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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생각하는 것은 인물(characters)이라는 요소이고, 특히 '평범한 조연/몹 캐릭터'에 관심이 있다.

동생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냐고, 안 그래도 님은 러키스타를 보면서 시라이시 미노루에 꽂혀 있던 이상한 놈이었다고, "WAWAWA 와스레모노"를 불러대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고 흑역사(?)를 털어서 피차 좀 민망하긴 했다. 흑역사랄 것도 없고 솔직히 그건 사실이다. 평범캐 자체는 (내 기억이 맞다면) 고딩 때쯤부터 꽂혀 있는 모에 요소이긴 했으니까. 근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또 하나의 모에 요소에 대한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취향이었을 뿐이지, 정말로 그 평범한 인물들의 평범함 자체를 들여다보고 그걸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시라이시 미노루의 사례를 들자면, 앉은자리에서 동생에게 반박했던 바, "아니 근데 미노루는 거기서 평범함이라는 캐릭터로 부각이 됐었기 때문에 정말로 평범한 건 아니었어. 따지고 보자면."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바 내가 요즘 꽂혀 있다는 평범한 캐릭터란 어떤 것인가? 캐릭터가 없는 캐릭터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이 특정한 속성이나 전형을 부여하지 않고, 그런 속성이나 전형이 생길 만한 사건도 주지 않고, 그저 작품 안의 시공간을 살게 내버려두고 기르고 있는 그런 캐릭터 말이다. 이를테면 최근에 넷플릭스로 1~12화를 재주행한 뒤 원작 4~9권을 중고로 사서 방금 막 일독하고 돌아온 "시모세카"에서의 누레고로모 유토리 같은 캐릭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인물이 얼마나 비중이 없느냐 하면, 일단 이 작품이 '애니화'를 할 때 아예 거기에 등장하지 못했고, 4권에서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소위 "4대 음담패설 지하조직" 중 하나인 "포유류"의 두령(이었나 총무급이었나 아무튼) 정도로만 등장을 했었다. 그래서 '흠, 뭐 이런 인물이 있나 보지, 여고생이 거유 요소에 집착하다니 매우 이상한걸'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가 주인공 남자와 한때 친하게 지냈었고 흔하지만 꽤 슬프게 생이별해야 했다는 쓸데없이 자세한 과거 썰이 풀어지면서부터는 유토리 외의 캐릭터들은 급격히 납작해지면서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그 이후로 유토리의 비중이 갑자기 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출연시키는 방식은 아무리 그래도 좀 억지인걸, 팬들이야 좋겠지만' 하는 감상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작가의 관심도 그냥 그저 그래서, 급기야 9권(이었나?) 작가 후기쯤에 가서는 "그러고 보니 유토리는 러브코미디 라인에 올라 있지도 않군요. 혼자만 영어 이니셜이 Y라서 그런 걸까" 운운 망발을 일삼을 정도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저런 떡밥을 남겨 주며 잘 사용하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정말 가뭄에 콩 나게 보이는 그녀의 등장 장면과 대사 몇 마디, 행동 몇 가지, 서술 몇 마디가 그렇게 귀할 수가 없고 그것만으로도 캐릭터가 충분히 개연성이 생긴다는 느낌이다. 희한한 일이다. 다른 캐릭터들에게 쏠려 있는 비중에 비하면 애초에 등장 자체가 별로 없는데도 관심이 간다니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아 이거 뭐냐고 완전 호라모젠젠 루트잖아 너무 슬프잖아" 같은 관심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어떤 '묘'를 깨우치게 되었다고 할까.

그건 내가 변태라서라기보다는 ― 그게 진짜 이유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 그보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단 첫째는 양적인 이유. 애초에 정보량 자체가 적으므로 상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말이 좀 궤변 같은데, 이렇게 뒤집어서 설명하면 어떨까?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그 '캐릭터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체 너무 많은 정보를 소모한다. 그래서 그 인물은 다른 인물로 살아갈 여지가 적어지고, 상대적으로 재미없고 평면적인 인물이 될 위험이 높아진다. 평범한 인물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주어진 캐릭터성이 없기 때문에 좀더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고 들여다볼 여지를 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잘 해내면, 썩 훌륭해진다는 게 요즘의 생각이다.

