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글 하니까 생각나는데요, 요즘 누가 읽어는 줄까 싶은 산업용 글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제 평생 이렇게 전략적으로 글쓰느라 하루 이틀 마구 시간을 보내보는 건 서울대를 가보겠답시고 자기소개서를 써보던 때(사실 그때도 지금처럼 아득바득하진 않았지만ㅋ... 엄마 미안) 이후 처음인 듯합니다.
3. 여기저기 컨택을 넣어야 할 일이 생겨서 각종 기업체의 CEO라는 사람들을 찾아다녀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연락처가 회사 홈페이지 주소더군요. 대단한 사람일수록 소통하는 척할 뿐 실제로 자기와 연락할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한 거겠죠. 그치만 지금의 나도 그렇게 되는 날이 올까 생각해 보면 좀 그건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제 이메일 주소는 앞으로도 알기 쉬운 곳에서 알려지게 될 거 같습니다. 내가 컨택하는 건 무섭지만, 나에게 들어오는 컨택은 무시하고 싶지 않아요.
4. 단기알바를 열심히 뛰면서 장기알바를 해 보려고 찾는 중입니다. 추석선물 배송 알바를 하게 됐어요. 기대되네요. 땅밟기 신나게 해야지 ㅋㅋ
5. 방금 전에 집 인터넷이 빨라졌어요 U+로 바꿨거든요 과연 앞으로 얼마나 갈지? 여튼 좋네요
6. 휴학했습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휴학중입니다. 갈 곳은 없지만 오라는 곳은 많아요! 네 그러합니다.
요즘 글쓰기 한 번에 힘을 주지 못하니까 자꾸 뱃살 처지듯이 글이 처진다. 무슨 운동을 해야 글에 근력이 붙을까? 퇴고를 하는 게 제일이겠지?
최신 일본 만화 몇 개를 추천받은 김에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기운이 빠지고 맥이 풀려서
보지를 못하겠다.
아무도 모에하지 않고, 무엇도 나를 설레게 하지 않으며, 어느 작품도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fantasy의 씨가 마른 자리에 unreality의 기분 나쁜 검버섯만 자라고 있다는 기분이다.
Fantasy란 무엇인가? 판타지, 몽상, 환상곡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지만, 관용적 표현으로서 '기발한 생각'을 표현할 때도 판타지라는 어휘를 쓴다. 여기서의 의미는 그 뜻이다. Fantasy란 단순히 '판타지 소설' 따위에서나 사용될 만한 개념이 아니다. 더 대단한 개념이다. "일어날 법하지만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일들이 적어도 작중에서만큼은 절대적이고 충만한 실존조건으로서 정교하고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양상", 그것이 바로 fantasy다.
사실은, 어떤 서사이든 매력적인 서사라면 하나의 미덕으로서 반드시 판타지를 갖춘다. 아주 의외라고 생각될 만한 예를 하나 들어 보여주겠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사슴 한 마리의 "향기로운 관"과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본 감동을 그린 노천명의 <사슴>에서조차, 사실은, 하나의 판타지가 존재한다. 당장 표층적으로만 보아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무척 높은 족속", "잃었던 전설" 등 몹시 '환상적'인 시상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이 모든 시적 장치들이 순수하게 시각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상으로 독자를 어떤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할 만한 어떤 장소'로 초청해 이끈다는 것이, 이 작품에 fantasy가 있다고 할 만한 이유이다. 이 시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운 삶"[각주:1] 따위로 읽지 않고 제대로 읽는다면, 누구나 이 시를 감상할 때만큼은, 관을 쓰던 족속이 사슴이 되었구나, 하는 식의 허황되지만 아름답고 흥미로운 공상으로 이끌려 간다는 것이다. 시어 하나하나가 그런 공상으로의 안내판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대로 된 (값어치를 하는) 어떤 서사에서나, 4컷만화부터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찾을 수 있는 격정이고 미덕이다. 단순히 지면과 화면에 그려진 대상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총체적으로 실존해낸 결과로서 스스로 제시하고 증언하는 어떤 모형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게 fantasy고, 그것이 잘 된 서사와 "대충 기승전결만 맞추면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성의하게 작성하는" 서사의 결정적 등위를 가른다.
