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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08 동기 결혼한다길래 국수 먹으러 가서 새로 바꾼 폰으로 첫 동영상을 촬영하고 대충 국수 먹다가 오랜만에 대학 선배님과 얘기를 좀 할 일이 있었다. 따로 커피 마시러 나가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다가 대충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근데 요즘은 유튜브로 사람들이 (정보를) 다 접하잖아. 근데 유튜브는 되게 직관적이니까, 사람들이 앞으로는 이런 철학적인 얘기는 잘 안 하고 이해도 못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아 맞아요 그럴 거 같아요 바보상자 유튜브 나빠요 같은 맞장구나 치고 넘어가면 좋았을 걸 그 와중에 그래도 성심껏 앞에 앉은 이의 질문에 의견을 내드리겠다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답변을 했다. 음, 글쎄 그럴 거 같지는 않다. '어린이 학습만화' 같은 걸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비싼 등록금 부어서 철학 공부 찔끔 한 다음 이 나이 먹도록 별볼일없이 살면서 매주 유튜브를 찍어 올리고 있는 입장에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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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튜브가 "직관적"이라는 건 좀 뭉툭한 서술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튜브는 매우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매체인데, 그렇다고 해서 직관적인 매체인 것은 아니다. 둘은 다르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뭔가가 너무나도 함축적이고 복합적이고 고문맥적인 나머지, 부연 설명이 구구절절 따라오지 않더라도, 그걸 한 번 보기만 하면 그걸로 이미 설명이 충분히 제공될 때 그런 걸 직관적이라고 한다. 예컨대 "빨간 버튼"이 그렇다. 그런 걸 회원정보수정 화면 어딘가에 붙여 놓으면, 심지어 그 버튼에 '눌러도 별일 없습니다'라고 써있을지라도 (그리고 실제로 눌렀을 때 별일 없더라도) 사람들은 그걸 함부로 누르지 않는다. 그 버튼을 위험한 버튼이라고 직관해 버리기 때문이다.

유튜브가 시각적으로 직접적이기 때문에 그걸 문자로 써서 '직관(直觀)'의 매체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어느 쪽이냐 하면 유튜브는 텔레비전이 갖고 있던 "바보상자"의 악명을 계승하는 중인 매체이다. 유튜브는 말초적이고 즉각적이며 단편적인 시각적/지적 자극을 제공하는 매체로서 이해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사람들을 종합적 판단, 비판적 수용, 주체적/메타적 사고로부터 이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21세기의 텔레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마윈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같은 퀴즈가 마윈 얼굴보다 더 크게 박혀 있는 섬네일을 눌러, 10분짜리 영상을 보고 나면, 확실히 마윈의 성공 비결에 관한 팩트 몇 가지는 대충 기억이 나지만, 그밖의 내용은 며칠 뒤에 잊혀지고, 그 영상에 대한 '감상'은 있었는지도 모르게 없어지고 만다.

선배님이 의문(또는 걱정)하고 계시던 부분은 이런 맥락이었다. 확실히 기독교는 변증과 서사의 종교고 사람들에게 뭔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요즘은 유튜브 시대다. 사람들은 5분 안에 명쾌하게 시각적으로 주어지는 정답을 원한다. 이런 시대에 과연 우리가 뭘 말할 수는 있을까? 나는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할 수 있다. 랄까 해야 한다. 유튜브 때문에 변증 못하겠다는 소리를 해선 안 된다는 말이지.

그러면 지금 시대에 기독교는 어떤 변증을 해야 하는가? 동시대적이고 성경적으로 정확한 '도식'(diagrams, schema)을 개발하고, 그걸 과감하게 침투시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도식"의 성질에 의해 자명한 바) '직관적'인 그림을 그려 보여줘야 하는데, 그 내용은 성경 진리를 충분히 소화해 압축한 것이어야 하고, 그 제재와 전개는 요즘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하게 가닿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나는 프로그래밍 드립들 중 기독교 진리의 도식에 도움이 되는 게 꽤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바스크립트의 삼위일체이다.

무슨 약을 하셨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게 놀라운 사실은, 이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이 각각 자기 세계의 진리를 매우 정확히 도식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삼위일체론의 해괴망측함도 닮았고, 전체적 교리 이론에서 핵심이 된다는 점도 빼다박았다. 그래서, 이렇게 정확한 도식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적어도 프로그래머들에게는 삼위일체론을 소개하기가 수월하다. 일단 이 그림을 보여주고, "이처럼, 이게 왜 이렇게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성부, 성자, 성령은 타입도 서로 다르고 실질도 다르지만,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 되신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프로그래머들은 갸웃거리면서도 일단은 알겠다고, 그거 참 희한하다고 납득하고 지나간다. 오히려, 이런 정확하게 직관적인 도식이 없으면, 이런저런 말장난이 늘어벌려지면서 양태론이니 성부우월론이니 하는 요설로 빠지고 만다.

물론 이런 도식적 변증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보급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가장 정확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변증이 굳이 시각적이고 즉각적인 것일 필요도 없다. 실질 내용이 정확하고 온당한 게 더 먼저니까. 그럴 때는 '역설'로 치고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다. 첨 들었을 때 당장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싶지만, 동시에 뭐라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어지는, 그래서 듣게 되고, 듣고 나면 "그런가?" 싶어지는 그런 방식의 설명 말이다.