이 이유에 있어서 적절한 사례를 하나 들자면 (역시 넷플릭스로 정주행 완료한) "달링 인 더 프랑키스"의 이쿠노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체계적으로 격리 육성된 어린이들이 남녀 한 쌍으로 거대 로봇에 탑승하여 어느날 지구에 나타난 규룡이라는 반-기계-반-생물 괴생명체들을 격퇴한다는 별 되도 않는 줄거리 속에서, 그나마 이쿠노라는 승무원(여자 승무원을 '피스틸'이라 부른다)만큼은 사뭇 다르다. (이하 아마도 스포일러) 그가 속한 "제13부대"는 대다수가 굉장히 센 스토리라인과 전형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어서, 안경, 주근깨 외의 별다른 모에 속성도 없고 분량도 없는 그는 초반에는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도 보면 드문드문 등장하는 부분들이 있다. 뭘까? 싶어서 그 짧은 장면의 시사점들을 기억해 뒀다가 전체적으로 엮어서 보면... 뭐야? 갑자기 어떤 쓸쓸한 디나이얼 에이섹슈얼의 인생 여정이 썩 훌륭한 서브플롯이 되어 툭 튀어나오는데,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작품이 이건 좀 좋았다는 감상이다. 이 애니는, 뒤로 갈수록, 웬만큼 '몹캐'가 아니고서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와 입장을 꽉꽉 닫아서 시청자에게 딱 던져주고 결말 매듭을 지은, 대단히 지루한 전개를 선택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는 이거보단 좀 덜 궤변일 거 같은데, 질적인 이유. 평범한 캐릭터라는 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투입시키지 않는 한은, 웬만한 캐릭터들보다 더 만들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 캐릭터를 조형함에 있어 각종 속성과 템플릿은 쓸 수 없고 순전히 디테일과 내러티브만으로 인물 조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들이 일단 성공적으로 작품 줄거리에 안착을 하면, 그때부터 줄거리와 작품 전체는 그 캐릭터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의 존재 개연성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 매력이 있는 어엿한 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요지에 있어서 적절한 사례는 아마도 "용왕이 하는 일"이라는 작품의 키요타키 케이카가 아닐까 하는데, 이 인물은 특히 구체적으로 모티프로 삼고 있는 실존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 역시 일본장기 프로 기사로서, 그 자격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칠전팔기를 하였고, 하마터면 연령 제한에 걸려 꿈을 못 이룰 뻔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흔하고 밋밋한 사연이다. 이걸 가지고 선명한 캐릭터를 세워서 모에캐로 팔기는 어렵다. 캐 만들기의 가성비만으로 따지자면, 이 작품의 메인 여주인공 "아이쨩"을 비롯한 '여자초등학생 장기연구회' 캐릭터들 같은 걸 막 찍어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이쨩은 심지어 여관집 외동딸로 태어나 일본장기에 푹 빠져 머릿속으로 장기 두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소질이 각성되었다는 별 말도 안 되는 스토리라인까지 갖고 있다. 이길 수 있겠냐고. 하지만 아이쨩의 사연은 어찌 됐든 기본적으로 공갈인 반면, 케이카의 사연은 기본적으로는 정말 다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차이가 갈린다. 아이쨩이나 다른 "일본장기천재 캐릭터들"의 대국은 뭔가 대단하지만 잘은 모르겠다는 느낌인 반면, 케이카의 장기 국면들은 왠지 뭐가 뭔지 알겠다는 기분이었다. 재능도 없으면서 공연히 노력만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닌가 하는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스스로에게 원통함을 느끼며 펼치는 그의 일전은 한편 상투적이면서도 또한 그럴듯하게 처절했다. 나는 그 사연에 순순히 설득되고 있었고, 그를 "여초연" 캐릭터들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써놓고보니 전체적으로 결국 한 가지로 수렴을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전형성보다는 입체성과 구체성을 더 요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 콘텐츠업계와 상업예술계는 사실상 매력적인 (작품상의) 캐릭터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캐릭터들 자체는 갈수록 특정 기호 몇 가지와 사회적으로 합의된 맥락 그리고 각종 포맷과 템플릿에 점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로 캐릭터의 구체성이 확보되고 평면성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 알아듣는 기표 몇 개를 던져서 귀찮은 설명과 가능성의 여지를 특정하자는 것일까. 뭐 잘은 몰라도 일단 사람들은 이미, 필요하며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든지 프로토콜에 기반한 인지와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항간에 돌아다니는 "파쿠리 논란 뜰때마다 생각나는 짤" 같은 건 순전히 대중의 행동 양태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업계가 거기에 저항할 의무나 의리는 없다.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이 노쟈 로리 캐릭터는 무조건 쿠기밍이 해야 된다고 믿고 있으면 쿠기밍을 캐스팅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솔직히 그렇게까지 막 선명하고 알아보기 쉽게 미쳐날뛰는 캐릭터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작품 내내 예상 가능한 방식대로만 행동하고 자아를 대본에 위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뻔한 행동만 취하다 퇴장하는 인물 대신,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그 주관과 인생 사연이 보이는, 왜 저러는 것인지 좀더 알고 싶어지는, 정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그런 인물들을 좀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바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이미 너무 많이 처방되어 그 약발이 떨어진 몇몇 요소와 포맷과 전형에 의해 오독되지 않도록 추가적으로 각별히 신경써 주셨으면 하는 바다.

사실 지금 우리가 닳아빠졌다고 비웃는 전형적인 인물상 중 일부는, 반세기쯤 전만 해도, 당시에는 매우 새롭고 생생했으며 구체적이고 놀랍게 입체적인 인물상들이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전형의 복제 재생산이 아니다. 그건 이미 충분히 많이 했다. 솔직히 말하면, 예컨대 핑크색 머리에 깨발랄하고 분위기 메이킹을 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는 캐릭터 같은 건 정말 질색이다. 그건 몰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어떤 의미에서 "여학생 C"보다 더 모멸적인 단역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거 말고 유토리, 케이카, 이쿠노 같은 캐릭터를 달라는 얘기다. 그들을 들여다볼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고, 들여다보았을 때 뭔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고, '혹시 이런 것 아니었을까' 하는 발견을 하고 싶다. 요 근래 들어 못 느껴본 지 오래 되었던 모에롭다는 감상을 즐길 수 있었던 건 그런 순간들이었다. 아직은 그래도 평범한 캐릭터들에게서는 그게 되는데, 어쩌면 지금 평범한 인물들에게 흥미가 돋우어지는 건 그 때문일까.

늦었으니 오늘은 이쯤 해야겠다. 내일은 "평범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얘기 하고 노는 취미토크쇼"를 표방하는 김어진쇼를 제작하러 나가야 하니까. 나라도 평범한 인물을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김어진쇼에 나오는 김어진은 내가 봐도 평범한 구석이 하나 없어 "소설 캐릭터라고 해도 안 믿어줄" 수준이라 좀 힘들 거 같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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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말찬'이라는 브랜드는 많이 접어주는, 그럴 자격과 가치가 있는 브랜드지만, 기왕에 자비 출판으로서 책이 되어 엮여 나왔으니, 이에 대해서는 좀 많이 진지하게 에누리 없이 짤막하게 비평해 보기로 한다.