나는, 정작 아키하바라의 오타쿠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어떤 캐릭터의 '모에함' 역시 fantasy를 그 캐릭터에게 막대하게 부과한 결과물이라고 이해한다. 모에하다고 소문난 캐릭터들을 잘 살펴보라. 그들의 가정사, 개인적 취미, 말버릇,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는지 등 정말 아무래도 좋은 것들까지도 다른 '병풍 캐릭터'에 비해 훨씬 더 자세하고 요연하게 제시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단순히 가슴이 크다든가 츤과 데레의 비율이 좋다든가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충실하게 실존한 바로 그 캐릭터로서 독자적이고 fantasy적인 인간상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 캐릭터는 모에로워지는 것이다. 모에는 속성에 있지 않고 fantasy에 있다. 캐릭터의 fantasy를 형성하는 주요 심상에 흔히 '모에 요소'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들이 포함될지는 모르지만, 가능세계에 대한 해석과 process 없이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모에 요소의 단순 가감승제가 모에 캐릭터를 만들어 흥행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요즘은 사방에서 도무지 제대로 된 fantasy를 찾을 수 없다는 기분이다. 대신 unreality가 판을 친다.
Unreality 즉 비현실성이란, 허황됐다는 말이 아니라, "그럴 리가 없음", "와 닿지 않음"의 어감에 더 가깝다. Real이 '생생한, 생각한 그대로인'의 의미를 갖는다면, unreal이란 '허위, 부자연스러움, 어색함, 가공적인'의 의미를 갖는 어휘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서 견디지 못하겠다. 이 블로그에서 몇 번 '깐' 바 있는, 그 공허하고 가볍기 짝없는 3D 블록버스터 장면들이나 누구도 진짜 피가 튀기도록 진짜로 육체를 난도질하지 않고 있음을 알 법한 싸구려 슬래셔 신, 공장에서 방금 막 질소를 잔뜩 충전해서 내놓은 것 같은 실속 없는 모에 캐릭터들 따위가, "이런 스펙터클/폭력/캐릭터 따위가 있긴 어디 있다는 거야"와 같이 이성적으로 기초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Unreal하니까 unreality로 인지할 뿐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아무것도 아무 중력도 갖지 못하게 된 사이버스페이스 위주의 21세기가 되면서, 정말 거짓말처럼 놀라운 속도로, 서사 산업에서 그 unreality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렸다. "중력(gravity)"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견고한 현실성의 물감(物感)이, 요즘의 서사에서는 우스울 정도로 간편히 무시되고 있고, 그래서 그저 '부유하는(floating)' 컨셉과 내러티브와 캐릭터와 펀과 프로덕트들만이 강냉이 뻥튀기 잔치라도 벌어진 양 사방에 가득하다. 예를 들자면, 10년 전에는 200발의 실탄만을 가지고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촬영을 강행해야 했던 총격전 영화를, 요즘은 2만 발이고 2억 발이고 쏘아댈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해서 제작해 버리는 셈이다. 이 경우 10년 전의 그 영화는 총격전을 위해 많은 '중력'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고, 바로 여기에서 특유의 fantasy―대결의 긴장감, 총탄의 타격감, 총상의 생생함―이 만들어진다. 반면 모든 총알과 총상과 총격전 장소가 그린스크린과 애프터이펙트에서 제작되었을 때는 스토리와 캐릭터가 굳이 실존해야 할 세계의 실제성(이 바로 중력이라고 총칭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이 확보되지 않음에 따라 fantasy가 만들어지지 못하기에, 결과적으로 값싸고 빠르고 간편하고 가볍고 공허하고 unreal한, 그래서 관객이 굳이 그 세계로의 초청에 응할 이유가 전혀 없는 하찮은 서사가 만들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작품에도 열광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영화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기 바쁘고, 만화는 더 unreal한 쓰리사이즈와 더 괴랄한 성미의 어떤 정신이상자들[각주:2]로 채워지며, 음악이며 뮤직비디오와 소설과 게임 등등의 어느 서사 산업에서도 잠시잠깐 반짝 돈을 벌어볼 만한 unreality 찾기 이상의 fantasy 구축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매크로와 단축키와 모에 속성 목록을 몰랐던 20세기 말에 판타지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아닌게아니라 unreality는 그런 곳들―지면과 화면―에서밖에 감상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 인류는 열광에 지쳤고, 판타지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버렸으며, 사이버스페이스와 기술주의적 접근법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폭발 장면, 예쁜 엉덩이 등이 주는 unreality를 판타지인 줄로 오인하여 과다복용하고 있다. 그러니 <에반게리온>과 <매트릭스> 이후의 메가히트 작품이 나오지 않는대도 누굴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천사들이 과자를 배설(排泄)한다든가 각종 이상한 성격의 여자아이들이 여자에 관심 없는 남자애 주변에서 하렘을 만든다든가 어떤 소년이 반 식인종 반 인간의 운명을 짊어진 뒤 세상에 섞여들어 살 수 있는지 고뇌한다든가 하는, 기발한 듯 기괴하고 재밌는 척 힘없고 쌔끈한 척 클리셰적인 "최신작들"을 것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누군가를 탓하고 싶기는 하다. 도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도 "이거 뭔가 와 닿지 않는다"라고 소신 발언하지 않은 것인가?
