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글 하니까 생각나는데요, 요즘 누가 읽어는 줄까 싶은 산업용 글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제 평생 이렇게 전략적으로 글쓰느라 하루 이틀 마구 시간을 보내보는 건 서울대를 가보겠답시고 자기소개서를 써보던 때(사실 그때도 지금처럼 아득바득하진 않았지만ㅋ... 엄마 미안) 이후 처음인 듯합니다.
3. 여기저기 컨택을 넣어야 할 일이 생겨서 각종 기업체의 CEO라는 사람들을 찾아다녀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연락처가 회사 홈페이지 주소더군요. 대단한 사람일수록 소통하는 척할 뿐 실제로 자기와 연락할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한 거겠죠. 그치만 지금의 나도 그렇게 되는 날이 올까 생각해 보면 좀 그건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제 이메일 주소는 앞으로도 알기 쉬운 곳에서 알려지게 될 거 같습니다. 내가 컨택하는 건 무섭지만, 나에게 들어오는 컨택은 무시하고 싶지 않아요.
4. 단기알바를 열심히 뛰면서 장기알바를 해 보려고 찾는 중입니다. 추석선물 배송 알바를 하게 됐어요. 기대되네요. 땅밟기 신나게 해야지 ㅋㅋ
5. 방금 전에 집 인터넷이 빨라졌어요 U+로 바꿨거든요 과연 앞으로 얼마나 갈지? 여튼 좋네요
6. 휴학했습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휴학중입니다. 갈 곳은 없지만 오라는 곳은 많아요! 네 그러합니다.
요즘 글쓰기 한 번에 힘을 주지 못하니까 자꾸 뱃살 처지듯이 글이 처진다. 무슨 운동을 해야 글에 근력이 붙을까? 퇴고를 하는 게 제일이겠지?
최신 일본 만화 몇 개를 추천받은 김에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기운이 빠지고 맥이 풀려서
보지를 못하겠다.
아무도 모에하지 않고, 무엇도 나를 설레게 하지 않으며, 어느 작품도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fantasy의 씨가 마른 자리에 unreality의 기분 나쁜 검버섯만 자라고 있다는 기분이다.
Fantasy란 무엇인가? 판타지, 몽상, 환상곡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지만, 관용적 표현으로서 '기발한 생각'을 표현할 때도 판타지라는 어휘를 쓴다. 여기서의 의미는 그 뜻이다. Fantasy란 단순히 '판타지 소설' 따위에서나 사용될 만한 개념이 아니다. 더 대단한 개념이다. "일어날 법하지만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일들이 적어도 작중에서만큼은 절대적이고 충만한 실존조건으로서 정교하고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양상", 그것이 바로 fantasy다.
사실은, 어떤 서사이든 매력적인 서사라면 하나의 미덕으로서 반드시 판타지를 갖춘다. 아주 의외라고 생각될 만한 예를 하나 들어 보여주겠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사슴 한 마리의 "향기로운 관"과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본 감동을 그린 노천명의 <사슴>에서조차, 사실은, 하나의 판타지가 존재한다. 당장 표층적으로만 보아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무척 높은 족속", "잃었던 전설" 등 몹시 '환상적'인 시상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이 모든 시적 장치들이 순수하게 시각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상으로 독자를 어떤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할 만한 어떤 장소'로 초청해 이끈다는 것이, 이 작품에 fantasy가 있다고 할 만한 이유이다. 이 시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운 삶"[각주:1] 따위로 읽지 않고 제대로 읽는다면, 누구나 이 시를 감상할 때만큼은, 관을 쓰던 족속이 사슴이 되었구나, 하는 식의 허황되지만 아름답고 흥미로운 공상으로 이끌려 간다는 것이다. 시어 하나하나가 그런 공상으로의 안내판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대로 된 (값어치를 하는) 어떤 서사에서나, 4컷만화부터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찾을 수 있는 격정이고 미덕이다. 단순히 지면과 화면에 그려진 대상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총체적으로 실존해낸 결과로서 스스로 제시하고 증언하는 어떤 모형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게 fantasy고, 그것이 잘 된 서사와 "대충 기승전결만 맞추면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성의하게 작성하는" 서사의 결정적 등위를 가른다.