형식의 문제. 만화라는 기본 장르, 'B급 감성'으로 흔히 수식되거나 변호되는 간단하고도 서투른 작화, 결국 다 한바탕 꿈이었다는 '유메오찌'의 틀,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초전개' ― 작품 내내 주인공은 아무데나 난입해서 아무거나 열어보고 아무하고나 아무렇게나 아무 말이나 주고받는 아무 일이나 다 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더더욱 그렇다 ― 는, 모두 잠시 후에 다루게 될 '내용'의 "위험성"을 은닉하기 위한 장치 또는 완충재로 보인다. 그 효과가 너무 탁월한 나머지, 그 완충재는 소재 자체를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또는 무거워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현실과의 관계성의 문제. 작가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현실 그 자체에 노출을 시키며, 신학에 대해서는 판타지적 묘사와 과장이 있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실제/실상의 서술'의 범주에 충분히 귀속된다. (그리고 '약스포'를 하자면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의 현실은 그 신학적 판타지에 디졸브된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만큼은, 작중 시종일관, 어떤 식으로도 정말로 현실을 지시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의식적 괴리가 항시 유지되고 있다. 교회에 관한 그 어떤 장면도 과장이나 '드립' 없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오히려 강박이라 해야 좋을 정도이다.

내용의 문제. 이상 살펴본 모든 충돌과 불안정성은 모두 이 작품의 핵심 내용 및 주장에 기인한다. 교회가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께 심경을 토로하고 영광을 돌리는 행위의 일체의 총칭이나, 사실은 교회 그 자신이, 그 찬양이라는 것을 단지 악기 치고 노래하는 행위 그 자체로만 국한하고 격하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이제 "주인공"은 찬양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은폐될 필요나 가치가 없는 자명한 현재 실상이고 비판과 대안의 제시가 절실한 문제 상황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잣대에 비하면 너무나 관대하게, 이 내용을 철저히 비주제적인 것으로 한정한다.

시장과 공론장의 문제. 작가의 이 전략은 결국 한국 기독교 콘텐츠라는 장르와 그 토양의 문제로 귀결된다. 작가는 한국 기독교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에끌툰'을, 한국의 정상급 CCM과 워십음악들을, 자기의 그 의견이 결코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복잡한 심경으로, 최종적으로는 멸시하고 기피한다. 정말로 찬양을 음악에 국한하지 않으려는 시도나 그 시도를 실현하려는 교회 같은 것은 이를테면 현재의 기독교 문화와 관습에 정면 대립하는 반명제인데, 그의 기준에서는, 어떤 플랫폼이나 사역단체도 정말로 이 테제를 수용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요약. <찬양이 노래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의 작가는 상대적으로 극단적인 소수의견을 설득시키기 위해 형식상의 선택과 내용상의 비주제화를 시도하였는데, 이것은 꽤나 성공적이면서도 유감스러운 생존 전략이라는 생각이다. 그 유감은 이런 "안티테제"(안티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원론적인 것이지만)를 논의하지 못하는 환경에 대한 유감이다. 기실 그것, 그 분위기, "감히 알려고 하는" 행동에 대한 과도한 경계야말로, 전혀 과도하게 경계할 필요 없으며 오히려 타파해야 할 인습이다. 이 작품은, "찬양"에 대한 신학적 내용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되, 최소한 우리가 그 인습을 성토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는 진술서로서는 매우 유효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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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쓸 얘기는 없는데 그냥 요즘 블로그를 하도 안 해서, 근황이나 남겨 볼 목적으로 조금 적어 본다.

내일은 김어진쇼 65회를 녹화/녹취하는 날이다. 그냥 모지리 같은 걸 할 생각이다. 테트리스의 테트리미노 중 정사각형 모양의 테트리미노가 얼마나 쓸모없는지에 관해서 웅변할 예정이다. 사전 조사를 좀 해야겠지… 66회쯤에서는 아마도 옷과 신발을 사러 가지 않을까? 그리고 잊지 말고 운전면허 시험 재응시를 해서 67회에는 토요일 시험을 보러 가야 한다.

김어진쇼 말 나온 김에 그러면 별도로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했을 때는… 사실은 스탠드업을 좀 해보고 싶기는 하다. 간밤에 구상을 해보았다. 무대에 나와서 오프너 토크만 70분을 하다가 시간이 다 되어 막이 닫혀 버리는 것이다. 대충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저번에 신규입사자 자기소개 세션에 10분 동안을 (심지어 앞으로 계속 알고 지내야 할) 사람들 앞에서 굉장히 가깝게 혼자 떠들어 보니 이것도 대본과 훈련과 계획이 없으면 다 허사 되겠다 싶어서 좀 많이 길게 보고 우선 닫아둔 상태다. 내 사운드는 굉장히 헛돌고 고르지 못하고 어딘가 계속 새는 걸 torque로 뻗대는 사운드라서 냉혹한 훈련 아니면 편집이 필요하다. 뭐 김어진쇼라는 좋은 핑계가 있으니 어떻게든 언젠가는 비슷하게 해 보겠지.