Fantasy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한끗 차이로 일으켜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발견과 재해석과 끊임없는 자문자답의 반복과 중력을 이기려는 '솟아오름'이 없이, 나 공중에 떠 있소 하고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늘을 날려면 무엇이든 예외 없이 양력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것들이 헬륨 가스를 잔뜩 마시는 등의 알 수 없고 변칙적인 원리로 unreal하게 공중에 떠서 나름 돈을 법네 유행합네 히트작입네 행세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저것들이 언제 다시 이 지면으로 와르르 추락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다만 아찔할 따름이다.장담할 수 있는 것은, 지금처럼 아무도 솟아올라서 공중에 뜨려는 생각이 없는 지금에는, 제대로 된 날개짓과 최소한의 고도만 확보하면, 그 서사는 "정통파 기대주"로서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겠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쿠메타 코지나 우지이에 토젠의 작품들이 그러했다.
P.S. 몰랐는데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이 있더라.
실제로 이런 비평이 존재한다. 그것도 구글 검색결과 1순위 사이트에서 그렇게 썰을 푼다. Fantasy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한국인의 천박함은 그 정도인가 싶다. [본문으로]
절대다수의 리액션들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다. 2D 캐릭터니까 납득되는 수준이 아니다. 치명적으로 모에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자연스럽지도 않다면, 왜 그들은 굳이 그런 리액션을 해야 하는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한규현의 현대미술강좌 중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에 대한 tribute로서 이 시리즈의 1번을 이걸로 선택했다. (그는 바로그찌라시의 양태가 다분히 현대미술에 가깝다고 골백번 강조했다.) 사실 위주에 각색만 더해서 쓰는 종류의 글이기 때문에 좀더 문학적인 표현과 감성팔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 철판도 한 장이었고 찌라시도 한 장이었다는 사실을 좀더 부각하고 싶었다.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내후성강판이 생각보다 여러 장소에서 사용되더라. 아 그것들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규자의 다음 강좌를 어서 듣고 싶다. 후후
금감원 카페 알바를 이틀만에 짤리고 규장각 가서 작업이나 하려고 버스 타고 신촌 가다가 떠올랐던 소재를, 골치 썩지 말고 그냥 막 화내면서 쓰자는 느낌으로 간단히 옮겼다. 뭘 써놓고 나서 그 후속 에피소드가 모락모락 생각나는 건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운 기분이지만, 일단 추세를 지켜볼 생각. 시드노벨은, 아무리 전체수준이 낮네 로리만 파네 왜색이 짙네 해도, 여전히 가장 한국적으로 라노베를 해석하고 있는 사회이다. 참고로 갑자기 혜화동9시반이 생각나서 용준이란 이름을 따왔다. ㅋ
자료조사를 하면서 예상보다 더 많이 쏟아져나오는 뒷이야기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상당한 격려가 되었다. William Crotch, 오르간에 재능을 보였던 한 어린이가 전공자가 되어 어느 날 교수들이 시켜서 작곡한 한 장의 악보가 빅 벤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는 그의 음악이 캠브릿지 차임스에 사용되는 것 정도만 보다가 영면하였을 것이다. Epics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결자라는 번역어를 생각해 봤는데 이건 좀더 생각해 보자. 여튼 참으로 epic이라 할 만한 얘깃거리였다.
백만년만에 로그인해서 글을 써 봅니다. 잉여는 아니지만... 이런 썰을 풀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일상물", 그것은 생산 및 소비가 과열 팽창해 있는 일본 서사 산업에서 등장한 장르입니다. 시청자의 경험, 미디어가 만들어낸 stereotypes 혹은 그에 준하는, 별다른 엄청난 사건의 기승전결이 없는, 소소한 신변잡기적 일화와 그 주인공으로서 각자의 개성이 잘 설계된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즐기는 장르이지요. 이 장르의 대중화가 <아즈망가 대왕>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큰 반론은 없을 겁니다. <미나미가>라는 명작, <러키☆스타>라는 시대의 총아, <A채널>이라는 극단주의 작품에서 <일상>이라는 제목의 변칙이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주로 미소녀물의 대표 장르 중 하나로 일본 시장에서 정착해 왔고, 그 외의 외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아침드라마'는 일상물이 되지 못하지요. 기승전결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본인은 이런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물이란 '일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비일상이 배제된 상태'를 다루는 것뿐이다."