나는, 정작 아키하바라의 오타쿠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어떤 캐릭터의 '모에함' 역시 fantasy를 그 캐릭터에게 막대하게 부과한 결과물이라고 이해한다. 모에하다고 소문난 캐릭터들을 잘 살펴보라. 그들의 가정사, 개인적 취미, 말버릇,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는지 등 정말 아무래도 좋은 것들까지도 다른 '병풍 캐릭터'에 비해 훨씬 더 자세하고 요연하게 제시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단순히 가슴이 크다든가 츤과 데레의 비율이 좋다든가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충실하게 실존한 바로 그 캐릭터로서 독자적이고 fantasy적인 인간상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 캐릭터는 모에로워지는 것이다. 모에는 속성에 있지 않고 fantasy에 있다. 캐릭터의 fantasy를 형성하는 주요 심상에 흔히 '모에 요소'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들이 포함될지는 모르지만, 가능세계에 대한 해석과 process 없이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모에 요소의 단순 가감승제가 모에 캐릭터를 만들어 흥행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요즘은 사방에서 도무지 제대로 된 fantasy를 찾을 수 없다는 기분이다. 대신 unreality가 판을 친다.
Unreality 즉 비현실성이란, 허황됐다는 말이 아니라, "그럴 리가 없음", "와 닿지 않음"의 어감에 더 가깝다. Real이 '생생한, 생각한 그대로인'의 의미를 갖는다면, unreal이란 '허위, 부자연스러움, 어색함, 가공적인'의 의미를 갖는 어휘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서 견디지 못하겠다. 이 블로그에서 몇 번 '깐' 바 있는, 그 공허하고 가볍기 짝없는 3D 블록버스터 장면들이나 누구도 진짜 피가 튀기도록 진짜로 육체를 난도질하지 않고 있음을 알 법한 싸구려 슬래셔 신, 공장에서 방금 막 질소를 잔뜩 충전해서 내놓은 것 같은 실속 없는 모에 캐릭터들 따위가, "이런 스펙터클/폭력/캐릭터 따위가 있긴 어디 있다는 거야"와 같이 이성적으로 기초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Unreal하니까 unreality로 인지할 뿐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아무것도 아무 중력도 갖지 못하게 된 사이버스페이스 위주의 21세기가 되면서, 정말 거짓말처럼 놀라운 속도로, 서사 산업에서 그 unreality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렸다. "중력(gravity)"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견고한 현실성의 물감(物感)이, 요즘의 서사에서는 우스울 정도로 간편히 무시되고 있고, 그래서 그저 '부유하는(floating)' 컨셉과 내러티브와 캐릭터와 펀과 프로덕트들만이 강냉이 뻥튀기 잔치라도 벌어진 양 사방에 가득하다. 예를 들자면, 10년 전에는 200발의 실탄만을 가지고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촬영을 강행해야 했던 총격전 영화를, 요즘은 2만 발이고 2억 발이고 쏘아댈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해서 제작해 버리는 셈이다. 이 경우 10년 전의 그 영화는 총격전을 위해 많은 '중력'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고, 바로 여기에서 특유의 fantasy―대결의 긴장감, 총탄의 타격감, 총상의 생생함―이 만들어진다. 반면 모든 총알과 총상과 총격전 장소가 그린스크린과 애프터이펙트에서 제작되었을 때는 스토리와 캐릭터가 굳이 실존해야 할 세계의 실제성(이 바로 중력이라고 총칭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이 확보되지 않음에 따라 fantasy가 만들어지지 못하기에, 결과적으로 값싸고 빠르고 간편하고 가볍고 공허하고 unreal한, 그래서 관객이 굳이 그 세계로의 초청에 응할 이유가 전혀 없는 하찮은 서사가 만들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작품에도 열광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영화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기 바쁘고, 만화는 더 unreal한 쓰리사이즈와 더 괴랄한 성미의 어떤 정신이상자들[각주:2]로 채워지며, 음악이며 뮤직비디오와 소설과 게임 등등의 어느 서사 산업에서도 잠시잠깐 반짝 돈을 벌어볼 만한 unreality 찾기 이상의 fantasy 구축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매크로와 단축키와 모에 속성 목록을 몰랐던 20세기 말에 판타지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아닌게아니라 unreality는 그런 곳들―지면과 화면―에서밖에 감상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 인류는 열광에 지쳤고, 판타지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버렸으며, 사이버스페이스와 기술주의적 접근법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폭발 장면, 예쁜 엉덩이 등이 주는 unreality를 판타지인 줄로 오인하여 과다복용하고 있다. 그러니 <에반게리온>과 <매트릭스> 이후의 메가히트 작품이 나오지 않는대도 누굴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천사들이 과자를 배설(排泄)한다든가 각종 이상한 성격의 여자아이들이 여자에 관심 없는 남자애 주변에서 하렘을 만든다든가 어떤 소년이 반 식인종 반 인간의 운명을 짊어진 뒤 세상에 섞여들어 살 수 있는지 고뇌한다든가 하는, 기발한 듯 기괴하고 재밌는 척 힘없고 쌔끈한 척 클리셰적인 "최신작들"을 것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누군가를 탓하고 싶기는 하다. 도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도 "이거 뭔가 와 닿지 않는다"라고 소신 발언하지 않은 것인가?