오늘 선배와 얘기하다가 들은 신학 난제가 대표적인 예다. 자기 군생활 때 어떤 선임이 "근데 하나님은 사람을 왜 만들었어?" 물어보길래 예배받으려고 만드셨다 했더니 당장 돌아오는 답이 "그게 말이 되냐?"였다고 한다. 유구무언이 되고 말았다지. 지금 나보고 이 선임에게 대신 답해주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말이 되죠, 인간을 만들어야 그 신은 진짜로 신이 되니까요." 딱히 궤변은 아니다. 우주와 자연은 신을 신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인간은 신은 신으로 대접하고 추앙할 수 있는 존재다. 기독교에서 신이 만든 것은 그런 존재이고, 그게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게 "예배받기 위해"의 세속적 번역이다. 대예배당의 상자 밖에서 생각해본 적 없는 동료 기독교인들이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이게 소위 "유튜브 시대"의 응전 전략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튜브 시대"라고 해서 사람들이 꼭 짧고 쉬운 것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당장 '뉴스공장' 같은 거만 하더라도 김어준 혼자서 몇십 분간 저 혼자 떠들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한 마디나 놓칠세라 경청을 하지 않는가. 왜 그러겠는가? 그게 아무튼 귀에 쏙쏙 박히고 뭐라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어지고 들어 보니 앞뒤가 맞는 거 같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 모두가 김어준 같은 달변가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뭐라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은 말은 할 수 있다. 지난 몇백 년간 선배님들이 관련 신학적 업적을 다 이뤄 놨으므로, 그 성과를 성경과 함께 씹어먹고 실용적으로 재가공해, 자기만의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 기독교는 진리에 한없이 가까우므로, 정확하게 잘만 전달하면, 인류의 대부분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따지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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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적절한 도식 및 역설적 설명을 가지고 요즘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한 톤 앤 매너로 전달하면, 딱히 유튜브 시대건 포스트 유튜브 시대건 삼위일체론이건 간단한 설명이건 기독 신앙 변증 자체는 할 만한 일이라는 이야기다. 겁먹을 필요 전혀 없다. 일본 만화가 개방되면서 "폭력적인 상업만화 성인만화가 청소년들 정서 함양에 해악을" 어쩌구 할 때도 누군가는 과학과 역사를 잘 요약해 놓은 좋은 학습만화 보면서 잘만 자랐고, TV와 인터넷이 호환 마마 전쟁보다 더 무서웠던 시절에도 누군가는 그걸로 배울 거 다 배우고 깨우칠 거 다 깨우친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도, 중요한 건 좋은 설명과 충분한 설명력 그리고 동시대 매체에 대한 과감한 장악이다. 가면 갈수록 매체의 발전은 '그런 걸 제공하지 않아도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다.

뭐야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누가 요약 좀 해주세요.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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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단 대학사역이 슬슬 MC 시즌이라고 인스타그램 업로드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는데, (지금 보니) 이틀 전에 이런 게 올라왔다.

육성 설교로 들으면 눈치 못 채거나 의구심만 갖고 지나갔을 텐데 이렇게 텍스트로 정리된 걸 보니 확실히 알겠는 바, 어떻게 이렇게 속빈 말인지 모르겠다. "가난이란 결핍을 내포한 말입니다." 이 무슨 하나마나한 소리인가? "자신이 어떠한 것에 결핍이 있"다는 서술이, 어떻게 대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늘 갈망하고 찾는" 상태의 서술로 등치되며 도약하는가? 팔복처럼 알기 쉬운 말씀을 가지고 이건 무슨 (말)장난을 하자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알기 쉽다고? 그렇다. 팔복은 알기 쉬운 교훈이다. 이런 블로그까지 쫓아오신 분들이라면 대충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대충 설명을 드리자면... 팔복은 딴거 없고, 당대 세속 필부들의 '복'에 관한 통념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그러면서 진정한 복의 개념을 밝혀 버리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강력하다. 뭐 사실 산상수훈 전체가, 아니 기독교 자체가 바로 그런 교훈들로 구성된 종교지만 뭐 그런 큰 얘기는 안 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건 무슨 말일까? 팔복의 핵심은, 예수님이 나열하고 계신 바 '복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들이, 어째 하나같이 '없는 살림'에 나오는 '아쉬운 소리들'뿐이라는 데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착해빠진("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자비를 베푸는 쪽이 복이 있다.
마음에 숨김이 없는 사람이 복이 있다.
싸움을 말리고 중재하려는 사람이 복이 있다.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잘 사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 되는가? 복 받은 사람이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남들 싸움을 말리려고 뛰어다니는("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일 리가 없는데 말이지.

잘 생각해 보면 새삼 놀라운 일이다. 세속의 인류는 한 번도 복에 대한 관점을 진실로 재고해 본 일이 없다.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관점은 시종일관 동서고금 아주 따분하게 똑같다. 남들 눈치 안 보고 떵떵거리는 것, 배부르고 등 따수운 것, 웃음과 의기양양함으로 점철된 상태, 좋은 건 다 취하고 싫은 건 다 피하는 경지, 뭐 그런 것이 인류가 생각하는 복의 구체적인 형상이다. 그리고 그 정 반대 대척점에 있는 상태들, 예컨대 남들 눈치 보며 산다든가 주리고 목마르다든가 하는 상태가 복 받은 상태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인류는 단 한 번의 착념도 기울여준 적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상태들이 복 받은 상태일 수 있다고, 아니, 그런 상태들이야말로 복 있는 자들의 상황이라고 역설하신다. 그건 이상하게 들린다.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울고 있는 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자가 복받은 자가 될 수 있다니? 어떻게 그렇게 된단 말인가?

