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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6.14 어처구니
  2. 2012.08.30 토악질

어처구니

2013. 6. 14. 01:37

1. 맷돌의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부른다.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표현은, 손잡이가 없는 맷돌을 낑낑 돌리는 사람의 기분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2. 멘탈이 붕괴된다는 표현은, 원래는 '힘듦', '지침', '소진됨', '자포자기함'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련의 비논리 앞에서 어처구니 없음을 느낄 때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논리의 실종' 앞에서 멘붕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실은 mentality라기보다 reason의 붕괴라고 해야 옳았을 것이지만, 어쨌든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는 의미가 통한다 뭐 그런 비슷한 이유로 언중은 '멘탈'을 선택했고 '붕괴'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가열차게 '멘붕'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


3. 기억하는가? 우리는 한때 '버닝'의 시절을 보냈다. "버닝한다!!"와 같이 주로 썼다. 아직 개인홈페이지가 유효하고 블로그 관리가 흥하던 시절, 트위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2010년대 이전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것에나 흥미를 붙였고 열심을 '불태웠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멘붕'에 해당하는 어감―넉아웃됨, 힘이 빠짐, 완전히 소진함―을 '버닝'이라는 다의어가 동시에 함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에 흥미가 붙어도 버닝한다고 했고,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도 버닝한다고 했고, 자기가 새하얗게 불태웠을 때는 목적어 없이 버닝(burning)했다고 처연히 적곤 했다. 사실 이 표현이 공교롭게도 문법적으로도 몹시 적절하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5. 멘붕은 지치고 다치고 소진된 상태가 아니라 그저 어처구니가 잠시 빠져 있는 상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많은 청춘들의 어처구니를 뽑았을까? 당신이 뽑았는가? 아니다. 내가 뽑았는가? 아니다. 김난도 교수가 뽑았는가? 아니다. "제가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나요?" 우리는 '맷돌이란 원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책 제목으로 뽑아 베스트셀러로 팔아치운 한 교수에게 돌을 던질 수는 있었지만, 어처구니를 하나 구해서 꽂을 생각도, 누가 어처구니를 없앴는가 하는 반성도 하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이 지금껏 돌려 온 맷돌이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6. 뭐가 불붙어 타려면 (즉 '버닝'하려면) 연료와 산소와 열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문화와 정신세계에선 이 셋 중 무엇도 무한하지 못했다. 버닝할 대상(연료)도 노멀라이즈되어 별로 없어져 버렸고(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예를 들자면, 혹시 아직도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만드시는 분이 있는가?) 버닝을 할 공기(분위기)도 없어져 버렸고 사회 전체가 금융위기의 한파를 꽝 맞고 나자 아무것에도 열기를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다. <호기심 천국>은 끝났다. 우리의 <스펀지>는 초고속 카메라 영상을 빨아들일 만큼 빨아들였다. 버닝은 지속되지 못했고,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었다. 우리는 정말로 힐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7. 어처구니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KorUS FTA를 추진한다고 한 그때부터, 대한민국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교양은 사라지고 층간소음은 심해지고 강간 뉴스는 정권 비리 뉴스보다 더 신나게 방송되고 비난과 분노와 조롱과 무례와 몰상식과 폭력과 공갈과 불법과 천박함이, 다이내믹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조차 피로감을 안겨줄 정도로, 그야말로 폭주하였다. 이제 이 나라는 멘붕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곳이 되었다.

정상인이라면 이런 나라의 이런 지옥도에 적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대부분의 경우는 개인적이지 않다. 멘붕의 원인은 당신에게 있지 않다. 논리를 가지고 비논리를 상대하려다 겪는 증상이 멘탈 붕괴이다. 그리고 원래 '다이다이'로 까 보면, 논리와 비논리가 맞서면 논리가 이겨야 한다. 그렇다면 멘붕을 겪는다는 것, 비논리와 맞선 논리가 무너져 버리는 것, 은 완전히 비정상적인 일이고 철저하게 사회구조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벌어지는 사태이다.


8. 지금의 '힐링 열풍'(아이고 주여...)은 결코 멘붕에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버닝에 이어진 것이다. 멘붕은 노무현-이명박 시절을 지나고 스마트폰 약정노예 시절을 지나며, 버닝의 시절과 별개로 찾아온, 거대한 '어처구니 도난 사건'에 불과하다. 멘붕을 힐링한다는 개소리는, 요컨대 뺨 때리고 보약 주겠다는 격이다. 그래서 이 말이 그토록 꼴사나운 것인지도 모른다. 멘붕은 우리가 당한 것이고, 힐링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베풀거나 받아야 하는 것이다. 멘붕은 비논리의 물량 공세로 논리를 무릎 꿇리는 거대 담론의 일이고 버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이다. 보다시피 매우 명백하게, 멘붕과 힐링은 상관 관계가 있을 수 없다.


9. 힐링 유행이 끝나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다시 건실하게 뭔가를 해나가기 시작할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직 어처구니를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멘붕'은 힐링 유행이 끝나고도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미래창조과학부를 보라. 한국어로 구성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라. 일베를 보라. 우리는 건전한 논리와 그것을 가지고 하고 싶어하는 건강한 욕구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비논리를 융단 폭격하면 그 어떤 논리의 빨치산도 집어삼킬 수 있음을 깨달은 저들은, 십년을 못 갈 그깟 권세와 재물 좀 얻어 보겠다고 별 말도 안 되는 억지들을 마구 쏟아부어 우리의 얼마 남지도 않은 멘탈을 붕괴시키려 들 것이다. 당장 남양유업 대리라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들어 밀어내기를 해냈는가 되돌이켜 생각해 보라. 일말의 납득 가능한 논리가 있었느냐 말이다. 우리가 분노하는 지점은 이런 것들이다: 어떤 정책에도, 어떤 판매전략에도, 어떤 범죄에도, 어떤 오락에도 논리가 없어 나의 멘탈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 거기서 오는 좌절감. 이 좌절감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작자들이 멸종하지 않는 한, 여러분이 멘붕할 일은 아직 한참 더 많이 남아 있다.