무대가 그리우냐, 아니면 사람들에게 뭔가 선사하는 게 하고 싶으냐 하면 그걸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김어진쇼는 요즘은 약간 뭐랄까 지난 몇 년 동안 하여간 뭔가 만들어서 내보내야 했던 그 루틴에 대한 의존성 습관이 되어 있다. 그다지 막 크게 재미있지 않은데 대충 이번 주도 때웠다 싶게 때우고 있다. 이런 식으로 기초 체력이 붙으면 뭐라도 나오겠지 하는 생각과, 이럴 거면 뭐하러 이렇게 힘들게 매주 고생하나 싶은 마음이 번민하는 중이다. 일단 무대는 그립지 않다. 무대는 그 자체로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걸 알고 있는 이상은, 의식적으로 홀려지지 않으려고 한다. 주관적으로, 선택적으로 내가 무대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 결과는 뭐 집안 베란다만도 못한 구독자 수 100명 미만의 작디작은 스테이지지만… 대체 나는 중학생 때 대학생 때 무슨 정신 무슨 쾌감으로 이젠 나조차도 안 보는 만화를 그렇게 열심히 그렸나… 싶어지고 mazefind씨의 maze 작품들은 영영 다시 못 보는 걸까 싶고 문득문득 그렇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것은, 마침 최근 다시 홀린 듯이 재정주행하면서 보았던 <호기심 해결사>의 B팀이다. 캐리 토리 그랜드 세 사람은 이번에 조사를 해 보니 각자 알아서 제 갈 길 가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좀 정신이 차려지면 그렇게 의협심과 어깨의 힘이 빠져 나가는 모양이지. 물론 옛날 하던 거 잘 했고 그 시절이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그 모습에 마냥 머물러 있겠다는 꼴이야말로 가장 안쓰러운 몰골이 됨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여전히 과학과 속설과 최신 기술과 엔터테인먼트를 합친 교집합 어딘가를 서성이고들 있지만, 그래도 <호기심 해결사 2>와는 좀 적절하게 거리를 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지금 그랜트 씨는 너무 멀리 가 있고 캐리 토리 콤비는 아직 너무 가까이에 있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건지도 모르지만.

마치 호기심 해결사를 졸업한 그 세 사람처럼 지인들도 하나둘씩 와웸과 찌라시와 트탐라를 졸업하고 저마다의 브랜드를 런칭하고 힘들 쓰고 있다. 해찬이는 제이미가 되어서 랜선극장 극장주가 됐고… 쇼에 나온 사람 중 (취미로나 업으로나) 만화를 하고 있는 인간이 무려 셋이나 있고… 현익이는 잘 취직했고 찬영이는 글밥과 카페 식객 노릇으로 얼추 살 것 같고… 어째 바로그찌라시 멤버들만 이렇게 보기가 힘들고 다 바라바라가 되었는지 야속해서 잠 못 이룰 일이다. 프사를 바꾸고 싶은 것은 그게 찌라시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제 놓아줘야 하는 때가 오고 있는 거다. 생각의 재활용이니 호밀밭이니 오버스마트니 실천 가능한 20대 라이프 스타일이니 데뷔니 딴에는 꽤 의미 있는 관점들을 제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나한테나 의미가 있었지 아무래도 결국에는 다 시시하게 20대 시절의 재기발랄(씨발)로 귀결될 모양이다. 웃픈 일이다. 아직 그게 내 원동력으로 그리고 계기로 남아 주고 있으니.

와웸 하니까 굳이 좀 적자면… 엊그제인가에 내 동시대 서강 와웨머 두 명에게서 5분 간격으로 결혼 소식 카톡이 왔었다. 무슨 서로 신호라도 주고받아 가면서 보낸 줄 알았다. 적지 않은 와웨머들이 저들끼리 결혼한다. 그냥 그렇다고 쓰고 싶었을 뿐이고 좋다 나쁘다는 모르겠다. 좋다 나쁘다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명박근혜와 세월호를 지나고 "비전 2020"을 바라보는 이 시절에 와서까지도 아직 저러고 있는 CMK의 게으른 포즈다. 그리고 이건 나쁘다. 대학 사회를 복음화한다는 게 사실은 무슨 의미인지 정말 그걸 해 버리면 뭐가 좀 많이 곤란해지는데 그게 뭔지 하나도 모르고 하나도 안 가르치고 4년 내내 애들을 연애 금지 조례에 가둬 놨다가 세상에 풀어 버린다. 풋내기 1학년 때야 뭐 모든 게 행복하고 안전하고 예배가 맛있고 정서가 풀리고 아주 훌륭한데, 그게 이곳이 엄청나게 안전한 온실이라서 그런 거라는 걸 왜 아무도 명시적으로 말해 주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황야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그리고 대부분의 비신자 일반인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이란 술에 잔뜩 취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피어오를 때 같은 순간(뿐)이라는 통계적 진실을 왜 안 알려주는 것일까? 아니 뭐 다 모르겠고 왜 우리는 전도단이라는 사람들이 변증 하나를 제대로 훈련 안 하고 맨날 3평짜리 우리 방에 틀어만 박혀서 운동장을 구경하며 "음성"만 처 듣고 다닌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대수롭게 홀리하고 스피리추얼했던가?