이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면, 그들은 가난해도 복이 있고, 그 가난은 심령의 가난이 된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인 한,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진 이들인 이상은, 그들은 아무리 복과 멀어 보이는 상태에 있더라도 복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에, 만사에 자비를 베풀고 사는 이들은 복이 있고 그런 자들은 슬픔 중에 있더라도 복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복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전복하여 바로잡고 계신다. 사실은 하나님 그분 자체가 홀로 인류의 진정한 복락인 거라고. 하나님을, 하나님 나라를 가질 때 혹은 추구할 때 그 삶은 복된 것이다. 우리는 복받은 결과로서의 현상들의 일부 -- 떵떵거린다든가 배가 부르다든가 하는 -- 에 천착하고 그게 복인 줄 알지만, 복에 관한 실상은 거기서부터 한참 멀리 천양의 차로 떨어져 있음을, 예수님은 이렇게나 도전적인 역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억지 해석 같지만 나름 근거는 있다. 마5:1-12에 병행하는 구절인 눅6:20-23이 그 뒷부분 눅6:24-26과 대칭을 이루며 '누가 복 받은 사람이며 누가 화를 당한 사람인지'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절을 통해 '무엇이 진짜 복인가'를 설명하신 바로 그 이치와 논지로,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역시나 우리가 갖고 있는 '화'의 개념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말씀을 하시며 '무엇이 진짜 화이고 큰일인가'의 개념을 바로잡으신다. "만약 너희가 너희 자신을 충분히 합리화하였고, 너희가 너희 자신의 소유와 요행에 마냥 자신만만하다면, 너희가 부요하고 배부른 것이 아주 큰일난 일이다.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배고픔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하나님 그분이 없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 그때, 기원후 30년 언저리 중동 한구석에서 오만 군중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셔야 했던 그런 맥락을 감안해 보자면, 여기서의 '가난'이란 정말로 '심령의 가난'(심령에 방점을 찍자면, 예컨대 신학적 깨달음에 대한 추구?)이라든가 "심령이 늘 결핍에 있고 그걸 인정" 운운하는 그 정도의 복잡한 관념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높은 확률로, 그건 그냥 정말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물리적인 가난을 뜻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팔복을 선포하시며 가난이며 애통, 억압, 핍박, 주림과 목마름을 말씀하셨을 때, 그 설교를 듣고 있던 그 필부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이 매일 매일 살아나가고 있던 가난이며 애통, 억압, 핍박, 주림과 목마름으로 곧이 들렸을 것이다. (눅6:20-23은 이 가설을 지지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좋은 말로 위로하려고 하신 게 아니었다. 그런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는 듯 보이는 평범하고 누추한 그대들의 삶에도 행복이 있다는 벅찬 소식을 전하신 것이다. "너희는 분명 가난하게 살고 있고, 그건 어떻게 봐도 복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너희에게는 매일 슬퍼할 일이 끊이지 않고, 매일 매끼 주리고 목말라 괴롭다. 너희는 어딜 가나 착하게 살아야 하고, 싸움을 말리는 억울한 입장이 되어야 하고, 번번이 억울한 핍박을 당하며 산다. 하지만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자비가 있고 하나님 그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너희의 복이 되시니, 너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너희는 배고프지만 배부를 것이고, 심령의 가난 외에는 가난을 모르게 될 것이며, 어떤 슬픔이 있다 한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터전을 얻을 것이고, 하나님을 뵐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너희에게 하나님이 있는 한,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인 한 너희의 슬픔이며 아픔 등은 너희의 불행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물며 너희가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공갈 협박과 모든 악한 말을 듣더라도 너희는 불행하지 않다. 너희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분의 복이다. 선지자들이 모두 그랬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

이런 메시지를, 매일 생로병사의 번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이 들었을 때는 어떻게 들렸을까? 솔깃한 소망의 메시지로 들리지 않았을까? '정말 그런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 수 있지? 나처럼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하나님 나라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는 건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내가 그걸 가질 수 있을까? 까짓거 하나님 잘 믿으면 되는 일인데 할 수 있지 않을까?' 팔복이 그때나 지금이나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예수님은 복받아 잘 사는 모습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는 차원이 다른 복을 설명하시면서, 그 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시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진정성 있게, 그들의 마음을 흔드시면서, 그러면서도 그 귀에 쏙 들리도록 쉽고 명확하게.


가난하더라도, 슬프더라도,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면 그들은 복이 있고 불행할 수 없다. 사실 팔복에서 이 이상 우리가 더 복잡하게 배배 꼬아서 곱씹을 내용은 별로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뭔가를 창고에 무한정 쌓아올리며 좋아라고 해해 웃는 망할 짓거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과 박해를 일부러 받으러 다닐 일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하고 삼위 하나님 그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분 자신이 인류의 복이고, 그분을 가지는 것이 인간 행복의 요체이며, 배가 부르니 배가 고프니 돈이 없니 심령이 가난하니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그 유일한 기준을 갈음하지 않으므로.