그것은 일본식 일상물 특유의 클리셰적인 전개 그 자체와, 거기에 일체의 잡음 내지 변수가 배제된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의구에서 왔습니다. 1화는 신학기, 2화에서 5화까지 대충 캐릭터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 6화에서 여름방학과 불꽃놀이와 바다, 7화쯤에서 새 캐릭터, 8화에서 마지막회 직전까지 다시 2학기와 일상과 '문화제', 마지막회에서 뭔가 결말을 내야 하는 이야기 및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이 클리셰적인 프로그램 구성, 바로 이것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등장인물 누구도 어느 순간에도 경제적 위기를 겪지 않고, 부모님 등의 어른이 시종일관 일체 관여하지 않으며, 아파 보아야 감기에 걸리는 정도이고, 뉴스라 할 만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의 이야기란 말이지요. 물론 이런 '있을 법한 것이 없다'라는 반론은 매우 값싸게 제기되고 간단하게 반박되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일상물"의 일상과 우리의 '진짜 일상'이 같을 수 없는 결정적인 다른 이유가 따로 있는데, 그것은 일상물에 최소한의 세월(歲月)의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times)이란 무엇인가? 세월이란 연쇄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시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인간 이성의 본능적 작용에 의한연관 찾기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은, 반복이 되는 듯하면서도 최소한의 인과 혹은 전후가 인지되도록 재구성되고, 그와 동시에, 어떤 일관된 방향이 있는 'season'을 보내면서도 이런저런 돌발 이벤트가 발생하는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당장 여러분이나 여러분 친구의 트위터(혹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가만히, 월 단위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의 일상도 그저 지리멸렬하게 쳇바퀴를 돌고 있지는 않으며,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누구의 일상도 할리우드 추격전 영화처럼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두 가지 패턴 사이의 미묘한 배율, 거기에 일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려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매일이 같지만 매일이 다른 것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당위'와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일상이란 개념에 대한 존재론/인식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실제 일상 생활이란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일상물'의 일상은 바로 이 세월 개념이 완벽하게 배제된, 그래서 클리셰적으로만 운용 및 각색되는 하나의 뼈대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5월 히나마츠리와 여름방학 유카타 불꽃놀이와 문화제와 크리스마스와 신년참배는 그토록 이물감이 느껴지는 작위적인 장면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행사들 중 하나는 거르지 않겠는가 하는 따위의 무성의한 의심 이전에, 왜 그렇게 일련의 이벤트들을 치르는 것이 그토록 맥락 없이 당연하게 떡떡 주어지느냔 말입니다.
2화니까 친해지려고 도시락을 같이 먹고 3화니까 꽃놀이를 가고 4화니까 하복으로 갈아입는 식인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지난 회차의 심경 변화를 이어받는 것도 없고, 새로 설정이 추가되는 일도 극히 드물고, 그 모든 것 이전에 그저 날씨에 맞추어 자동 인형처럼 너무나 전형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이 그 숱한 일상물들의 위화감의 정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대체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의 그 똑똑한 서사 산업 관계자들은 왜 이렇게 일상이 아닌 일상을 뻥튀기 기계 돌리듯이 계속 돌리고 있느냐? 그래야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일상들, 일상에 일정 비율 섞여있음으로서 더욱 일상을 일상답게 하는 변칙적 사건들을 배제하는 것이, 캐릭터들의 특징과 만담과 매력과 모에 포인트를 어필하는 데 조금이라도 여력을 더 투입하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일상물 장르는 초창기에 분명 "일상의 느긋함"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치유계의 범주에 속했던 것이, 점차 쓸모 없는 노출, 패러디, 새 캐릭터로 밀어붙이기 따위로 점철된 "미소녀 캐릭터물" 범주에 속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나미가>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일반적인 범주의 세자매로 버틸 수 없게 되자 일반적이지 않은 범주의 주변 인물을 마구잡이로 동원하여 이제는 일상이라 부를 수 없는 특별한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장르 중 하나가 분명하게 시장에서 승리한 이래 "어쨌든 '미소녀'가 뭔가를 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라는 사고가 공급자들 측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리고 미소녀 캐릭터를 개발한 다음 그들을 출연시킬 곳으로서 가장 안전하게 세울 수 있는 무대가 바로 일상물이 구축해 놓은, "세월이 배제된 춘하추동"의 원형극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쨌든 미소녀들 중 한두 명만 인기를 얻고 나면 어떻게든 된다"라는 안일함이 우후죽순으로 양산한 질 떨어지는 일상물들인 것입니다. <학생회의 일존>, <에비텐> 따위가 여기에 속합니다. 차라리 줄거리라도 있었으면 욕이라도 덜 먹었을 것을, 오로지 개성 있는 캐릭터가 매회 바다다 합숙이다 도전과제를 해내는 따위의 이야기로 때우면 어쨌든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무책임하게 만들어진 작품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물에 대한 재정립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와전된 개념―"비일상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목가적 가능세계"―이 아니라, 세월이 존재하고 캐릭터가 그 세월에 반응하는 식으로 굴러가는, 상황과 인물 성격과 세계관 설정에 더 구체적인 현실성이 부여된 채 그런 세상의 별다를 바 없이 매일 흥미진진하고 잔잔하게 파도치듯 일렁이는 삶의 향연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잘 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쓸 수 없다면 애당초 일상물이 아닌 다른 장르나 소재나 기승전결을 구상하기 위해 '딴 데 가서 알아봐야' 할 것이고,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만 일상물을 써낼 때에야 일상물은 소기의 목적 내지 온전한 존재 양태를 달성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픽션과 서사를 통해 구제받고 부각되어야 할 중요한 소재의 하나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월의 개념이 "일상물의 일상"에는 없게 되었기에, 그 개념을 일상물에 넣든지 아니면 일상물 장르를 폐기하든지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야 관계자가 아니니 속사정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비자로서 이 한 가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다지 모에하지도 않은 미소녀들이 그 밥에 그 나물로 따분하게 보내는 사계절로 구성된 13화 분량의 산업 쓰레기가, 다시 또 양산되어 재고로 쌓일 뿐입니다.
