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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본부 티스토리에 기고했던 글. 블로그에 안 옮긴 모양이라 백업. 다시 읽어보니 참 급하게 썼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잘 구성해서 많은 동무들을 낚을 수도 있었는데 ㅋㅋ)



꿈나무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엽토군이에요.
 
여러분과 게임셧다운제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네? 뭐라구요? 그게 뭔지는 지나가는 특수반 애도 다 안다고요?
그럼요, 누구나 이게 뭔지 잘 알아요.
일정 시간 이상 게임을 절대 못 하게 한다는 법을 만드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게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라는 건 누구나 다 알지요.
저 어른들 빼고 말이에요.

근데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셧다운제를 비웃거나 어른들을 비웃으려고 제가 여러분을 찾아온 것도 아니에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꿈나무 어린이 여러분이 꼭 알았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건, 어른들이 여러분을 꿈나무라고 생각한다는 거에요.

여러분은 꿈나무라는 나무를 보셨나요?
못 봤죠? 유치하게스리, 세상에 꿈이 열리는 나무가 어디에 있겠어요, 그죠?
아무도 못 봤답니다. 돈이 열리는 돈나무는 무슨 동화에 나오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꿈이 열리는 나무란 있을 수 없어요.
(굳이 철학적으로 설명해 주자면, 꿈이란 추상명사고 개념적 존재자기 때문에 물리적 연장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열매로 열릴 수가 없는 거랍니다. 잘 외워놨다가 어른들에게 설명해 드리면 어른들이 여러분을 무시하지 못할 거에요.)
그런데 왜 어른들은, 세상에 있지도 않은, 혹은 있을 수도 없는 꿈나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부를까요?
아주 간단해요. '꿈나무' 할 때의 '꿈'이란 여러분의 꿈이 아니고 어른들의 꿈이거든요.

여러분은 꿈이 뭐에요?
대통령이니 소방관이니 아이돌 가수니 하는 건 꿈이 아니고 희망하는 직업이에요. 그건 꿈이 아니에요.
전 세계가 놀랄 만한 아이디어를 낸다거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편과 산다든가 하늘을 난다든가 우주정복 같은 게 꿈이지요.
꿈이 없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의 꿈을 알아맞혀 볼까요?
아마 일하고 싶을 때 조금 일하고 공부하고 싶을 때 조금 공부하고 남는 시간은 실컷 먹고 놀면서 사는 게 꿈일 거에요.
음... 아니면 할 수 없고요.
근데 그거 아세요? 사실 방금 제가 말한 저 꿈은 20대 이상의 대부분의 일반 현대인이 욕구하는 생활양식이랍니다.
귀족 계급이 자연발생하자마자 노예를 부려먹어가며 맛보았던 삶이기도 하고요.
요즘엔 돈 많이 번 사람들이 전기와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각종 재력으로 아주 드물게 실현하는 삶이기도 하고요.
아니면 진짜 돈 못 버는 아주 적은 수의 어른들이 꿈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루면서 세상을 등지고 살 때 저렇게 산답니다.
그리구요,
여러분 중 대부분의 부모님은 저렇게 살지 못한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 이 세계의 절대다수의 어른들은 정말 불쌍해요.
그분들은 전혀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면서 근근이 돈을 벌어 먹고 살기 바빠요.
논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어요.
여러분이 어른들을 불쌍하게 생각해 주세요.
방학 없이 몇십 년을 사계절 일만 하면서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어른이 되고 말 거예요.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른들은 여러분을 열심히 기르신답니다.
좋아하는 반찬 만들어서 거름으로 주고, 강남 8학군으로 데려가서 좋은 땅 좋은 학교에 심어 주고,
두발 검사를 하거나 영어 발음 좋게 하는 혀 수술을 시켜 가면서 가지치기를 하는 거에요.
어른들은 여러분을 갖은 정성으로 사랑을 담아 기르신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요.
나는 어릴 적 꾸었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러고 살지만, 내가 기르는 이 녀석들은 나중에 꿈을 실현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러니 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 꿈은 바로 어른들이 꾸다 잊어버린 그 꿈이지 여러분의 꿈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여러분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한 거고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만약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너는 꿈이 뭐니?"라고 물어본 적이 없거나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시지 않았다면,
그런데도 여러분에게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하고 잔소리를 하신다면,
백프로에요. 그건 여러분의 꿈이 아니라 어른들의 꿈이에요.
여러분의 부모님의 사랑은 사실 여러분에 대한 사랑이 아닌 거지요.
자기들이 꾸다 만 꿈 때문에 그러는 것뿐이에요.
슬프지만 정말이랍니다.

