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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1 베르나르 베르베르
  2. 2011.02.19 김기조 14

http://www.bernardwerber.com/


처음 개미를 읽었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절대로 지하에 내려가지 말라는 이야기는 나를 이 책 아래로 내려가게 만들었고, 성냥개비 여섯 개로 삼각형 네 개 드립은 처음으로 내게 책의 결론을 엿보기 위해 읽지도 않은 지면을 훑는 못된 짓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분명 왕성하고, 많이 배웠고, 열심히 쓰고, 낭만 있는 작가다. 게다가 우리나라엔 그의 팬이자 전속 번역가라 할 만한 사람까지 있고 보면, 그가 우리나라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다는 데는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베르베르를 읽고 있으면 세계는 매우 신비스럽고 깊어지고 지적이고 신적인 세상이 된다. 그는 절대자/조화옹과 그에 대한 이해에서 파생되는 동물(세계/우주)과 인간의 관계, 어떤 단순한 가정의 극단적인 시뮬레이션, 죽음과 삶, 범신론/자연주의, 인간 철학의 허무성 등등을 계속해서 이리 뒤섞고 저리 뒤섞으며 과학적 사실과 상상이 우리의 세계관과 생활양식 그리고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는 얕은 선입견들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가를 목도하게 만든다. 뇌만 남은 인간이 뇌파를 받아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의탁하여 살다 마침내 한 천재 체스 선수에게 약간의 쾌감을 물리적으로 제공하여 복상살한다는 이야기는, 혹은 17이란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평생을 바친 수도자가 뿔 달린 동물처럼 생긴 667700996이나 그 이상의 수도 얼마든지 있음을 너무 급작스럽게 알아버린 바람에 반군에 합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면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이라는 천국 백성의 수를 그대로 인용하여 거대한 우주선에 태우다가도 '근데 인간이라는 유해종이 이 세계에서 번식할 이유가 있나' 하는 물음을 주고받는 이야기는, 우리를 예상 가능한 수준에서 경탄하게 한다. 역시 베르베르는 상상력이 대단해, 하고.



문제는 그게 다라는 데 있다.
그의 작품구도부터, 장편의 경우, 한 천재의 의문의 죽음에서 대체로 시작되거니와 그 과정을 쫓아가는 주인공이 있고 그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작가의 백과사전이 인용되고, 다시 무의미해 보이는 서술이 이어지다가 이 모든 것이 다시 겹친다. 그리고 나서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다가 어정쩡하게 신기한 이야기로 라스트 신이 그려진다.
게다가 그의 주제의식도 대체로 상이하다. <뇌>를 읽은 뒤 <나무>의 수록작 <완전한 은둔자>를 읽어 보면, 장 루이 마르탱은 귀스타브가 되었는가 하는 착각이 일고, <나무>의 수록작 <어린 신들의 세계>는 결국 <신>의 선행방송이 아니냐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거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드디어 지금껏 영 다뤄본 적이 없던 '시간과 과거'라는 주제를 생각한 모양인데, 그나마 이것마저 없었더라면 그는 점점 뒤처지고 있다는 평밖에 듣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효용성, 문학성의 문제가 강하게 제기되는데, 그는 그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하여 이렇게도 얘기해 보고 저렇게도 얘기해 보는 데서 그만 그치고 있고, 그래서 재미있는 과학적 상상 이상의 도전적인 가치 제시나 기존의 자신과 세계를 해체 재구성해 보는 등의 쇄신 없이, 마치 자판으로 사고실험을 하고 있을 뿐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의 문학이 당대에 재미있었다는 이유로 많이 팔릴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세기를 넘어 두고두고 기억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은 아무래도 점점 기정사실이 되어간다(그의 작품 중 하나를 대표작으로 골라 그것을 두고두고 기억할 수는 있겠다)―본받는 문제는 물론이고.


이제 그에 대한 평가에서 거품을 뺄 때가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그야말로 과학소설계의 댄 브라운이다. 댄 브라운이 '음모론 소설계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로 군림하고 있듯이 그렇다. 내가 중학생 때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여 그의 작품이 개미굴처럼 광대하고 웅장하고 그래서 더욱 끝없을 줄 알았는데, 음, 이제 군바리를 넘어 복학생이 될 준비를 하는 지금, 점점 자기표절을 보여주고 있는 그에 대해서는, 다시 재평가를 실시해서 클래스를 낮추어야 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베스트셀러 작가다. 어느 서적가판대에서나 그를 볼 수 있다. 싫으면 말고... 난 여러분께 그냥 고민하지 말고 최신간을 사서 읽으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어쨌든 한두 달 정도 심심풀이로는 그만한 작가가 또 없다.