Fantasy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한끗 차이로 일으켜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발견과 재해석과 끊임없는 자문자답의 반복과 중력을 이기려는 '솟아오름'이 없이, 나 공중에 떠 있소 하고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늘을 날려면 무엇이든 예외 없이 양력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것들이 헬륨 가스를 잔뜩 마시는 등의 알 수 없고 변칙적인 원리로 unreal하게 공중에 떠서 나름 돈을 법네 유행합네 히트작입네 행세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저것들이 언제 다시 이 지면으로 와르르 추락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다만 아찔할 따름이다.장담할 수 있는 것은, 지금처럼 아무도 솟아올라서 공중에 뜨려는 생각이 없는 지금에는, 제대로 된 날개짓과 최소한의 고도만 확보하면, 그 서사는 "정통파 기대주"로서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겠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쿠메타 코지나 우지이에 토젠의 작품들이 그러했다.
P.S. 몰랐는데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이 있더라.
실제로 이런 비평이 존재한다. 그것도 구글 검색결과 1순위 사이트에서 그렇게 썰을 푼다. Fantasy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한국인의 천박함은 그 정도인가 싶다. [본문으로]
절대다수의 리액션들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다. 2D 캐릭터니까 납득되는 수준이 아니다. 치명적으로 모에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자연스럽지도 않다면, 왜 그들은 굳이 그런 리액션을 해야 하는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한규현의 현대미술강좌 중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에 대한 tribute로서 이 시리즈의 1번을 이걸로 선택했다. (그는 바로그찌라시의 양태가 다분히 현대미술에 가깝다고 골백번 강조했다.) 사실 위주에 각색만 더해서 쓰는 종류의 글이기 때문에 좀더 문학적인 표현과 감성팔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 철판도 한 장이었고 찌라시도 한 장이었다는 사실을 좀더 부각하고 싶었다.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내후성강판이 생각보다 여러 장소에서 사용되더라. 아 그것들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규자의 다음 강좌를 어서 듣고 싶다. 후후
금감원 카페 알바를 이틀만에 짤리고 규장각 가서 작업이나 하려고 버스 타고 신촌 가다가 떠올랐던 소재를, 골치 썩지 말고 그냥 막 화내면서 쓰자는 느낌으로 간단히 옮겼다. 뭘 써놓고 나서 그 후속 에피소드가 모락모락 생각나는 건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운 기분이지만, 일단 추세를 지켜볼 생각. 시드노벨은, 아무리 전체수준이 낮네 로리만 파네 왜색이 짙네 해도, 여전히 가장 한국적으로 라노베를 해석하고 있는 사회이다. 참고로 갑자기 혜화동9시반이 생각나서 용준이란 이름을 따왔다. ㅋ
자료조사를 하면서 예상보다 더 많이 쏟아져나오는 뒷이야기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상당한 격려가 되었다. William Crotch, 오르간에 재능을 보였던 한 어린이가 전공자가 되어 어느 날 교수들이 시켜서 작곡한 한 장의 악보가 빅 벤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는 그의 음악이 캠브릿지 차임스에 사용되는 것 정도만 보다가 영면하였을 것이다. Epics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결자라는 번역어를 생각해 봤는데 이건 좀더 생각해 보자. 여튼 참으로 epic이라 할 만한 얘깃거리였다.
