켜 생각해 봐도 미친 것 같은 과정이다. 논리의 비약이 너무 많아서 삐약삐약 하고 싶은 심정이다. (봐라, 또 이런 식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량적으로 통제가 안 된다는 거다. 생각을 하고 계산을 해야 견적이 나오고 ‘아 여기쯤에 뭐 넣으면 아귀가 맞는군’ 하는 “통빡”(“와꾸”라고도 한다)이 나오는데, 그게 아니라 원초적이랄지 무개념이랄지 하는 극단적인 직관에 그걸 맡겨버리는 짓이다. 무모한 도박에 불과하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을 바꾸고 있다. 이건 무모한 갬블링이 아니며, 갬블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요컨대, 자기의 직관을 평소에 충분히 갈고닦아 뒀다가, 전문가적 수지타산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멍이 있을 때 그 직관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척수반사’라고 부르고 있는 이 짓도 어떻게 잘 살려 볼 문제일 따름인 것이다.



6.


항상 홈런을 치는 타자는 없다. 항상 탐험대로부터 탈출하는 타잔은 없듯이. (음 이쯤되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사실 사람인 이상 항상 best output이 나와서도 안 된다. 모름지기 개연성(verisimilitude)이란 자연분포를 따르는 묘한 비율의 예외와 부족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기 때문에 뇌의 사용에 한계가 있어서, 항상 베스트를 찍을 수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프로들에게는 항상 the best output 내지는 the second best one이 요구된다. 항상 자기가 맡은 업무 분야에서 최고를 내놓지는 못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훌륭함은 갖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업무분야에 대한 두뇌 사고 이외의 매커니즘, 이를테면 척수반사적인 직관적 드립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중급 이상의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이제는 이걸 할 줄 알아야 한다.



7.


일상툰은 사실 굉장히 심도 깊은 분야라고 한다. 누구나 자기 삶에 재미있던 일 대여섯 가지는 있게 마련이므로 일단 덤벼는 보는데, 어떤 벽에 다다르면 다들 나가떨어진다고. 그 벽은 다름아닌 장기연재의 벽이다. 이제 털어먹을 자기 삶이 없다는 거지.


글쎄, 과연 이 변명이, 생활툰 분야에만 한정한다고 했을 때, 조석이나 스노우캣, 난다, 마조앤새디(심지어 그 이전에 마린블루스도 했던)의 정철연 등등 앞에서도 통할까? 안 통할 거다. 이 사람들이 매주 어느 요일을 채우는 방식은 절대 자기 일상을 열심히 궁리해서 머리로 그리는 게 아니라, 누구는 발로, 누구는 망상으로, 누구는 곁다리 이야기로, 하여튼 각자의 전략으로 돌파해서 머리 바깥의 것으로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 바다. 평생의 공을 들여서 딱 하나의 좋은 것을 내놓는 일, 그까짓 것쯤은 사실 디씨인사이드 아무 갤러리에서나 한 명씩은 다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힛갤로 가겠지. 하지만 그렇게 자기 안에 과포화돼 있어서 못견디고 ‘토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자기 안에 있거나 없거나 재료를 받아다 처리 작업을 해서 완성품으로 ‘제조되는’ 것도 있다.


둘은 완전히 취급 방식이 다르다. 이 사실에 대한 자각과 각오가 얼마나 있느냐, 그게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한 가지 척도일 것이다. 생활툰 도전자들이 자기 생활을 몇번 토해내다가 연재를 중단하는 것과, <마음의 소리>가 연재 1000회를 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9.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힘든 일인 건 사실이다. 말이 25편이지, 하루에 두 꼭지 써도 보름이 넘게 걸리는 분량인 건 사실이니. 그래서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 좀 길게 설명조(아마 실제로는 훈계조)로 써 봤다. 어떤 시점이 되면 프로들은 척수반사로 일을 하게 된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기의 직관과 ‘쪼’ 그리고 인성을 평소에 갈고닦아 놨다가 여차하면 휘두를 수 있으면, 그게 진짜 프로가 아닐까 싶다. 중국사에 남은 어느 시인은 술에 절어 떡이 되어서도 궁중 예악에 필요한 가사를 지어냈다지 않던가.


그러니, 그 친구나 나나 좀 파이팅하자는 얘길 좀 하고 싶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이제 아마추어 시절은 끝났다는 얘기니까. 다만, 이제 업으로, 커리어로, 포트폴리오로 하는 일이라면 지금부터는 조건이 갖춰져야 뭘 해내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같다. 무조건반사에 가까운 창작, 척수반사 같은 크리에이티브, 해 놓고 나서 다시 봤을 때 자기 머리와 보스와 클라이언트가 함께 놀라는 그런 지경, 자기가 어느 정도쯤인지를 아는 그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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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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