명색이 YWAM CMK쯤 됐으면 성경 말씀 공유를 할 때는 대충 이 정도 수준의 연구라도 좀 공유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하고 많은 성경 주해라도 타이핑해다가 올려주면 어디 덧나는가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이라는 어구 하나에 딱 목매어 아무 말 대잔치를 카드 다섯 장으로 늘어놓는 거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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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7:12, KRV)

영 신통찮은 교역자가 담임목사랍시고 부임해 와서는 매주 뜬금없는 본문에 뜬금없는 예화를 붙여 뜬금없는 설교를 늘어놓기가 벌써 다섯 달쯤이 넘었다. 급기야는 이젠 넌 설교해라 난 성경 볼란다 하고 저 혼자 잘못 읽는 성경 본문을 나 혼자 아이패드 미니로 막 읽고 졸고 하다가 성가대석에서 내려오는 마당인데... 지난 주 설교본문은 또 하필 저 구절이었어서, 그 일요일 이후로 사무엘상 앞쪽을 좀 살펴보게 되었다.

그건 좀 이상한 이야기였다.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막연히 알고 있던 것보다, 더 기묘하고 심오하다.


사무엘상에서 '에벤에셀'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면 3개의 구절이 나온다.  3장, 4장 그리고 7장인데,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그 셋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이 3개의 검색결과만 놓고 보아도 사실은 벌써 이상스럽다. 마치, 에벤에셀이라는 곳은, 사무엘이 돌 쌓고 명명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에벤에셀"이라 부르고 있었던 것 같은 것이다. 이것부터가 요상하지만, 사실은 그 '에벤에셀'이란 지명이 처음 나오는 대목부터 마지막으로 나오는 대목까지를 죽 읽어내려가다 보면, 정말 낯설고 당황스러운 옛날 얘기 하나를 만나게 된다.

소수민족 이스라엘을 치려고 전투민족 블레셋이 진을 친다. 이스라엘은 맞서 싸우지만 4천 명쯤을 잃고 진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전개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 장로들이 회의를 한다. 우리의 신의 언약궤를 가져다 앞장세우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제사장의 아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언약궤를 떠메어 온다. 이스라엘은 벌써 신나서 파티를 연다. 그걸 보고 엉뚱하게도 블레셋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전의를 다지면서 이스라엘을 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용맹히 나가 맞서 싸웠더니 더 크게 패했다. 무려 3만 명이 전사하고, 기껏 가져온 그 언약궤는 홀랑 빼앗기고 만다.

뭐? 이 각본은 문제가 있다. 소수 민족, 신의 권능과 상징, 소재가 이쯤 갖추어졌으면 당연히 소수 민족이 신심의 힘으로 승리하는 게 결말 아닌가? 왜 지고 앉았지? 이거 뭔가 플롯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떤 유년부, 청소년부, 대예배에서도, 심지어 유튜브나 기독교 라디오 설교에서도 이 서사는 알려진 적이 없었다. 항상, "에벤에셀"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식의 너무나 희망차고 달달하며 알기 쉽고 행복한 격려의 말씀과 함께 나오던 것이었단 말이다. 살륙이 심히 커서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더라는 역사는 거의 은폐되다시피 했다. 이 문제는 잠시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아무튼 그런데, 가뜩이나 이상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어지는 사무엘상 5~6장의 사건을 추동하는 '주인공'은 ― 나도 말하면서 믿기지 않는다 ― 바로 그 언약궤다. 블레셋의 영토로 끌려간 그 언약궤는, 뜻밖에도 보통의 평범한 언약궤들처럼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고, 그 옆에 있던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상을 두 번이나 제 앞에 거꾸러뜨려 육시를 해 놓는다. 블레셋의 사제들이 당황해서 이건 추방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수레를 끌어본 적이 없는 암소 두 마리에게 그 언약궤를 끌게 한다. "저 소들이 벳세메스 산에라도 올라가지 않는 한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소들은,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아니나 다르랴는 듯이, 곧장 그 산으로 올라간다.

여기까지 집필을 마친 스토리 작가가 좀 지쳤던 모양인지, 결말부인 7장은 좀 맥없이 끝이 난다. 만지는 족족 벌을 받는 그 언약궤를 어찌저찌 굴리고 옮겨서 그 언약궤는 드디어 제자리를 찾고...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심이 돈독해졌는데...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죄를 회개하는 대집회를 열자 블레셋 군사가 그들을 일망 타진하러 몰려왔고... 사무엘이 기도를 하니까 막 번둥 천개가 우르릉 쳐서 블레셋이 패주하고... 이스라엘은 전진하여... 맨 처음에 자기네들이 진쳤던 자리까지는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거기에 돌을 쌓아 '도움의 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했다더라... 뭐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잠시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시라. 이게 무슨 이야기지? 내가 방금 뭘 읽은 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희한하고, 알쏭달쏭하며, 놀라울 정도로 비상투적이어서, 묘한 숭고미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왜 에벤에셀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는가 하면, 앞에서 살짝 힌트를 주긴 했는데, 이 설화가 사실은 블레셋도 이스라엘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궤', 그것으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권세와 임재가 주인공인 서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에벤에셀 사건이란 언약궤의 행적과 입장을 따라가야만 비로소 읽히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는 억지로 실로에서 소환되어 앞세워진다. 제사장 집에 멀쩡히 잘 있던 언약궤를, 자기들 전쟁에 효험 좀 보겠다고 그 먼 곳 전쟁 최전선까지 들쳐메고 오는 게 뭐 하자는 짓인가? 그걸 또 뭐 좋은 일이라고 제사장의 아들들은 보란 듯이 뻐기고, 사람들은 무슨 경사가 났다고 잔치인가?