P.s 그를 전담하다시피하는 이세욱 님께 경의를 표한다. 이분 때문에 번역이라는 짓을 우러러보게 되었고 급기야 좋은 자막 잘 봤다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는 내공까지 스스로 올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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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그의 레터링을 촌스럽다고 말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얼마나 메마르고 무식하며 천박한 타이포그래피 환경에서 살고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88올림픽으로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한글을 걱정하지 않는다.
모양이 개발괴발이든, 서로 하나도 안 어울리고 다 따로 놀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읽어지기만 하면 되는 게 21세기의 우리글이다. 기껏해야 산돌 정도나 돼야 다음 세대에까지 필요해질 한글꼴을 생각해보자는 것 같고, 나머지들은 죄 온통 현 시류에 묻어가려는 무책임자들이다. 그리고, 나도 부끄럽지만 장기하로부터서야, 김기조를 만났다.

그는 70년대로부터 80년대 말까지 있었던, 아주 묘한 의미에서의 문화적 풍요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정보를 접하는 길이라고는 책이나 잡지뿐이고, 음악을 즐기는 방편으로서 TV가 음반이나 라디오보다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물질은 빈곤하지만 순수하게 바라고 들어 오던 숱한 낭만과 그 발현에 대한 욕망만은 주체할 길이 없던 어떤 때였다. 그 때 우리는,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촌스러움'이라고 기억하는 어떤 맨손으로 된 풍요를 직접 만들어서 누렸다. 성탄절 때마다 형광색 우드락 보드판을 오려 '축 성탄' 글자를 만들어 교회 강대상 위에 붙이고 딱지와 종이인형을 그리고 오리고 접어 만들어 붙여 놀았다. '수공업소형음반제작',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등의 개념과 행위는, 우리가 그들의 행보를 흘긋 쳐다보고 쉽게 운운하는 키치니 무어니가 아닌 바로 그런 코드의 연장선에 있다. 무엇을 직접 하되 맨손으로, 시류가 주지 못하는 로맨틱한 소박함을 우리가 알아서 때운다는 그런.

이것은 빈곤이나 빈티지가 아니라 저항에 가까운 유지보수이고 그래서 시대착오적인 하드코어이다. 그를 무식하거나 구시대적이거나 꽉 막힌 샌님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그의 디자인과 그것을 이해하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블로그, 포트폴리오, 행보를 보건대 그는 분명 이것저것 깨알같이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꽤 많이 참고 양보하고 계산하고 있다. 그가 일부러 촌스러움을 택하는 데는, 이런 가볍지 않은 생각들이 깔려 있다고 보인다.

'연아' 니까 하는 이유만으로, 이 '스티카' 세트가 3000원에 불티나게 팔린다면, 우리는 '핑클빵'이 팔리던 시절부터, 그리 몇발자국 나서지 않은게다. [출처]

김기조는 저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좋은 의미의 시대착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가 자랑스러워하는 물건 하나를 보자.



장담하는데, 이제 그림자 궁전이란 글자를 이것보다 더 "그림자 궁전" 같아보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기껏해야 한창 유행하는 모양의 'ㄹ' 모양 한 번 보여주면서 흐릿한 선으로 캘리그라피랍시고 휘갈기거나, 산돌카리스마체 같은 걸로 대충 때우겠지. 그가 동네의 오래된 점포 간판 등을 유심히 공부하며 숙달해 온 그 '시골스러운' 디자인은, 이런 구석에서 갑작스러워 보이게 빛을 발한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촌스러운 게 아니라 낭만으로 꽉 찬 것이고, 투박한 게 아니라 맨손과 시간과 노가다 정신으로 가득한 어떤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도안은, 휴가 나와서 후다닥 해놓고 돌아가며 내놓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잊어버려선 안 될 어떤 위대한 유산의 주변부에 있다.

실제로 김기조는 붕가붕가레코드와 음악적 취향이 비슷하다. 산울림이나 송골매와 같은 밴드들을 좋아했다는 그는 단지 옛 정서에 취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음악이 여전히 세련되며 오히려 당대로 이어지지 않는 점에 의문을 가져왔다고 한다. [출처]

몇 종류만 해서 폰트로 안 만드시냐고 한 번 바람을 넣어봐야겠다. 그는 분명히 수요가 있다. 아니, 지금처럼 노가다를 촌스럽다고 무시하고 세련(細鍊)[각주:1]되지도 않은 것을 세련되다고 우기는 이 허풍선이 천국의 한글 디자인 세계에서, 그는 차라리, 이 사회에 공급해 줄 필요가 있는 정신이다.

오바하지 말라고? 그럼 '공정한 사회'라는 웃기고 자빠진 개념을 이거보다 더 신랄한 타이포로 비웃어줄 수 있는가 함 해 봐라. 이건 진심.

 




P.s 이 글에 모두들 유난히도 호응해주신다. 좋은 걸 좋다고, 그것도 꽤나 개인적인 어조로 풀어놨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심지어 김기조님 당신한테서까지도) 좋은 리뷰라고 고마워하시는 분위기다. 과연 한국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바닥은 천박한데다 폭력적이기까지 한가보다, 왠지 그를 촌스럽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무언의 압박을 주는.
  1. 다 알겠지만 본디 세련되다라는 말은 갈고닦였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 공들인 것은 뷰티풀해진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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