할 수 있다면 기독교 테마의 무엇을 좀 하고 싶다. 근데 그게 다 일발성으로 끝날 요량이 있어서, 한마디로 '콘텐츠가 없어서' 못 하고 있다. 그리고 할려면 신학 하는 사람이 좀 거들어줘야 하는데 내가 그 연줄이 없어서… 그래도 뭐 저번에 환희랑 전화통화를 두 시간 가까이 했을 때의 일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면, 간단하게 FAQ 토픽 몇개 늘어놓고 개똥철학을 늘어놓는 것만 해도 당장은 먹힐 것으로 보인다. 데모그래픽적으로 말해서는 현재 2030 신자 및 냉담자들의 사상적 기반이 말도 못하게 취약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까지도 필요없고 세계사, 교양철학, 기초과학, 기본적 수준의 비판적 사고만으로도 충분히 기독교 개론 가능하다고 나는 보는데 그게 안 돼 있으니까 온갖 좋은 소리 떡발라서 뼈대 없는 건물을 실면적 2만평짜리로 세워놓고들 다니는 거다. 와웸에서 유일하게 변증이며 신학 비슷한 걸 좀 알려주신 분이 이지웅 간사님인데 그분 강의가 세상에 그렇게 인기가 있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 청중들은 여전히 그 강의들과 조셉 프린스의 신나는 히브리어 강의와 <왕의 재정> 사이에서 전혀 분간을 못 잡고 살아간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돌아와서 개인사를 좀 논하자면… 피똥 싸게 개발 중이다. 옆에서는 주구장창 유지보수 이슈대응 등만 맡고 있는 ASP 개발자 차장님이 "와 재밌겠다 개발한다" 하면서 구경하는데 구경 자체는 뭐 그렇다 치지만 정말 하루하루 다른 의미에서의 피 마름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레벨업하고 싶지 않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는데, 하필 빌링(결제)이다. 심지어 아임포트나 스트라이프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PG에서 준 코드를 날로 갖다 씌우고 있다. 이니시스는 모든걸 결국 CURL 치는 구조이고(최종 승인 과정에서 인증토큰을 태워 보내야 한다), KCP는 자기네 바이너리에 변수를 넣어서 돌리면 그 안에서 CURL 날리고 인증치고 변수 반환하고 하는걸 다 해주는 구조다. 동적으로 설정값 받아서 메소드 돌리는 class KCP를 만들 수는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그걸 말로만 듣던 프로바이더나 뭐 그런 것에 옮겨놓고 걍 툭툭 갖다쓰는 걸 구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럴 시간이 없다. (그나마 퍼블릭 경로에 쑤셔박혀 있던 결제요청 바이너리를 소스 내부로 가져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냥 일단 결제 자체가 성공해야 해서 미친 듯이 기존 레거시와 예제 소스를 뒤집어 까면서 최대한 앞뒤를 맞추려고 하고 있다.

잘 안 되면서도 어쨌든 되어가고 있다. 정말 1년차답구나 싶다. 아무도 내 코드를 봐주지 않는 가운데 베트남 외주개발업체 사람들과는 미친듯이 소통하면서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빠르게 결과물을 받아보고 있어 좀 많이 당혹스럽다. 느낌상 초반에 이렇게 눈핑핑돌게 달린 다음 이후 몇 달 동안 나도 할 일이 없어 얼타게 될 삘이다. 그때쯤엔 뭔가 일을 만들어야지… 이 회사에 3년은 있고 싶은데 그 이상은 정말 내가 그리고 개발팀이 그리고 대표란 사람이 장차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어쨌든 이 회사 주요 상품은 교재와 교사 서비스이지 웹사이트나 "체험상품"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뭐 그래도 최근 한국경제 단독으로 뜬 전직장 존망의 위기 관련 소식을 보면 그냥 아찔하다는 생각만 들지 뭐 지금의 상황을 왈가왈부할 처지는 못된다 ㅎㅎ 그냥 주는밥 먹고 얌전히 MSSQL과 씨름하다 집에 가면 될 것 같다. 아 맞다 SQL 공부를좀 해야 하는데… 정말 싫다. 아 맞다 회계자격증 따고 봉사시간 채워야 하는데… 어휴 이다.

다 써놓고 보니 전반적으로 새삼 드는 생각은, 약간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이라는 긴 커밋로그의 어느 한 롤백 가능한 스테이블 배포판 태그 지점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슨 브랜치를 따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새 브랜치를 시작하려면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우물쭈물 핫픽스나 붙여 가면서 master에 머물러 있는 건데… 그래서인 거였을까? 최근에 전혀 내 인생과 무관하던 킹오파 브랜드 신작 폰겜을 받아 봤다. (심지어 사전예약도 했는데 공식 채널 통해서 해서 그런지 별다른 보상이나 알림을 못 받았다.) 사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초딩때 다 졸업했을 시라누이 마이에게 혹해서 시작해 봤지만 의외로 마이라는 캐릭터는 매력적이지 않다는 느낌이고 (정말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지금쯤 얘 보려고 게임 켜서 얘만 보고 있어야 하는데 안그러고 있음) 그냥 beat 'em up 장르를 (매우 순한)맛이나 보자는 느낌으로 너무 늦게 기웃거리고 있다. 게임 같은 게임을 좀 하고 싶은데 요즘 게임은 게임 같지가 않아서 곤란하다. 플스를 사면 좀 나아질까 했다가, 그마저도 우선은 접었다. 오히려 클래식 테트리스가 게임 같을 지경이라 요즘은 소전 데차 라오진 다 버려두고 테트리스나 하고 앉은 상황이다.

그래서 다음 김어진쇼에서는 테트리스의 테트리미노 중 내가 제일 싫어하는 테트리미노 랭킹을 매기는 영 머리 나쁜 기획을 관철할 예정이고… 내일은 샤브샤브와 <걸캅스>를 볼 것 같다. 그게 오늘, 아니 어제의 일이다. 아니 오늘의 일이다. 그냥 지금은 그렇다.

지금 스크롤을 다시 돌려보니 영 황당하다. 뭔 임상학적 개소리를 이리 길게 써놨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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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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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25 05:3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오랜만에 잘보고 간다. 근데 그러면 요새 근황이라든가는 어디다가 포스팅 하나??

Yet Is Our God by Anointing Ministry

Translated by Eojin K.