이미 영화나 책으로도 여러 번 다뤄졌었고 야구 팬들이라면 대충 다 알지만, 소재 자체가 워낙 파워풀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이런 류의 글을 쓰려고 일부러 관련 영화를 다운받아 본 건 처음인 듯. 그거랑, 초반 도입의 hook이 약하다는 이전 버전에 대한 피드백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갈아엎은 게 잘한일. 공유를 해 주신 분이 "눈물도 살짝 날 뻔했다"라고 코멘트해 준 걸 봤는데 눈물이 살짝 날 뻔했다. 수많은 잡지들의 막대한 텍스트들을 보고 기가 죽으려고 하는 이 시기에 큰 힘이 되었다.
이 괜찮은 소재를 잘 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좀더 흥미진진하게 각색해서 쓸 걸 그랬나 싶다. 소창영이란 사람은 이후 SBS의 <세상에 이런일이> 취재진이 수소문했을 때 찾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센세이션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글에서도 언뜻 비쳤지만, 우리나라의 생방송 사고 역사가 음모론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뜻깊다.
'바로그페북 페친들이 라즈베리 파이에 관심을 가질까?'라고 지레 겁먹고 들어갔던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어려웠다(내 기억이 맞다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세 번인가 했다). 특히 도입부가 어려웠다. 생소한 것을 소개할 땐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법한 소재를 쓰니까 바이럴이 알기 쉽게 터진 글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소재에 천착할 순 없는 법. 어떡하면 아즈망가 대왕이란 만화 자체의 대단함을 각인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만화의 '구별됨'에 집중하게 됐다. 조사 과정에서 고바우 영감으로 소재를 바꿀까 고민했었다.
설국열차는 제가 원래의 글 말미에 예견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흥행했습니다. 대다수 관객에게는 양갱이 또렷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저도 양갱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한동안 양갱을 먹을 때마다 꼬리칸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정말 볼품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아예 일언반구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텐데.
- 하아... 예고편보다는 이런 걸 봅시다.
-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건 지하철 광고였어요. 지하철에서 광고하는 영화치고 적당히 덜 대중적이면서 적당히 구매의 가치가 있는 영화가 그리 많지 않은데, 이건 그 광고를 보고 나서 지하철에 탑승한 뒤에도 계속 유튜브로 정보를 찾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원작이 있으니까.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봉준호니까. 솔직히 CJ가 대대적으로, 정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배급하고 홍보 총력전을 펼치는 걸 보고서도 그럴 수 있겠거니 했어요. 그래 참자, 관객들의 등골을 아예 빼먹으려는 영화는 아닐 거야, 하고. 최소한의 예술적 예의 내지 사회적 영양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 무좀약을 받으러 나간다 나간다 하면서 안 나가고 집에서 뒹굴다가 드디어 오늘 이 일 저 일 해치우려고 나가서 봤습니다. 버스가 마치 제 시간 계획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재깍재깍 도착해 주어서 놀람.
- 강변CGV에는 정말 오랜만에 가 봤습니다. 저의 12년 하남시 인생의 애증의 장소인 테크노마트도 참 많이 바뀌었더군요. 웨딩홀이 들어선 건 알지도 못했고, 1층의 엔터식스는 적응할 수가 없고, 며칠 전에는 드디어 건담마트 직영점이 (8층에) 생기고. 도대체 언제까지 저 테팔이들은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저기서 자기 머리 위에 먼지를 쌓고 있을 것인가...
- 생각보다 극장에 관객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만원사례일 줄 알았는데. 시간이 밥 먹는 때여서 그랬을까요? 뒤에 쓰겠지만, 아니었던 거 같아요.
