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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2017. 1. 10. 21:49

최근 읽고 있는 텍스트는 위키문헌에 올라와 있는 각종 연설과 선언, 문학 작품들이다. 위키인용 랜덤도 가끔 돌리고 있다. 한국어 위키인용집은 좀 빈약해서… ㅋ 그리고 팟캐스트로 KBS 라디오 시사고전을 틈틈이 조금씩 듣고 있다.

사실 알은 지는 3년쯤 됐는데 중간중간 구독을 쉴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건 요즘 꾸준히 들을 계기가 있어 다시 듣고 있고, 또 뭐 있더라… 아 그래, <아수라>, <라라랜드>, <너의 이름은.>, <아가씨>처럼 모두가 다 넋놓고 텍스트로 읽고 있는 작품들은 가급적 안 읽을 작정이다.



여기에는 뭐 우열의 차원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이냐 부차적인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위키문헌 랜덤을 돌리다 보면 원초적인 무엇들과 마주치곤 한다. 김명순이라는 역사상의 여성주의자를 만나기도 하고, 환단고기 본문을 읽게 되기도 하고,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의 기자회견문이나 박근혜의 개헌 제안 국회 연설 원문을 접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분명 오늘날 숱한 트윗과 카드뉴스와 소리 소문으로 가공 각색되어 전해지는 것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원문을 내가 직접 정독한 적은 없지 싶어서, 전혀 새롭고 경이적인 경험이 되고 있다.


라디오 시사고전도 마찬가지다. 3분이라는 시간이 짧은 편이고, 그걸 대다수 청취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려다 보니 좀 안 맞는 예시나 대수롭지 않은 군말들도 왕왕 들어가곤 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절대적으로 지키고 있는 한 가지 원칙, 동양 고전 속의 원래 한문을 제대로 된 방식으로 새겨 읽고 뜻을 푸는 것만으로도 이 기획은 충분히 훌륭한 데가 있다. 덕분에 나 같은 사람도 “불학자는 수존이나 행시주육이라” 같은 문자를 쓰고 산다.


방금 잠깐 밝혔지만, 요즘은 모든 텍스트가 아무 컨텍스트에 집어넣어도 쭉쭉 흡수되도록 굉장히 잘 커팅되고 소화되고 표백되어 다른 뭔가의 재료로만 쓰이고 있다. 흡사 식자재 가공육과 같다고나 할까. 요즘 시절에 좋은 제작자, 훌륭한 크리에이티브란 바로 이 식자재 가공육에 무슨 양념을 치고 어떤 조리법으로 끓여서 어느 국물에 담가 내놓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걸 잘 한 것이 그 무슨 영화니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니 하는 것들인 모양이다.


마침 우연찮게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 역시 이르기를 <너의 이름은.>을 짓기 꽤 오래전에 한동안 일본 고전 문학을 탐독하면서 서로의 몸이 바뀌는 설정을 접할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렇다면 그 고전 문학은 바로 그 당대 시절의 일본 대중에게 <너의 이름은.>만큼의 감동을 주던 무엇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난 아니라고 본다. 요즘 사람들이 굉장한 영화라고 칭송하고 있는 작품들이 다들 이런 식이다. 고전 텍스트라는 이름의 몇 가지 식재료를 가장 현대적으로 버무린, 어쩌면 그뿐일 수도 있는 결과들.


세상이 비인간적이기 짝이 없어져서, 우리 중 대다수는 2시간 정도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할 시간이 영화 볼 때 말고는 없는 지경에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라라랜드와 너의 이름은.에 지나친 의미 부여와 과대 해석을 수행한다는 감이 있다. 사실 그 패러디 포스터들은 벌써부터 질리고 언론 보도가 나가는 시점에서는 이미 식상하다는 감이 있다. 사람들의 일반 교양 수준이 지금보다 책 한 권 정도만 더 높았더라면 이 영화들은 그냥 잘 만든 영화, 논술용 영화 정도로 적당하게 언급되고 지나갔을 것들인데, 참, 싶다.


그래서 일부러 안 볼 생각이다. 사실은, 다들 하도 떠들어서 이젠 1도 보지 않았는데도 어느 정도 그 내용이 추측이 된다. <아수라>는 그냥 누가 착하네 나쁘네를 설명할 것 없이 내 눈에 거슬리는 새끼는 다 조져버린다는 이야기일 테고, <라라랜드>는 현실적이기만 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완전한 삶을 누리는 촌각에 대한 환상일 테고, 등등 말이다. 썩 틀리지 않지 않은가? 이렇게 잘 응용되고 가공 조리되어 무슨 맛일지 대충 짐작이 되면, 안 먹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쓸데없이 길게 썼는데 결국 요약하자면 난 응용 제작된 상업 콘텐츠들보다는 좀더 원초적인 텍스트들을 보려고 한다. 요즘 그게 내 취향이기도 하고, 그게 불편한 팝업을 두어 개 줄이는 원초적인 방법일 거라고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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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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