# Verse 1

Yet is our God still the mighty One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Praise Him for His strength, Hallelujah 전능하시니 할렐루야
And my soul shall be well 거센 폭풍에도
Even in most raging storm 내 영혼 안전하리
I'm in the LORD 주 안에서

Yet is our God still the faithful One 여전히 우리 하나님은
Praise His trustfulness, Hallelujah 신실하시니 할렐루야
And no promise from Him 어떤 상황에도
Will cease away no matter how 그 약속을 이루시리
It's for the LORD 주 안에서

# Chorus

Praise Him, praise Him 찬양 찬양
All praises and songs unto our LORD 주 찬양하라 노래하라
Shall sound the earth, shall fill the sky 온 세상에 주를 향한
To show how worthy is our God 찬양이 가득하도록

Proclaim, proclaim 존귀 존귀
All honors and thanks unto our LORD 오 주의 이름 선포하라
Shall lit the world and all around 온 세상에 주의 빛난
To show the glory of our God 영광이 가득하도록

# Verse 2

Yet is our God still the rightous One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Praise for His justice, Hallelujah 의로우시니 할렐루야
And the truth shall prevail 어떤 거짓에도
Over the shadows and fakes 진리는 굳건하리
It's by the LORD 주 안에서

Yet is our God still whom shall He be 여전히 우리 하나님은
Praise for He's alive, Hallelujah 살아계시니 할렐루야
And His words will be there 세상 다 변해도
When everything is falling down 주 말씀은 영원하리
It will be there 영원하리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어진 씨 교회 다녀? 난 어진 씨 보면 그 엔트로피라고 해야 하나? 그 차분한 느낌이 하나도 없고 막 부산스러워서 안 그런 줄 알았어. 사실 나도 교회 다니거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냥 출석만 하는 건데, 목사님 말씀 들어 보면 다 결국 하나야. 익명화(anonymized)되는 거야. 자아를 죽이고, 내려놓고, 그분 말씀만 잘 순종하고 그러라는 거지. 살면서 뭐 선택할 일이 얼마나 많겠어. 근데 그걸 내가 하나하나 선택할 때마다 그게 다 짐이 된다 이거야. 그걸 다 내려놓으라 이거지. 요즘 우리 목사님이 거기에 꽂혀 계셔서 다 그 얘기거든.

위와 같이 황당한 얘기를 회사 회식자리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듣게 되어서, 그때 바로 얘기하면 술주정으로 들을까 봐 일부러 안 했던 이야기를 좀 적어놓으려고 한다. 그 자리에서는 "그거 순 불교 가르침 같은데요?" 정도로 퉁쳐 비비고 지나갔던 것인데 그걸 좀 길게 쓸 생각이다.


1. 대체 누가 누구더러 아무도 해달란 적 없던 익명화를 요구하는가?

그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요약과 그 용어는, 나도 해석된 것을 전해 받아 들은 바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그 "목사님"이 정말로 '익명화해야 합니다 여러분 아멘?' 운운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전제이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가 설교를 구경하고 계신 분이 '가만히 들어 보니 결국 그 소리더라'라고 한다면, 그건 대상에 대한 전반적·전인적인 요약으로서 충분히 유효하다 할 정황이 있다 할 것이다.

자 그러면 이 요약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이게 과연 기독교적 가치인가? 아니오!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시다. 근거 성구가 한둘이 아니다. 마태를 보고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심지어 이것은 우연한 인간적 습관이 아니고 오히려 이유가 있어서 나오는 본보기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버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더러 게바라고 부르는 식으로) 이름을 더 주시면 주셨지.

복음서 역시 (사실은 그리고 성경 전체가) 사람의 신원 파악(identification)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성경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이름까지는 모르더라도, 누가 누군지 각각 무엇을 했는지 그 명부를 치사하다시피 세세하게 남겨 전하고 있다. 열두 지파, 열두 제자, 바울이 로마서 끝에서 안부를 물은 자매 형제들의 이름, 아니면 누가 누구의 자손 누구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구약이 지긋지긋하게 지키던 연표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연표를 여기 또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기독교는 익명화를 요구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내 전화번호와 금융기관이 서로 그러하듯이, 익명화를 요구하는 그 어떤 기독교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피싱이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그 "말씀"들은 뭘 말하고 있었기에, 좍 걸러 듣고 요약한 엑기스가 "익명화"란 말인가? 짐작 가는 바는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황망하고 아찔하다.

그건 아마도, 무리와 제자들 보고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에 근거하고 있는 얘기이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를 영어 성경들은 하나같이 'deny yourself'라고 번역해 놨는데, deny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관계'를 정정할 때,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때 쓰는 동사라고 한다. 따라서 deny oneself는 이를테면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라고 여러분이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면 당신은 뭔데요? 목사입니까? 선지자입니까?' 같은 질문을 들으면 그때는 등에 지워진 십자가를 보여주며 '나는 그저 예수님 따르는 사람올시다' 대답하라는 것, 그게 제자로의 부르심의 총체이다.

더도 덜도 아니라는 점, 이 이상도 이하도 요구하신 적 없음에 주목하자.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을 "자기 존재를 지우고 몰개성하게 군중 속으로 숨도록 하고"로 읽는다면, 이는 어떤 경우에도 오독이거나 비약이다. 논리는 간단한데, 'deny oneself'에 개성을 버리라든가 군중 속에 숨으라거나 눈에 띄지 않게 남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라거나 하는 의미는 내포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학적으로 말하자면, 고등종교의 공통 요건 중 하나인 '자기부정'은 절망적 상태의 자아상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의미할 뿐이지, 무슨 실천적인 의미에서도 익명성에의 추구 등을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다시 의문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대체 누가 누구 좋으라고 이런 의미에서의 '익명화된 교인'을 말하고 생각하게 하는가?

잠시 후에 적겠지만, 이건 교회라는 시스템이 원하는 한 마리 양에 관한 이야기일 뿐 제자도와는 일체 하등 아무 상관없다.

2. 뭘 내려놓고 집어들고 하는 소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뻘소리인가?