- 비행기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항공을 가르며 CW-7을 살포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외의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 줄거리는 수많은 영화 잡지들이 다룰 터이니 굳이 복기하지 않겠습니다. 반전도 적지 않겠습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최고 악역은 길리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사회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 과학 자문이 있더라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긴 필요하지, 요즘 깨시민 님들이 얼마나 똑똑하신데. 허구와 실상도 구분 못 하는 예술맹들. 열차 밖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주요 명승지는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거 하나는 꽤 리얼했음.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북극곰은 MBC가 찍은 자료화면을 합성한 것이라는 추리를 해 봤습니다. 추가바람
- 영화 다 보고 나서까지도 생각을 못 하다가 트위터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양갱! 양갱 먹고 싶다!
- 15세치고는 신체절단 폭력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 걸 '정말' 싫어하신다면, 중간중간 좀 참으셔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싸다는 뜻의 영어 표현에 '팔다리 값을 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유난히 사람의 수족에 굉장히 관심을 보입니다. "어떻게 두 팔을 다 가지고 리더를 하겠어요?"
- 고아영이 의외로 안 귀엽습니다. 송강호 한국어 발음이 의외로 안 좋습니다. 일본어가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보이스웨어 번역이 간간이 사람 웃겼습니다. 하지만 가장 웃긴 장면은 역시 메이슨이 신발을 머리에 쓴 그림이 아니었을까?
- 스토리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아까워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왜 나는 크레딧롤이 다 올라간 다음에 상영관 출구를 나와 "ㅅㅂ 배반당했다"라고 느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10분 생각해 보니 대략 정리가 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 이 영화의 비유가 지나치게 전면적이다. 둘째, 그 비유로 해설되는 서사가 안 그럴 것처럼 가다가 결국 지나치게 냉정하다.
- 첫째, 비유. 반전이 소개된 다음 엔진실에서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아예 대놓고 설명합니다. "이 열차는 하나의 세계와도 같고, 이 안의 사람들은 인류지." 그 순간 감독에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야! 그걸 설명해 버리면 어떻게 해! 수많은 인터뷰와 영상에서 "마치 지금의 우리와도 같이" 볼 수 있을 거라며! 그렇게 대놓고 묵시록적 비유풀이를 해 버리면 어떡하냐고요.
묵시록적 비유풀이란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비유적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성경의 맨 끝인 계시록에 가면 하나씩 대놓고 정의(definite)가 됩니다. 이 정의와 관점에만 입각하여 나머지 비유에 이 정의를 대입하는 것을 묵시록적 비유풀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일곱 금촛대'라는 단어는 무엇을 뜻할까요? 계시록을 읽어 보면 "일곱 금촛대는 (계시록 작성 당시에 있었던 중요한) 일곱 교회니"라는 말이 떡하니 나옵니다. 따라서 성경 어디를 읽더라도 '일곱 금촛대'는 '그 일곱 교회'로만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 수작을 부립니다. 심지어 윌포드, 이 세계의 창조자가 그렇게 정의내려 버린 시점에서 모든 것은 여기에도 끼울 수 있고 저기에도 끼울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단순 직유법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저는 유치원 칸을 보며 특히 더욱 '북한'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의 은유'(이게 모범답안이죠?)일 수도 있겠지만 북한과 각종 독재 사회가 어떻게 작동 가능한가를 이렇게 판타지적인 허구서사로 잘 표현해낸 것이기도 하구나... 라고 감상하려던 차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더니, 다시 감상을 오로지 자본주의에 관해서만 가지도록 방향을 고정시켜 버립니다.
물론 그 대사 하나 때문에만은 아닙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생존을 명목으로 질서와 계급을 만들어낸 통제 사회(자연세계가 야만으로서 그곳 바깥에 존재하니까 그곳은 사회라고 부르는 게 맞겠죠)'에 대한 사회학적 시뮬레이션과 메타화를 태만히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맬서스적 인구론과 포드주의적 기능론 딱 거기서 그쳐 있는 윌포드의 논리가 반란 이외의 어떤 정치적 수단으로도 반박된 적이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 서사를 세계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현실의 설명 수단으로 사용하기가 영 어렵다는 것도 안타깝습니다. 그저 그 절대다수가 무임승차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무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 이렇게나 꼼꼼하고 은유적인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일목요연한 것으로 전락해 버린 건 누구 때문이지요?
- 둘째, 냉정함. 영화가 중간중간에 보여주는 잔혹한 비유('충돌' 장면이라든가, 긴 터널로 들어가는 구간에서의 진압 작전 장면이라든가. 열차의 불을 끄고 적외선 안경을 쓰고, "재밌는 구경이 되겠어"라니.)들의 훌륭함을 무색케 하는 허무함이, 이게 정말 <괴물>의 봉준호가 맞나 싶게 할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사실 '체제에서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은 그 체제를 피드백하기 위해 일정 정도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공급될 여지도 있다'라는 의식은 제게 그다지 놀랍거나 당혹스럽지 않았어요. 예전부터 해 왔던 생각이거든요. 문제는 결말을 본 이후 되짚어 본 전체 흐름이었습니다.