백만년만에 로그인해서 글을 써 봅니다. 잉여는 아니지만... 이런 썰을 풀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일상물", 그것은 생산 및 소비가 과열 팽창해 있는 일본 서사 산업에서 등장한 장르입니다. 시청자의 경험, 미디어가 만들어낸 stereotypes 혹은 그에 준하는, 별다른 엄청난 사건의 기승전결이 없는, 소소한 신변잡기적 일화와 그 주인공으로서 각자의 개성이 잘 설계된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즐기는 장르이지요. 이 장르의 대중화가 <아즈망가 대왕>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큰 반론은 없을 겁니다. <미나미가>라는 명작, <러키☆스타>라는 시대의 총아, <A채널>이라는 극단주의 작품에서 <일상>이라는 제목의 변칙이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주로 미소녀물의 대표 장르 중 하나로 일본 시장에서 정착해 왔고, 그 외의 외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아침드라마'는 일상물이 되지 못하지요. 기승전결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본인은 이런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물이란 '일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비일상이 배제된 상태'를 다루는 것뿐이다."
그것은 일본식 일상물 특유의 클리셰적인 전개 그 자체와, 거기에 일체의 잡음 내지 변수가 배제된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의구에서 왔습니다. 1화는 신학기, 2화에서 5화까지 대충 캐릭터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 6화에서 여름방학과 불꽃놀이와 바다, 7화쯤에서 새 캐릭터, 8화에서 마지막회 직전까지 다시 2학기와 일상과 '문화제', 마지막회에서 뭔가 결말을 내야 하는 이야기 및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이 클리셰적인 프로그램 구성, 바로 이것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등장인물 누구도 어느 순간에도 경제적 위기를 겪지 않고, 부모님 등의 어른이 시종일관 일체 관여하지 않으며, 아파 보아야 감기에 걸리는 정도이고, 뉴스라 할 만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의 이야기란 말이지요. 물론 이런 '있을 법한 것이 없다'라는 반론은 매우 값싸게 제기되고 간단하게 반박되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일상물"의 일상과 우리의 '진짜 일상'이 같을 수 없는 결정적인 다른 이유가 따로 있는데, 그것은 일상물에 최소한의 세월(歲月)의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times)이란 무엇인가? 세월이란 연쇄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시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인간 이성의 본능적 작용에 의한연관 찾기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은, 반복이 되는 듯하면서도 최소한의 인과 혹은 전후가 인지되도록 재구성되고, 그와 동시에, 어떤 일관된 방향이 있는 'season'을 보내면서도 이런저런 돌발 이벤트가 발생하는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당장 여러분이나 여러분 친구의 트위터(혹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가만히, 월 단위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의 일상도 그저 지리멸렬하게 쳇바퀴를 돌고 있지는 않으며,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누구의 일상도 할리우드 추격전 영화처럼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두 가지 패턴 사이의 미묘한 배율, 거기에 일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려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매일이 같지만 매일이 다른 것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당위'와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일상이란 개념에 대한 존재론/인식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실제 일상 생활이란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일상물'의 일상은 바로 이 세월 개념이 완벽하게 배제된, 그래서 클리셰적으로만 운용 및 각색되는 하나의 뼈대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5월 히나마츠리와 여름방학 유카타 불꽃놀이와 문화제와 크리스마스와 신년참배는 그토록 이물감이 느껴지는 작위적인 장면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행사들 중 하나는 거르지 않겠는가 하는 따위의 무성의한 의심 이전에, 왜 그렇게 일련의 이벤트들을 치르는 것이 그토록 맥락 없이 당연하게 떡떡 주어지느냔 말입니다.
