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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멜버른은 바람이 분다. Windy Day로군, 문득 혼잣말을 했다가 간만에 이 노래가 떠올랐다. 솔직히 누군지도 모르겠는, 하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했던, 그리고 그들이 부른 건지도 모르고 우연히 좋아하게 되었던 노래가, 남반구 저 아래쪽 에어비앤비 숙소 단칸방에서 불현듯.



지난해 6월께부터 이번 달 13일까지 편의점에서 일했다.

오전 6시까지 출근하려면 늦어도 4시 45분에는 알람을 끄고 일어나야 했다. 내가 즐긴 순간은 아무도 내 잠을 방해하지 않는 5시 18분의 분당선 상행 첫차,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는 6시 반쯤부터 8시까지의 매장이었다. 이제 여기서 1시에 퇴근해서 아무거나 간단히 점심으로 먹고 코인노래방에 가서 한숨 자고 2시까지 출근하면 투잡이 되겠군, 하는 계산에 선택한 매장이었다. 물론 폐기 도시락을 먹는 순간도 내가 즐긴 순간이었지만, 그건 좀 불규칙한 것이었어서.

6월 초에 수익사업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고 실질적 인수합병 계약이 해지된 바람에 택한 수단이었다. 그러기 직전 시절에,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편집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의 끝물에 '처리'해서 "내보낸" 기사가 하나 있었다. 일베인지 개드립인지에서 발굴한 독점 필자가 기고한, 오마이걸 군무 연구 콘텐츠였다. "이런 걸 해 보고 싶다"라는 게 가능한 시점이었어서, 디씨 펌글 캡처를 따라한 부가 콘텐츠도 만들어보고 아무튼 재밌게 열심히 잘 했다.

그리고는 이내 이 걸그룹의 존재 자체를 산업적으로 잘 잊어 두었다. 산업적으로 동원된 이 세상 모든 것이 대체로 그렇게 되듯이 말이다.

얼마나 깊게 잊고 있었냐면, 똑같은 노래가 똑같은 순서로 온 사방에 울려퍼지는 통에 지겨워 미칠 것 같은 K-POP TOP 100 차트 가운데 유난히 이 노래만큼은 귀에 덜 나쁘게 들려오던 그때에조차도, '아 이거 오마이걸인가 누군가 하는 걔들 노래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잊고 있었다. 그래야 했다. 그런 것 일일이 곱씹고 되새기고 있다간 '텍스트가 눈에 차서' 다음 글감 다음 콘텐츠를 처리할 수가 없다. 산업적으로 잊는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어떤 것들은 그 공정의 마지막에 잊고 넘긴다는 과정이 있다. 킵, 폐기, 백업 서버에 업로드.



오마이걸도 그랬을까? "큐피드", "유리구슬", "Closer" 활동을 다 치고 나서 다들 서로 "다음 활동 잘 하면 되지"라고 위안을 삼았을까? 모르겠다. 적어도 0좋아요0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이론은 조금 복잡하지만 명백하다. 8인 군무를 살리는 시도는 흔치 않았다. 그들은 그걸 하고 있다.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이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편집장은 그 원본 텍스트의 후처리를 내게 맡겼고 나는 팔자에도 없이 이 걸그룹의 안무들을 공부한 다음 결을 정돈해서 냈다. 할 때는 참 열심히 공부했다. 잊을 땐 가차없이 잊었지만.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산업적으로 뭔가를 잊으면 그건 정말 잊어질까. 도구적으로 동원해서 수단적으로 사용한 다음 비용 대비 이윤 효율성을 따져서 덮어두고 폐기하고 잊고 넘어가는 것들은, 과연 그렇게 순순히 우리의 삶에서 사라져주는 것일까.

내가 매장을 지키고 있을 때만큼은 매장 음악을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대략 한 달 정도가 걸렸는데, 그때 이후로 사람들이 오기 시작할 때쯤에야 엉금엉금 사무실로 들어가서 스피커 전원을 다시 켜면 으레 이 노래가 나오곤 했다. 전통적인 범주에 있는 코드, 성실한 멜로디 라인, 프로그래밍의 트릭으로 3분간 집중을 시킨다는 굉장히 올드스쿨한 (그런데 미끈하게 잘 빠진) 이 곡은, 번번이 나를 매장 관리 컴퓨터로 다시 이끌곤 했다. "이거 누가 부른 뭐라고? 윈디데이?"