이 단락은 일단 결론부터 적자면, 그 "목사님"의 설교는 제자도에서의 자기 부정과 일생 여정에서의 행동 강령을 아무렇게나 짬뽕해 놓음으로써 세속적 종교 생활을 수요하는 다수 대중의 기대를 만족하고 통속적 종교관을 유지함으로써 그 청중을 호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들으나마나한 좋은 말씀 매주 똑같이 약간씩 바꿔서 들려주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결론이다.

어떻게 그렇게 감히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들어도 보지 않고 함부로 막 품평하느냐고? "자아를 내려놓" 운운하며 각종 관념을 유행어 하나로 묶어 팔아 기어코 기억까지 시키는 걸 보면 필시 그러하다.

이쯤에서 좀 솔직해져야겠는데, "내려놓음"은 처음에는 안타깝게 오독되었고, '더 내려놓음'에 와서는 악랄하게 영합을 한 아이디어라는 게 내 일관된 생각이다. 규장에서 "내려놓음"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한창 경건한 신학생 모드였고, 그래서 그 책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뭘 정말로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가 내려놓겠습니다"는 우선 모순이며 결국 오만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내려놓으라" 하시는 것은, 그게 뭐든 실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추구해도 좋은 유일한 것은 주님뿐임을 깨우쳐 주시려는 뜻이지, 그거만 딱 내려놓으면 무슨 우는 아이 젖 주듯이 "더 큰 축복 더 큰 감사" 같은 거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일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려놓음은, 그리고 "더 내려놓음"은, 더 큰 축복, 더 큰 감사를 매우 강하게 암시한다. 그건 겉으로만 건강하고 속으로는 너무나 달콤해 물러 터지는 이야기다.

"권리 포기"라는 용어조차도 이런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비슷하게 취약하고 불안하다. 분명 원래는 피조물의 피조물됨을 상기시킬 목적이었던 이 아이디어들은, 착한 일에 대한 댓가를 바라는 우리의 "세상적" 도덕 관념에 멋대로 근거하여, 더 좋은 뭔가를 위해 잠깐의 힘든 시절을 겪자는 얘기로 소비되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이 집에 가다 말고 여러분의 교통카드를 내려놓는다(혹은 교통카드 이용 권리를 포기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이유가 '오늘 내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서'라고 하자. 이게 어떻게 은혜로운 사건인가? 그냥 대책 없는 충동이지. 하지만 우리는 몇 분 잠깐 기도하고 나와서는 그간의 사업상 결정 일체를 뒤집고 수많은 타인의 계획을 엎으며 뭔가를 했더니 더 큰 "은혜"와 "감사 제목"을 주셨다는 간증을 너무 많이 들어서 기어코 인지부조화가 오고 말았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버렸다는 그것이 사실 단 한 번도 그들의 것이었던 적은 없는데.

심지어 번뇌를 내려놓고 해방되라는 소리는 아주 스토아철학적인 것이어서 대다수 고등 종교의 관념을 꿰뚫는 한 가지 테마이기도 한 바, 내려놓으라는 말은, 돌려쓰면 쓸수록 공허하고 납작한 말이기도 하다.

왜 그런 썰이 있었지 않은가? 성폭행당한 기억을 어떡하면 좋으냐고 하버드 나온 스님한테 물어봤더니 그 번뇌도 버려라 운운했다던. 이것은 아주 놀랍게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개소리인데, 왜냐하면 자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종교철학적 관념은 필연적으로 일체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번뇌 탈출이라는 테마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너무 쉽거든. 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 안에서는 배고픔도 사회문제도 트라우마도 다 그저 공이 된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그냥 그러려고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프로테스탄트이며, 기독교는 인간의 자아상보다는 그걸 포함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삼위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다. 하지만 당장 생활의 안정과 마음의 안락, 현실로부터의 적당한 도피와 허황된 자아상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 종교 소비자들에게 '내려놓기'는 위대한 깨달음의 경지였고 그래서 그토록 유행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고통이 없는 상태이고,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것은 그걸 위한 액면상의 종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진짜로 말을 꺼내 볼 생각인데, 바로 그 액면상의 형식적 종교를 공급하는 자들이야말로, 이러한 통속적 비대칭적 소시민적 종교인들을 양성해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은 확신범들이라는 생각이다.

3. 누가 누구더러 무슨 근거로 누구 좋으라고 다 내려놔라 자기를 버려라 운운하는가?

물론 권면과 동기부여의 차원에서 비유적으로 일컬어 깨우치는 말이라면 내려놓으라니 자기를 버리라니 하는 말의 효용이 1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비효용, 불경제, 자기모순이 이와 같이 명확한데도 그걸 매주 실질적으로 똑같이 반복하는 설법자들, 설교자들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이치란 대체 무엇일까?

간단하다. 삯꾼 목자에게도 양떼 자체는 필요한 것이다.

'네 것을 내려놓으라', '너는 아무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 되어 세계 만방 사람들과 영생할 것이다' 같은 말을, 그 은혜롭고 위대한 맥락에서 썩둑 들어내어 그 문자들 그대로만 되풀이 들려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과연 "아! 나는 부르심 받은 제자이지만 내가 제자된 것조차도 나의 노력이 아니고 값없는 하나님 은혜이구나! 이 놀라운 역설이 주는 감격으로 삶을 승화해야지!" 하는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건 극소수 적극적인 신앙인들이 누리는 행운이다. 일요일 오전 11시 반부터 12시 정도까지만 말씀 구경을 하고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냥 문자 그대로 들린다. '아 나는 아무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 자신을 그런 의미에서 부정해야겠네. 천국도 그냥 여기처럼 익명의 착한 존재로 살면 되는 곳인가 보다.'

심지어 그들은 행정적, 구조적으로도 철저하게 익명화되며 그 댓가로 생활에 어떤 위협이나 변혁도 가져오지 않는 소비적 종교 생활을 보장받는다. 관람객, 양떼 속 양이 되는 것이다.