2화니까 친해지려고 도시락을 같이 먹고 3화니까 꽃놀이를 가고 4화니까 하복으로 갈아입는 식인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지난 회차의 심경 변화를 이어받는 것도 없고, 새로 설정이 추가되는 일도 극히 드물고, 그 모든 것 이전에 그저 날씨에 맞추어 자동 인형처럼 너무나 전형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이 그 숱한 일상물들의 위화감의 정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대체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의 그 똑똑한 서사 산업 관계자들은 왜 이렇게 일상이 아닌 일상을 뻥튀기 기계 돌리듯이 계속 돌리고 있느냐? 그래야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일상들, 일상에 일정 비율 섞여있음으로서 더욱 일상을 일상답게 하는 변칙적 사건들을 배제하는 것이, 캐릭터들의 특징과 만담과 매력과 모에 포인트를 어필하는 데 조금이라도 여력을 더 투입하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일상물 장르는 초창기에 분명 "일상의 느긋함"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치유계의 범주에 속했던 것이, 점차 쓸모 없는 노출, 패러디, 새 캐릭터로 밀어붙이기 따위로 점철된 "미소녀 캐릭터물" 범주에 속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나미가>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일반적인 범주의 세자매로 버틸 수 없게 되자 일반적이지 않은 범주의 주변 인물을 마구잡이로 동원하여 이제는 일상이라 부를 수 없는 특별한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장르 중 하나가 분명하게 시장에서 승리한 이래 "어쨌든 '미소녀'가 뭔가를 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라는 사고가 공급자들 측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리고 미소녀 캐릭터를 개발한 다음 그들을 출연시킬 곳으로서 가장 안전하게 세울 수 있는 무대가 바로 일상물이 구축해 놓은, "세월이 배제된 춘하추동"의 원형극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쨌든 미소녀들 중 한두 명만 인기를 얻고 나면 어떻게든 된다"라는 안일함이 우후죽순으로 양산한 질 떨어지는 일상물들인 것입니다. <학생회의 일존>, <에비텐> 따위가 여기에 속합니다. 차라리 줄거리라도 있었으면 욕이라도 덜 먹었을 것을, 오로지 개성 있는 캐릭터가 매회 바다다 합숙이다 도전과제를 해내는 따위의 이야기로 때우면 어쨌든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무책임하게 만들어진 작품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물에 대한 재정립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와전된 개념―"비일상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목가적 가능세계"―이 아니라, 세월이 존재하고 캐릭터가 그 세월에 반응하는 식으로 굴러가는, 상황과 인물 성격과 세계관 설정에 더 구체적인 현실성이 부여된 채 그런 세상의 별다를 바 없이 매일 흥미진진하고 잔잔하게 파도치듯 일렁이는 삶의 향연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잘 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쓸 수 없다면 애당초 일상물이 아닌 다른 장르나 소재나 기승전결을 구상하기 위해 '딴 데 가서 알아봐야' 할 것이고,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만 일상물을 써낼 때에야 일상물은 소기의 목적 내지 온전한 존재 양태를 달성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픽션과 서사를 통해 구제받고 부각되어야 할 중요한 소재의 하나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월의 개념이 "일상물의 일상"에는 없게 되었기에, 그 개념을 일상물에 넣든지 아니면 일상물 장르를 폐기하든지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야 관계자가 아니니 속사정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비자로서 이 한 가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다지 모에하지도 않은 미소녀들이 그 밥에 그 나물로 따분하게 보내는 사계절로 구성된 13화 분량의 산업 쓰레기가, 다시 또 양산되어 재고로 쌓일 뿐입니다.
이미 영화나 책으로도 여러 번 다뤄졌었고 야구 팬들이라면 대충 다 알지만, 소재 자체가 워낙 파워풀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이런 류의 글을 쓰려고 일부러 관련 영화를 다운받아 본 건 처음인 듯. 그거랑, 초반 도입의 hook이 약하다는 이전 버전에 대한 피드백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갈아엎은 게 잘한일. 공유를 해 주신 분이 "눈물도 살짝 날 뻔했다"라고 코멘트해 준 걸 봤는데 눈물이 살짝 날 뻔했다. 수많은 잡지들의 막대한 텍스트들을 보고 기가 죽으려고 하는 이 시기에 큰 힘이 되었다.
이 괜찮은 소재를 잘 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좀더 흥미진진하게 각색해서 쓸 걸 그랬나 싶다. 소창영이란 사람은 이후 SBS의 <세상에 이런일이> 취재진이 수소문했을 때 찾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센세이션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글에서도 언뜻 비쳤지만, 우리나라의 생방송 사고 역사가 음모론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뜻깊다.
'바로그페북 페친들이 라즈베리 파이에 관심을 가질까?'라고 지레 겁먹고 들어갔던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어려웠다(내 기억이 맞다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세 번인가 했다). 특히 도입부가 어려웠다. 생소한 것을 소개할 땐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법한 소재를 쓰니까 바이럴이 알기 쉽게 터진 글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소재에 천착할 순 없는 법. 어떡하면 아즈망가 대왕이란 만화 자체의 대단함을 각인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만화의 '구별됨'에 집중하게 됐다. 조사 과정에서 고바우 영감으로 소재를 바꿀까 고민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