그래서, 이 서사의 주인공은 그 상대 악역인 블레셋에게서 필패의 운명의 멍에를 잠깐 벗기고, 그들을 잠시 덜 납작하게 만든다. 그 순간, 첫 전투에서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그저 평면적인 악역에 불과했던 블레셋이,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면서 덤벼드는 적극적이고 주관적이며 입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 상대에게, 여전히 납작하고 맹목적이기만 했던 이스라엘이 대패하고 마는 것은, 심지어 연극론적으로도 타당한 일이다. 언약궤를, 유일신 하나님의 상징과 권능을 무슨 금두꺼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그 언약궤를 모시고 있기에도 과분했던 것이다.

그 언약궤는 계속하여 과격한 행보를 이어간다. 블레셋 한복판이건 이스라엘 접경 지대의 촌마을이건 자기의 권능을 몰라보는 것들에게는 죽을맛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님을 보이며 벳세메스 산으로 꾸역꾸역 올라간다. (그리고 위세 높은 블레셋의 방백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언약궤가 매우 주체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찾았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이 제 주제를 겨우 파악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이 전체 서사의 진짜 주인공 ― 내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은 모두가 처음에 납작하게 기대했던 바로 그 평이하고 행복한 결말을 허락한다. 그리하여, 그 사연 많고 황량하고 지금은 위치를 알 수 없는 바로 그 공터에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묘한 지명 하나만이 남게 된다.

아니지 아마도 사무엘은 그때 말이 좀 덜 나왔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의도(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체적인 일하심에 의해 우리가 여기까지 도움을 입었다'였을 것이다.


언약궤를 전쟁터에 대령해 바쳤다고 앞서 적은 제사장의 아들들을 기억하시는가? 한 놈은 홉니, 다른 한 놈은 비느하스라고 하는데 이들은 앞장 사무엘상 2장쯤에서 이미 천하의 개쌍놈들("브네 블리야알")로 소개된 바 있다. 주님의 제사를 업신여기고 주님을 망신 주는 제사장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들이 '전쟁에 언약궤를 앞세우자' 하는 소리가 나왔을 때 무슨 생각으로 그 언약궤와 함께 앞장을 섰을까? 물론 성경은 "주님께서 그들을 개죽음시키시려고"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게는 그 장면이 그런 이유 외에도 그들의 성정, 그리고 에벤에셀 이야기의 핵심 갈등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사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정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입성은 그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맥락을 갖는다. 그들은 어쨌든 언약궤가 어느 정도 '효험' 내지 '신통력'이 있긴 있다고 믿었을 것이므로, 언약궤와 이 전쟁 사이에 긍정적인 연관 관계가 생기면, 이를 통해 제사장 직분의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확장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언약궤 입성 행렬에 앞장섰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제 2차 전투에 꽤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그 결과 전사(戰死)하기에 이른다. 그 모든 돌아가는 상황이 실로에 가만히 임재해 계시던 하나님의 계획에 전혀 포함돼 있지 않던 것과는 무관하게도 말이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에벤에셀 이야기를 설교 본문으로 딱 취하고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 같은 달콤하고 곁가지적인 부분만 쏙 들어내어 모두의 귓가에 톡톡 두들겨준 뒤 다시 성경 뚜껑을 주여 삼창으로 닫아 버렸던,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먹는 유권자 성도들에게 그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확장하려고 야심을 품고 강단에 오르던 그 숱한 대머리 배불뚝이 장년 남성 설교자들이야말로,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홉니이고 비느하스이지는 않았는지? 오늘날 개신교인의 줄어듦이 심하여 매년 몇만 몇십만이 깎여나가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는 찾아보지 못하며,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는 것은, 그들 덕분에 언약궤가 빼앗긴 상황과, 과연 얼마나 다른지?

혹시 오늘날의 하나님도 그때 그곳에서 다곤 상을 거꾸러뜨리던 하나님이실지? 세상 인간들이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친히 이적을 베풀고 역사를 바로잡으며 모두의 시선을 국경과 주변부 존재들의 산마루로 이끌고 계시지는 않은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이며 제 스스로를 망신 주는 동안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는 온갖 해괴한 일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당신의 위치를 찾으시어,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의 지경을 다만 얼마라도 허락하실 계획인지? 그것은 지금 이름 없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하여, 거스를 수 없는 시대 변혁의 정신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누가 알겠는가? 온갖 이해할 수 없는 (랄까 뭔가 각본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왕왕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은, 최후의 날 하나님 나라 역사책에서는, 또 하나의 에벤에셀 설화 같은 것으로 요약될지 모르는 일이다. 요컨대 에벤에셀의 이야기란 하나님 그 자신과 그 하나님의 권능을 멋대로 빙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등이 일방적으로 촉발되고 일방적으로 해결된 이야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구약과 인류사를 통틀어 내내 반복되어 온, 언제나 인간이 촉발했고 하나님이 해결하셨던 그런 갈등 말이다. 그리고 그 갈등은, 그냥 덮어놓고 '하나님만 믿으면 뭐든 다 무조건 도와주셔요' 하는 동화적인 소리와는, 하늘땅 차이의 거리가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이야기를 제대로 읽고 깨우쳤다면, 최소한 세계를 우리 입맛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이해대로 재단하려는 행위를, 요컨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우리가 원하는 곳에 끌고 가 앞세우려는 일체의 시도를 철저히 배격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그런 짓을 또 하려고 했다가는 참패와 모멸을 안기실 것이며, 우리가 그런 깽판을 벌이건 말건 당신 스스로 당신에게 합당한 영광을 우리에게서, 이방에게서 모두 받아 누리시고 회복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저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진 "도움"을 기념하며, 대체 이게 다 뭐였냐고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찰도 교단에서 공유되지 않고 있는데, 그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더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감사합시다 같은 염불만 외는 마당에는 뭘 기대하나 싶고 좀 그렇다. 다음 주엔 또 어떤 기묘한 설교 본문이 얼마나 알기 쉽게 고아져서 나올는지 그냥 그게 (안) 궁금할 뿐.