그것은 "케이팝"이기를 거부한 케이팝이었다. 새된 음향, 변칙적 박자, 없는 화음 그리고 유행어 대잔치에 가까운 가사를 떡발라도 충분했을 것을, 그들은 기어코 유난스러우리만치 꿋꿋하게 고전적인(그렇다, 이게 고전적인 축에 든다!) 음악을 채택했고 평범하게 순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아마도 Closer의 유산이 없지 않았겠지. 적어도 그들은 다른 2군 걸그룹들이 이 박박 갈듯이 다음 기회를 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됐고 다음 활동이나 잘 하자"가 아니라, 뭔가를 분명히 보여주려고 애쓰면 누군가는 보아 준다는 한 가지 포인트를 잊어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당신이 이 음악을 싱거워하거나 안 좋아하셔도 괜찮아요"라는 자세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이렇게 뜻밖에도 기억을 한다. 항상 그렇게 "Windy Day"라는 곡의 정확한 제목과 아티스트를 보고 나서 조금 놀란 다음 다시 멍청하게 개인적으로 잊어버리던 내가, 무심하게 바람이 불어 지나가는 여기서 말이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몸에 익혀 온 모든 종류의 생활 템포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쓸모가 없으니까. 구입할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항공비가 싼 여정을 살펴보니 김포에서 일요일 12시 반에 출발해 북경에서 12시간 체류하고 쿠알라룸푸르에 내리자마자 다시 8시간 꼬박 멜버른으로 날아가는 길이었다. 누구의 카톡도 전화도 공인인증서 로그인도 못 하는 시간들이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가진 돈의 거의 절반을 환전 예약해 버렸다. 지금 휴대폰에는 심지어 포인트 쌓는 편의점 앱이며 다음지도 앱조차도 삭제되고 없다. 이건 개인적인 망각이다.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멍청하달까 사정이 있달까 해서 지우고 잊고 넘기고 까먹은 것이다. 오마이걸의 신곡을 확인하는 번번이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이내 흘러나오는 케이팝 곡(뭐가 됐든)에 경악했던 것처럼.

하지만 매일 하나씩은 내보내야 했던 기사와 콘텐츠 목록들이나, 모두가 똑같아서 아무도 구별이 안 되는 케이팝들 가운데서조차도, 어떤 산업적인 존재들은 기어코 개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와 인생을 다만 한 칸이라도 건설해 버린다.

그건 놀라운 경험이다. 아니, 소중한 경험이다. 원래 후기산업사회의 산업 발달 양식이란 바로 그 경험을 매일매일 모두에게 구현시키겠다는 야망에서 움튼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이 욕구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면, 이것들이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이고 소박하며 인생에 결부되는 차원에서 처리돼야 한다는 값비싸고 오래되고 훌륭한 원칙 대신, 결국엔 포드식 컨베이어 벨트와 잡스식 스토어로 손쉽게 처리하고야 말았다. 물론 나는 지금도 믿는다. 어떤 사람은 코카콜라에서, 혹은 틴더 매칭에서, 아니면 하다못해 다키마쿠라 한 장에서도 인생의 환희를 맛본다. 인간은 그런 점에서 정말 생존력이 좋은 동물이지만, 그 생존 방식은 부작용을 낳는데, 그래서 이젠 소비자들마저도 그것들을 산업적으로 잊기 시작했고...

이제 더 길어지면 나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있어보이는 말은 이쯤 하고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지를 좀 정리하면서 끝내야겠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냐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다 잊은 줄 알았던 편의점에서의 40주를, 거기서 잠시나마 맛보았던 고요의 기쁨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들을 보며 "나를 향해 불어오는 너의 입김에 흔들"리는 감각을, 아마도 그 걸그룹이 느꼈을 그 고양감을, 그리고 삶은 지독하게도 끈질기게 저 알아서 꿋꿋이 잘도 이어져 간다는 싱겁고 진한 진리를 조금 맛을 보는 중이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게나 압축해서 에어비앤비로 빌린 빅토리아주 박스힐의 어느 집 9호실 침대에 누워 팔자 좋게 줄줄 출력하는 중이다.)



삶은 이어진다. 우리는 뭐 잘났다고 우리 삶의 어떤 부분들을 실수로, 얼떨결에, 멍청하게, 혹은 조작적으로 잊고 뜯어내고 무시하고 버리고 외면하지만, 생은 기어코 우리의 뺨을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갈기며 외치는 것이다. Could you tell, could you tell? (It's) Windy Day.



PS. +61 번호는 (공)사일륙 일공이 칠사공입니다. 한국어로 전화하시면 한국어로 답합니다. 옵투스로 할 계획이었는데 연락처가 너무 절실해서 급한 김에 보다폰으로 해버렸는데 잘한건지 못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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