대다수 교회 의자는 어느 자리에 누가 앉든 말든 상관없는 배치로 되어 있고, 교회 건축의 요체는 모든 청중이 모여 집중하는 단 하나의 점이 어디냐와 그 대중이 얼마나 빠르게 입퇴장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르르 몰려와 정해진 타이밍에 할렐루야 아멘 하고 지하주차장에서 쏟아져 나와 집으로 흩어지는 경험은, 영화관에 영화 보러 갔다 오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서, 그 한두 시간 동안 시청하는 내용만 적당히 괜찮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윤리적인 생각으로 기분을 전환하다 오는 주말 여가생활이 되고 만다. 흔히들 상투조로 "예배는 드리는 거지 보는 거 아닙니다" 하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이건 눈 가리고 아웅이다. 등장인물이 "우리 예배를 드리십시다? 아멘?" 하면 관객이 "아멘!" 외치는 게 규칙이라면, 그게 동네 오타쿠들의 "라이브 뷰잉"이지 무슨 예배냐는 말이다.

이걸 유지하려면 뭘 해야 할까? 뭘 하면 안 된다. 매주 매년 대동소이하게, 사실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주말 여가생활을 유지시켜야 하는 입장인 사람들이 있다. 그 존재는 필연적이다. 여가 생활의 형식을 띠며 개인적 심신의 평화를 추구하는 세속적 종교란 본질적으로 '서비스업'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service라는 영단어가 실제로 이런 맥락의 '예배'를 의미하겠는가?) 윤리도덕적 컨텐츠를 전문적으로 생산해 소비자 고객에게 공급하고 그 댓가로 프로젝트 추진 기금 등을 합법적으로 모금 받으며 대중의 멸렬한 현실로부터 의식적으로 동떨어질 권리를 얻는 이들은,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더 받고 덜 받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한 가지 과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참 좋다" 하는 얘기는 계속 들으면서 "목사님 그 말씀은 좀 부담된다" 하는 말은 가급적 안 듣도록 할 것.

자아를 죽이라느니 다 내려놓으라느니 하는 얘기들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용되는 화제들이다. 영양학적으로는 불균형하고 결과적으로는 교활한 것이어서, 이렇게 많이 팔면 안 되는데도 말이다.

앞서 살펴본 바 자기를 익명화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실제 가르침이 아닌데도 발신되거나 잘못 수신되는데,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게 실은 궁극적으로 '내려놓기',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인기 주제에 느슨하게 걸쳐 있기 때문이며, 그 주제는 이미 고찰하였듯이 자아의 아파테이아 상태에 관심이 있는 대다수 종교 소비자 대중의 수요와 욕망을 정확히 지시하므로 유행처럼 공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생산의 다른 한 견인축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종교를 소비할 청중을 유지하기 위한 서비스로서의 종교 기획인 것이다. 이미 자아가 없는 신도들은 누구도 두드러질 수 없는 건축학적 구조를 지닌 건물에 모여 자아 없이 살라는 텅 빈 가르침을 듣는데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너무나 깊게 와닿는다. 그 좋았던 경험은 다시 다음 주에 그 건물에 모일 빌미를 만들어 주고, 그 건물의 유지비는 헌금함에 착실히 쌓인다.

이래도 그 목사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그건 정말 당신의 문제다.


4. 대체 기독교란 정확히 어떤 기독교길래 이렇게 야단 법석인가?

기독교는 내려놓음이니 몰개성한 인간이니 하는 것의 정반대 대척점에 서는 신앙이다. 굳이 말하자면 (익명화라기보다는) 자기를 '그리스도를 본받은 구체적인 무엇인가'로 철저히 개변시키자는 믿음, 그리고 그걸 위해 (내려놓는다기보다는) 자기를 세상에 '내어준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것 말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해도 좋은 행위는 없다는 것을 기독교인은 믿고 긍정하고 그대로 한다. 자기를 철저한 자기나 타인으로 만들려는 것도 기독교가 아니지만, 자기를 이도저도 아닌 군중 속 소비자로 만들겠다는 것도 기독교가 아니다. 자기 손에 다른 게 쥐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면서 손을 펴는 게 기독교일지언정 다른 뭔가가 쥐어지길 기다리며 손을 벌리고 있는 건 도대체 기독교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생로병사 번뇌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려고 사람을 입고 오셨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별 수를 다 쓰시다가, 막판에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그걸 들어서 떼어 나눠주며 그러셨거든. 너네들 이게 내 몸이다 치고, 피다 치고, 다 먹어. 다 마셔. 그거 아냐, 이게 내일 내가 할 일이야. 난 죽으러 간다. 난 죽어서 내 몸 내 피를 너네한테,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나눠주려고 나눠줄 것이다. 그니까 절대로 이거 잊지 마 알았어? 그런 부탁을 하신 분이란 말이다. 이게 내가 아는 기독교다. 그건 정말이지 그 전체가 예수님의 일생처럼 절절하고 인간적이며 드라마틱하고, 무엇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신앙이다.

그런데 이건 뭐 대체 얼마나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이름 없는 군중 모아다 놓고 은혜가 어떠니 만군의 여호와가 어떠니 꽃밭에 무지개 피는 얘기만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게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만연해 있다면... 다같이 광야로 뛰어나가 메뚜기에 석청이라도 먹고 살아야 할 판이다.


PS. 다 적고 나서 생각이 났는데 이런 거 말고도 유행하는 설교 레파토리들이 있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씩 이런 식으로 좀 뜯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은혜, 믿음, 감사 정도? 이런 것들은 이제 예수님 장사 지낸 무덤보다 더 공허해져 버렸는데 주제별로 어떻게 드러내야 제일 효과적일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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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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