 

PS. 이 글 제목과 관련된 농담을 하나 하고 끝맺고 싶다. 제목(과 대표이미지 썸네일)은 불보듯 뻔하게 <Stranger Things>의 패러디이다. 사무엘상 4~7장을 읽는 동안, 만나는 장면 하나하나를, 동네의 흔한 넷플릭스 코즈믹 호러 시리즈로 각색해서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어떤가? 좀 그럴듯하지 않은가? 모르겠으면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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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생각하는 것은 인물(characters)이라는 요소이고, 특히 '평범한 조연/몹 캐릭터'에 관심이 있다.

동생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냐고, 안 그래도 님은 러키스타를 보면서 시라이시 미노루에 꽂혀 있던 이상한 놈이었다고, "WAWAWA 와스레모노"를 불러대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고 흑역사(?)를 털어서 피차 좀 민망하긴 했다. 흑역사랄 것도 없고 솔직히 그건 사실이다. 평범캐 자체는 (내 기억이 맞다면) 고딩 때쯤부터 꽂혀 있는 모에 요소이긴 했으니까. 근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또 하나의 모에 요소에 대한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취향이었을 뿐이지, 정말로 그 평범한 인물들의 평범함 자체를 들여다보고 그걸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시라이시 미노루의 사례를 들자면, 앉은자리에서 동생에게 반박했던 바, "아니 근데 미노루는 거기서 평범함이라는 캐릭터로 부각이 됐었기 때문에 정말로 평범한 건 아니었어. 따지고 보자면."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바 내가 요즘 꽂혀 있다는 평범한 캐릭터란 어떤 것인가? 캐릭터가 없는 캐릭터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이 특정한 속성이나 전형을 부여하지 않고, 그런 속성이나 전형이 생길 만한 사건도 주지 않고, 그저 작품 안의 시공간을 살게 내버려두고 기르고 있는 그런 캐릭터 말이다. 이를테면 최근에 넷플릭스로 1~12화를 재주행한 뒤 원작 4~9권을 중고로 사서 방금 막 일독하고 돌아온 "시모세카"에서의 누레고로모 유토리 같은 캐릭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인물이 얼마나 비중이 없느냐 하면, 일단 이 작품이 '애니화'를 할 때 아예 거기에 등장하지 못했고, 4권에서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소위 "4대 음담패설 지하조직" 중 하나인 "포유류"의 두령(이었나 총무급이었나 아무튼) 정도로만 등장을 했었다. 그래서 '흠, 뭐 이런 인물이 있나 보지, 여고생이 거유 요소에 집착하다니 매우 이상한걸'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가 주인공 남자와 한때 친하게 지냈었고 흔하지만 꽤 슬프게 생이별해야 했다는 쓸데없이 자세한 과거 썰이 풀어지면서부터는 유토리 외의 캐릭터들은 급격히 납작해지면서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그 이후로 유토리의 비중이 갑자기 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출연시키는 방식은 아무리 그래도 좀 억지인걸, 팬들이야 좋겠지만' 하는 감상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작가의 관심도 그냥 그저 그래서, 급기야 9권(이었나?) 작가 후기쯤에 가서는 "그러고 보니 유토리는 러브코미디 라인에 올라 있지도 않군요. 혼자만 영어 이니셜이 Y라서 그런 걸까" 운운 망발을 일삼을 정도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저런 떡밥을 남겨 주며 잘 사용하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정말 가뭄에 콩 나게 보이는 그녀의 등장 장면과 대사 몇 마디, 행동 몇 가지, 서술 몇 마디가 그렇게 귀할 수가 없고 그것만으로도 캐릭터가 충분히 개연성이 생긴다는 느낌이다. 희한한 일이다. 다른 캐릭터들에게 쏠려 있는 비중에 비하면 애초에 등장 자체가 별로 없는데도 관심이 간다니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아 이거 뭐냐고 완전 호라모젠젠 루트잖아 너무 슬프잖아" 같은 관심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어떤 '묘'를 깨우치게 되었다고 할까.

그건 내가 변태라서라기보다는 ― 그게 진짜 이유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 그보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단 첫째는 양적인 이유. 애초에 정보량 자체가 적으므로 상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말이 좀 궤변 같은데, 이렇게 뒤집어서 설명하면 어떨까?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그 '캐릭터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체 너무 많은 정보를 소모한다. 그래서 그 인물은 다른 인물로 살아갈 여지가 적어지고, 상대적으로 재미없고 평면적인 인물이 될 위험이 높아진다. 평범한 인물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주어진 캐릭터성이 없기 때문에 좀더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고 들여다볼 여지를 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잘 해내면, 썩 훌륭해진다는 게 요즘의 생각이다.