결말이 어떻게 날까? 허무한 패배? 타협? '제 3의 길'(남궁민수가 말하는 승차 출입문을 열자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할리우드식 목표달성? 결말은 허무한 승리였어요. 그리고 그것이, 이 이야기가(세계 자본주의의 메타포 이상이 되지 않기를 자처한 시점에서) CJ가 악랄하다는 반증이자, 감독이 얼마나 세계 시장 앞에서 타협을 하기로 했는지를 보여주는 근거이면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봐야 할 영화"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시그널이라는 사실에 못을 박았습니다. 각본가가 하다못해 제 3의 길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아니라 그 열차 안에서의 어떤 제정신 차린 방안이 나왔어야 했고, 정말 세계 자본주의를 '까고' 싶었다면 열차를 유의미한 장소에서 스톱 시켰어야 합니다(하다못해 희대의 망작 <2012>에서도 희망봉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이용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CJ는커녕 아무도 투자해 주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 각국에 배급할 수도 없었을 테지요. 결국 우리는 "또 한 번의 주기적으로 필요해지는 반란"을 일으킨 다음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CJ엔터테인먼트가 배달해 준 '새해맞이 계란'을 먹으며 "오큐파이 윌포드"를 외치고 있는 셈입니다.
- 저는 차라리 윌포드라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은 <독수리 5형제>가 선택한 방법이었지요. 하나의 유령이길 기대했습니다. 웬걸, 아주 구체적인 (음, 말하자면 때릴 수 있는) 인간이더라고요. 체제를 파고든 끝에는 어떤 한 명의 장본인이 존재한다, 이 얼마나 사실에 가깝고 그래서 믿고 싶지 않으며 영화라는 지극한 허구 속에서의 가능성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농락하는 이야기입니까? 모든 것이 시카고 학파 때문에 이토록 망가진 걸 누구나 아는데, 그렇다고 누가 시카고 학파의 학장을 때리고 싶어하는가요? 그렇게 이 영화는 공격 대상 혹은 진짜 원인을 유야무야 증발시켜 버립니다. 아주 극적으로 말하자면, 순식간에 윌포드도 나쁜 놈이 아니게 되면서 아무도 탓할 수 없게 되어 버려요. 커티스가 말문이 막혀 버린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 그렇게 진정한 타격 대상을 (그 대상이 얼마나 타격하기 어렵게 정체 불명한가에 상관없이) 똑똑히 제시하지 못하면서 재미와 상영관을 확보하고 급진과 원칙과 인류적 꿈을 기각한 영화가 "이 땅의 99%가 보아야 할 영화!"로 칭송받아야 할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 나오는 영화들이 갈수록 그런 식입니다. 다들 간이 콩알만해져 있달까? 아니 어쩌면 상업오락영화라는 틀 자체가 그런 근본적 한계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봉하고 싶으면 개봉될 만한 이야기를 찍어 와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잘라서 네놈 집안에서나 보는 홈비디오로 만들어줄 테니까. 꼬우면 유튜브에 올리시든가! 어디 몇십만 몇백만이 클릭 조회한 다음에 니가 기획했던 대로 세상이 바뀌나 보라구!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기 발로 뛰게 만드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두 시간 동안 자기들의 얄팍한 정의감을 청량한 극장 안에서 안락하게 위로해 줄 엔터테인먼트니까!
그래서, 어쩌면 한때 제 마음 속의 관람 1순위였던 "지금 우리 사회를 고발", "전국민이 봐야 하는" 운운하는 영화는 이제 슬슬 무의미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 영화가 documentation의 기능을 하지 않는 이상 말이지요. 관객이 만석이 아니었던 건 그래서인지도 몰라요. 예매율은 뭐 얼마나 화제가 되느냐를 반영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로 모두가 봐야 하고 공분을 일으키도록 돕는 영화는 절대 아닙니다. 사실 이제는, 마이클 무어가 그의 마지막 작품 <자본주의 연애담(Capitalism: A Love Story)>의 엔딩크레딧에서 '뭐라도 좀 하세요!("Do Something!")'라고 외친 이후로는, 어느 영화도 그걸 할 수 없으려는 것 같습니다.
- 나쁜 건 목적지도 없이 영원히 운행하는 대중교통입니다. 나쁜 건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으면서도 원론 시간에 배운 대로 "제약조건 내에서 최대 이윤 달성"만을 앵무새처럼 부르짖어 온 멍청한 기하산술적 신고전경제입니다. 나쁜 건 한숨 돌리고 쉬어가며 조금만 천천히 하자는 기초적인 인간성을 시간 계획과 끝없는 철로와 "엔진은 영원하다" 운운 노래를 부르며 묵살하는 물질주의입니다. 나쁜 건 정보 통제입니다. 나쁜 건 그 빌어먹을 속도입니다. 나쁜 건 CW-7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비판하지 않으면서 뻔뻔스럽게도 자기가 지구촌의 미래에 정말 관심이 있다는 양 황인종과 흑인종과 북극곰을 마지막 장면에 갖다놓고 끝을 내 버립니다. 이건 열린 결말이 아니라 냉정하다 못해 무례한 결말인 거지요.