왜 이 재밌는 게임들을 못 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을 거에요.
그 이유는 간단해요.
게임은 꿈나무인 여러분을 좀먹는 잡초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좋은 토양에서 1분 1초라도 더 많은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쑥쑥 자라서 빨리 (어른들의) 꿈을 열매맺을 텐데,
잡초가 주변에서 자라나면서 여러분 주변에서 영양분을 빼앗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과수원 주인이 잡초를 내버려둘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번 과수원 주인은 초강력 제초제를 가져와서 마구 뿌려대면서, 여러분도 말라죽게 만들 참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못 해서.
이렇게 생각하면 어른들이 왜 여러분이 게임 좀 하는 거 가지고 왜 그렇게 아우성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그런데요, 이 이야기는 잘못됐어요.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여러분이 진짜 꿈나무에요?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잡초를 뽑아 없애야 하고 거름을 주고 물을 뿌려줘야 하는 나무가 맞냔 말이에요.
아뇨. 여러분은 사람입니다.
나무는 가만히 서서 자라나면서 크기나 커지고 열매나 맺으면 돼요.
하지만 여러분은 그 이상의 독립적 존재의미를 지닌 엄연한 사람이에요. (어려운 말로는 인격체라고 해요.)
여러분은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뭘 원하지 않는지,
뭐가 꼭 필요한지, 뭐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 스스로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걸 다른 인격체에게 전달하고 서로 이해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어른들이 여러분을 꿈'나무'라고 부르고 있을 그 때,
어른들은 여러분을 인격체, 사람, 어엿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나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거랍니다.
자기들의 꿈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자기연민과 개인적 욕망을 반영해서 순 어른들 마음대로 비육하는 한 그루의 나무.

게임을 규제하는 건 정말 사소한 문제에요.
어른들 눈에 여러분이, 사람이 아니라, 꿈을 열매맺기 위해 태어난 나무로 보인다는 게 진짜 문제랍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게임셧다운 따위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에요.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이렇다 할 이유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막는 다른 어떤 것들도 다 마찬가지랍니다.
그냥 어른들 맘에 안 들어서이거나, 꿈나무 여러분을 기르는 데 방해가 돼서일 뿐이에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드릴게요.
당장 부모님이나 선생님, 다른 어른들께 가서 물어보세요.
나를 꿈나무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리고 어른들의 대답을 한번 들어 보면서 왜냐고 물어 보세요.
그러다 보면 여러분도 너무 기가 막혀서 대꾸하고 싶어지기 시작할 거에요.
대꾸하세요.
어른들의 대답을 또 들어보세요.
계속 대꾸하세요. "나도 인격체예요" 라고 말하세요.
어른들은 아마 너무너무 놀라서 벌벌 떨 거예요. 아니면 "그래서 내가 너한테 뭘 해 달라는 건데?"라고 화를 내실 거예요.
그때부턴 여러분의 솔직한 마음을 진지하게 말하세요.
어른들이 여러분의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고 무조건 "공부해라", "까불지 마라" 화를 내시면 다시 물어보세요.
내가 당신들이 기르는 꿈나무냐고.
난 당신들이 기다리는 당신들의 꿈을 열매맺어 줄 생각이 병아리 눈꼽만큼도 없다고 말해 버리세요.
그 다음부터는 여러분이 아마 잘 해 나갈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긴 글을 읽을 줄 아는 친구들이라면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저는 게임을 거의 안 해 봤어요.
서든어택이 얼마나 재미있는 게임인지, 스타크래프트는 어떻게 플레이하는 거고 뭐가 이기는 건지도 몰라요.
그냥 옆에서 기웃기웃 구경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재미없는 어른입니다.
세상을 사는 여러 재미 중 게임의 재미는 잘 모르는 불쌍한 대학생이에요.
저처럼 되지 마세요. 실컷 게임하세요.
나중에 커서 놀라는 건 어른들의 잘못된 가르침이에요.
제가 그 말 듣고 '내가 게임을 안 배우는 건 잘하는 거야' 하면서 컸는데 지금 땅을 치고 후회해요!
게임이 너무 어려워서 배우지 못하겠거든요!!!

노세요. 경찰서에 끌려가지 않을 수준에서 미친듯이 노세요.
삶을 즐긴다는 게 뭔지 배울 수 있을 때 배우세요. 생의 행복을 기약 없는 미래에 담보잡힌 불행한 강박적 보육자 혹은 속물스러운 욕망을 다른 인격체에게 일방적으로 투영하고 강요하는 욕구불만에 가득찬 가엾은 기성세대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에요.
여러분의 즐겜을 기원합니다. 진심으로.
엽토군 드림.


2012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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