이 이유에 있어서 적절한 사례를 하나 들자면 (역시 넷플릭스로 정주행 완료한) "달링 인 더 프랑키스"의 이쿠노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체계적으로 격리 육성된 어린이들이 남녀 한 쌍으로 거대 로봇에 탑승하여 어느날 지구에 나타난 규룡이라는 반-기계-반-생물 괴생명체들을 격퇴한다는 별 되도 않는 줄거리 속에서, 그나마 이쿠노라는 승무원(여자 승무원을 '피스틸'이라 부른다)만큼은 사뭇 다르다. (이하 아마도 스포일러) 그가 속한 "제13부대"는 대다수가 굉장히 센 스토리라인과 전형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어서, 안경, 주근깨 외의 별다른 모에 속성도 없고 분량도 없는 그는 초반에는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도 보면 드문드문 등장하는 부분들이 있다. 뭘까? 싶어서 그 짧은 장면의 시사점들을 기억해 뒀다가 전체적으로 엮어서 보면... 뭐야? 갑자기 어떤 쓸쓸한 디나이얼 에이섹슈얼의 인생 여정이 썩 훌륭한 서브플롯이 되어 툭 튀어나오는데,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작품이 이건 좀 좋았다는 감상이다. 이 애니는, 뒤로 갈수록, 웬만큼 '몹캐'가 아니고서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와 입장을 꽉꽉 닫아서 시청자에게 딱 던져주고 결말 매듭을 지은, 대단히 지루한 전개를 선택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는 이거보단 좀 덜 궤변일 거 같은데, 질적인 이유. 평범한 캐릭터라는 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투입시키지 않는 한은, 웬만한 캐릭터들보다 더 만들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 캐릭터를 조형함에 있어 각종 속성과 템플릿은 쓸 수 없고 순전히 디테일과 내러티브만으로 인물 조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들이 일단 성공적으로 작품 줄거리에 안착을 하면, 그때부터 줄거리와 작품 전체는 그 캐릭터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의 존재 개연성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 매력이 있는 어엿한 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요지에 있어서 적절한 사례는 아마도 "용왕이 하는 일"이라는 작품의 키요타키 케이카가 아닐까 하는데, 이 인물은 특히 구체적으로 모티프로 삼고 있는 실존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 역시 일본장기 프로 기사로서, 그 자격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칠전팔기를 하였고, 하마터면 연령 제한에 걸려 꿈을 못 이룰 뻔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흔하고 밋밋한 사연이다. 이걸 가지고 선명한 캐릭터를 세워서 모에캐로 팔기는 어렵다. 캐 만들기의 가성비만으로 따지자면, 이 작품의 메인 여주인공 "아이쨩"을 비롯한 '여자초등학생 장기연구회' 캐릭터들 같은 걸 막 찍어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이쨩은 심지어 여관집 외동딸로 태어나 일본장기에 푹 빠져 머릿속으로 장기 두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소질이 각성되었다는 별 말도 안 되는 스토리라인까지 갖고 있다. 이길 수 있겠냐고. 하지만 아이쨩의 사연은 어찌 됐든 기본적으로 공갈인 반면, 케이카의 사연은 기본적으로는 정말 다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차이가 갈린다. 아이쨩이나 다른 "일본장기천재 캐릭터들"의 대국은 뭔가 대단하지만 잘은 모르겠다는 느낌인 반면, 케이카의 장기 국면들은 왠지 뭐가 뭔지 알겠다는 기분이었다. 재능도 없으면서 공연히 노력만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닌가 하는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스스로에게 원통함을 느끼며 펼치는 그의 일전은 한편 상투적이면서도 또한 그럴듯하게 처절했다. 나는 그 사연에 순순히 설득되고 있었고, 그를 "여초연" 캐릭터들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써놓고보니 전체적으로 결국 한 가지로 수렴을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전형성보다는 입체성과 구체성을 더 요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 콘텐츠업계와 상업예술계는 사실상 매력적인 (작품상의) 캐릭터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캐릭터들 자체는 갈수록 특정 기호 몇 가지와 사회적으로 합의된 맥락 그리고 각종 포맷과 템플릿에 점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로 캐릭터의 구체성이 확보되고 평면성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 알아듣는 기표 몇 개를 던져서 귀찮은 설명과 가능성의 여지를 특정하자는 것일까. 뭐 잘은 몰라도 일단 사람들은 이미, 필요하며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든지 프로토콜에 기반한 인지와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항간에 돌아다니는 "파쿠리 논란 뜰때마다 생각나는 짤" 같은 건 순전히 대중의 행동 양태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업계가 거기에 저항할 의무나 의리는 없다.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이 노쟈 로리 캐릭터는 무조건 쿠기밍이 해야 된다고 믿고 있으면 쿠기밍을 캐스팅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솔직히 그렇게까지 막 선명하고 알아보기 쉽게 미쳐날뛰는 캐릭터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작품 내내 예상 가능한 방식대로만 행동하고 자아를 대본에 위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뻔한 행동만 취하다 퇴장하는 인물 대신,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그 주관과 인생 사연이 보이는, 왜 저러는 것인지 좀더 알고 싶어지는, 정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그런 인물들을 좀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바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이미 너무 많이 처방되어 그 약발이 떨어진 몇몇 요소와 포맷과 전형에 의해 오독되지 않도록 추가적으로 각별히 신경써 주셨으면 하는 바다.