- 글쎄, GV를 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감독에게는 이 결말이 최선이었을까, 차악이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이 사회에서 이런 형태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꼬리칸 사람들이 앞칸 사람들과 함께 오손도손 어울려 사는 것은 고사하고 하여간 엔진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줘야만 했던 것일까?"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아주 낭비가 되는 질문이죠. 당연히 최선이었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투자자들이 검토하고 고친 것이기를, 그래서 그의 원래의 희망사항이고 대다수의 기대였을 내용의 "74%"가 "살상"된 결과이기를 저는 바라는 거예요. 그런데 천하의 봉준호가, 이야기를 못 살리는 사람이 아닌 줄 번히 아는 우리의 봉준호가, 그러니까 CGV를 나와서 테크노마트 중앙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며 아 ㅆㅍ 배반당했다... 라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죠. 그가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이 영화의 메시지와 일치한다면, 저는 저 혼자서 그에게 배반을 당한 겁니다. <괴물>에서 한국 현대사 썰을 완벽하게 풀었던 바로 그에게.
- 감상 다음날 아침쯤에 한 생각인데, 어쩌면 이 이야기는 '현재까지와 앞으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예전부터 지금 바로 이 순간까지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오늘 이 순간의 지구촌은, 정말 앞길이 막막하거든요.
- 유아용 해설 잠깐만 할게요. 이 영화를 보고 "위기 상황에 잠깐의 불편을 참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폭발하면 더 큰 상황을 못 보고 망한다" 따위의 교훈을 얻었냐, 애송아? 노무노무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17년간 똑같은 코스를 똑같은 속도로 질질 달리면서 이따금 '적절한 인구 감소 이벤트'를 조장하는구나? 위기 상황이니까 수족관과 클럽과 미용실을 빵빵하게 운영해야겠지? 거대 기획 혹 목표(영화의 내러티브에 빗대자면 '종착역'쯤이 될)의 실종이 유발하는 실존자의 상존적 불안과 그를 빌미로 가공되고 조장되는 구조적 억압 논리로서의 허구적 위협을 '위기'로 퉁치는 멍청함을 자랑할 시간이 있으면, 기초 논술교재 책이나 좀 봐라. 그렇게 감상하는 거야 뭐 니 자유지만, 니 인생에서 그렇게 낭비된 2시간이 가엾어서 그런다.
-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강력 추천해 드릴 수 없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는 친구에게 기초 교육 자료로 보여줄 수는 있어요. 깊이 있는 설정을 짠 근미래 판타지 픽션에 요즘 목마르시다면 두 시간 정도 볼거리와 떡밥이 충분합니다. 출연 배우 중 한 명의 팬이시라면 가서 보시면 좋겠네요. 하지만 이 영화를 봐야 할 그 이상의 이유는 없습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할 겁니다. 잘은 모르지만 초반에 좀 달리는 듯하다가 갑자기 푹 꺾이면서 잊혀질 겁니다.
- <매트릭스> 이후의 문제작은 이제 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저 아쉽습니다.
- 혹시 이 리뷰글이 이해가 되지 않으시면 추가 질문을 해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도 답을 드리면서 좀더 제 견해를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서울대학사역에서 Flickr에 올린 사진 세 장[각주:1]을 기본으로 여기저기서 오리고 붙이고 끄적끄적
2011년인가에 서울대학사역 책임 맡고 계시는 김재민 간사님께서 공언하신 이래 2013년 7월 현재까지 서울대학사역 캠퍼스워십팀은 음반을 낼 계획이 없다고 하고 또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얼마 전의 앨범은 화요모임에서 냈죠. 그때 이후로 소식이 없네요. 요즘 오픈워십을 보자면 어쿠스틱 앨범도 가능할 성싶은데.
그렇게 깨우치고 나니, 어쩐지 나도 각종 건물과 인공물들의 패턴으로부터 영감을 받을 것 같다.
내가 건축 쪽으로는 정말 관심도 없고, 기껏해야 울 아부지가 타일 붙이는 사람인 정도밖에는 관련도 없는데... 뭐, 1년 10여개월간 찍고 싶은 것 못 찍고 살았던 한을 푼다는 기분으로 셔터찬스를 얻든지 못 얻든지 찍어 보고 있습니다.
이런 '무늬'가 새겨져 있는 곳들을 발견한다는 목적입니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의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똑똑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모든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