10. 어처구니를 꽂으면 맷돌은 즉시 돌려볼 만한 것이 된다. 물론 맷돌질은 힘들다. 그러나 어처구니가 있어야 맷돌을 돌리든 말든 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맷돌을 돌리다 허리가 아프면 잠깐 쉬면 되지만, 어처구니가 있느냐 없느냐는 정말이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멘붕을 힐링한다는 말은 맷돌에 어처구니가 없으니 허리 펴고 숨 좀 돌리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멘붕에 대처하는 것은 힐링이 아니라 우리의 멘탈이 건실하게 세워졌었고 또 다시 재건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냉정하고 지겹고 명징한 재확인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일련의 논리 바르게 세우기와 교양 되찾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남한비판=빨갱이 따위의 아무 논리가 없는 공식 앞에서 우리는 멘붕하며, 아무 매너도 배우지 못한 무례한 인간 앞에서 우리는 어처구니 없음을 느끼는 것 아닌가. 저 논리 없는 도식들, 무례를 쏟아내고도 뻔뻔하게 잘 살 수 있었던 인간들, 이것들이 발붙이지 못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어처구니가 찾아질 것이고 멘붕도 잦아들 것이다. 우리가 지난 십몇 년 간 지겹게 느껴온 그 기절낙담은, "멘붕"은, 사실은 어처구니 없음일 뿐이며, 하루빨리 그만두어야 할 소모성의 백해무익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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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토악질

2012. 8. 30. 17:43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던 오늘 아침의 일이다. Another 6화를 일단 다 보았다. 마지막이 느닷없이 아주 불길하길래 볼까 말까 하다가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이 많이 남을 듯해 7화를 곧이어서 봤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밥을 급히 먹어 속이 불편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진짜로 구역질 나오는 것을 본 터라 5분도 채 보지 못하고 정지하고 왕십리역을 기다려 내렸다. 화장실로 갔다. 대변기는 네 칸이 다 사용중이었다. 내 뒤에 들어온 할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하더니 바지를 벗고 변실금을 했다. 나는 그냥 일이 다 터져버렸구나, 소용없겠구나 싶어서 이제 막 자리가 난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려다, 이 할아버지가 아직도 참고 있는 것임을 알고 퍼뜩 놀라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며 들어가시라고 보내드렸다. 더는 거기 있을 수가 없어서 왕십리역 내 다른 화장실로 뛰어가 좌변기 위에 앉았다. 문에는 '이반분환영'이라고 적힌 5만원짜리 남성맛사지사 출장 광고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화장실을 나오니 실제로 눈앞에서 시체를 본 사람처럼 진땀이 쭉 솟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야 할 길은 가야 하므로 이대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지나 내리려는데 시계를 보니 열 시 26분이다. 등교길 중에 화장실에 다녀왔으므로 당연히 지각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 정말 열심히 뛰면 지각하지 않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결국 5분을 지각했는데 그나마 좌석을 조정하는 중이어서 체크가 되지 않았다. 근대 정치 사상가를 배우는 수업에서 발표수업 조를 짜더니 교수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이 나왔죠, 각자 흔들렸던 경험을 이야기해봅시다"라고 제시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흔들린 경험'을 모두가 나름대로 이것저것 얘기한다. 교수는 급기야 조별로 두어 명씩 나와서 발표해 보자고 제안하며 칠판에 '리얼 디테일 힐링'이라고 적었다. 한 발표자가 자기 군 생활 중 부대에서 만난 병사 한 명이 자기 형의 존속살해를 극복한 사연을 늘어놓으며 마지막에 자기도 치유가 됐다는 운을 달고 박수를 받았다.

 

그 직후 예수전도단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선배, 후배, 동기 등 날 포함해 무려 여덟 명이 이 날 점심을 같이 먹었다. 거기서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니 좀 안정되었다. 물론 문제의 7화를 중단한 직후 급하게 Shout to the LORD Kids! 1집을 틀어 귀에 꽂는 응급처치도 했고,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갈 때도 "그러나 저는 여전히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제 한 시간쯤 뒤면 캠퍼스워십에 간다. 거기 가서,

 

이 개쓰레기같은 것들 다 토해버리고 싶다.

 

이게 지옥이지 뭐가 달리 더 지옥인지 모르겠다. 토악질이 나온다. 이 세상에 진짜 좋은 것, 참 평안, 진정한 '힐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모순, 죄악, 죄악에의 선망과 관음증, 비웃음, 절망, 무관심, 권태, 모든 것의 피상화 그리고 이 모든 게 오해라고 수작 부리는 거짓말로 가득하다. 지옥은 땅 밑에 있어서 지옥일 수도 있지만, 이런 지평에서만 평생 살면 갇히게 되는 곳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음에 틀림없다. 여기는 아니다. 여긴 우리가 살 곳이 되지 못한다. 여기는, 또는 예수님이 그렇게나 강조한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치료는 하나님께 속해 있고 '힐링'은 복음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아주 교묘하게 복음이 빠진 힐링의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사실은 끝없는 구토와 폭식의 연속에 지나지 않음에도...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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