사실 지금 우리가 닳아빠졌다고 비웃는 전형적인 인물상 중 일부는, 반세기쯤 전만 해도, 당시에는 매우 새롭고 생생했으며 구체적이고 놀랍게 입체적인 인물상들이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전형의 복제 재생산이 아니다. 그건 이미 충분히 많이 했다. 솔직히 말하면, 예컨대 핑크색 머리에 깨발랄하고 분위기 메이킹을 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는 캐릭터 같은 건 정말 질색이다. 그건 몰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어떤 의미에서 "여학생 C"보다 더 모멸적인 단역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거 말고 유토리, 케이카, 이쿠노 같은 캐릭터를 달라는 얘기다. 그들을 들여다볼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고, 들여다보았을 때 뭔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고, '혹시 이런 것 아니었을까' 하는 발견을 하고 싶다. 요 근래 들어 못 느껴본 지 오래 되었던 모에롭다는 감상을 즐길 수 있었던 건 그런 순간들이었다. 아직은 그래도 평범한 캐릭터들에게서는 그게 되는데, 어쩌면 지금 평범한 인물들에게 흥미가 돋우어지는 건 그 때문일까.

늦었으니 오늘은 이쯤 해야겠다. 내일은 "평범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얘기 하고 노는 취미토크쇼"를 표방하는 김어진쇼를 제작하러 나가야 하니까. 나라도 평범한 인물을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김어진쇼에 나오는 김어진은 내가 봐도 평범한 구석이 하나 없어 "소설 캐릭터라고 해도 안 믿어줄" 수준이라 좀 힘들 거 같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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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말찬'이라는 브랜드는 많이 접어주는, 그럴 자격과 가치가 있는 브랜드지만, 기왕에 자비 출판으로서 책이 되어 엮여 나왔으니, 이에 대해서는 좀 많이 진지하게 에누리 없이 짤막하게 비평해 보기로 한다.

형식의 문제. 만화라는 기본 장르, 'B급 감성'으로 흔히 수식되거나 변호되는 간단하고도 서투른 작화, 결국 다 한바탕 꿈이었다는 '유메오찌'의 틀,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초전개' ― 작품 내내 주인공은 아무데나 난입해서 아무거나 열어보고 아무하고나 아무렇게나 아무 말이나 주고받는 아무 일이나 다 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더더욱 그렇다 ― 는, 모두 잠시 후에 다루게 될 '내용'의 "위험성"을 은닉하기 위한 장치 또는 완충재로 보인다. 그 효과가 너무 탁월한 나머지, 그 완충재는 소재 자체를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또는 무거워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현실과의 관계성의 문제. 작가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현실 그 자체에 노출을 시키며, 신학에 대해서는 판타지적 묘사와 과장이 있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실제/실상의 서술'의 범주에 충분히 귀속된다. (그리고 '약스포'를 하자면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의 현실은 그 신학적 판타지에 디졸브된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만큼은, 작중 시종일관, 어떤 식으로도 정말로 현실을 지시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의식적 괴리가 항시 유지되고 있다. 교회에 관한 그 어떤 장면도 과장이나 '드립' 없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오히려 강박이라 해야 좋을 정도이다.

내용의 문제. 이상 살펴본 모든 충돌과 불안정성은 모두 이 작품의 핵심 내용 및 주장에 기인한다. 교회가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께 심경을 토로하고 영광을 돌리는 행위의 일체의 총칭이나, 사실은 교회 그 자신이, 그 찬양이라는 것을 단지 악기 치고 노래하는 행위 그 자체로만 국한하고 격하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이제 "주인공"은 찬양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은폐될 필요나 가치가 없는 자명한 현재 실상이고 비판과 대안의 제시가 절실한 문제 상황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잣대에 비하면 너무나 관대하게, 이 내용을 철저히 비주제적인 것으로 한정한다.

시장과 공론장의 문제. 작가의 이 전략은 결국 한국 기독교 콘텐츠라는 장르와 그 토양의 문제로 귀결된다. 작가는 한국 기독교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에끌툰'을, 한국의 정상급 CCM과 워십음악들을, 자기의 그 의견이 결코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복잡한 심경으로, 최종적으로는 멸시하고 기피한다. 정말로 찬양을 음악에 국한하지 않으려는 시도나 그 시도를 실현하려는 교회 같은 것은 이를테면 현재의 기독교 문화와 관습에 정면 대립하는 반명제인데, 그의 기준에서는, 어떤 플랫폼이나 사역단체도 정말로 이 테제를 수용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요약. <찬양이 노래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의 작가는 상대적으로 극단적인 소수의견을 설득시키기 위해 형식상의 선택과 내용상의 비주제화를 시도하였는데, 이것은 꽤나 성공적이면서도 유감스러운 생존 전략이라는 생각이다. 그 유감은 이런 "안티테제"(안티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원론적인 것이지만)를 논의하지 못하는 환경에 대한 유감이다. 기실 그것, 그 분위기, "감히 알려고 하는" 행동에 대한 과도한 경계야말로, 전혀 과도하게 경계할 필요 없으며 오히려 타파해야 할 인습이다. 이 작품은, "찬양"에 대한 신학적 내용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되, 최소한 우리가 그 인습을 성토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는 진술서로서는 매우 유효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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