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0
=585,085


늘 쓰고 싶던 테마였는데 이번에 무한도전 "시즌1" 종영을 기념하여 아주 콤팩트하게 써본다. 이거보다 길어지면 나도 헷갈리고 모두가 헷갈리는듯.


세트장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해진 개념이지만 예전에는 '버라이어티 예능'을 하기 위해 도입된 혁신적 장치였던 세트장이란, 어떤 굉장한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보장받기 위해) 각종 장치와 설비가 고안되어 작동하는 기계/전기 조립체 일체였다.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울고 웃고 때리고 뒹굴며 '오락 프로'를 만들었다.

세트장은 목적지향적, 결과지향적 엔터테인먼트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드는 이유 자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그림'만큼은 '따내겠다'라는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세트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대신 그 반대 급부로서 주어진 규격과 분량에 맞춰서, 계산된 재미를 위해서, 모두가 각본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세트장은 21세기 초엽까지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성장 중심적 계획과 사회의 첨병에 다름아니었다. 어떤 목표와 도전 과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장하는 대신, 각 개인의 계획과 규격, 행복의 기준과 방향을 제어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았고, 그게 어느 정도 순기능을 했다. 우리는 한때 대형 버라이어티 쇼의 거대한 세트장을 진심으로 우러러보았던 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무한도전은 바로 이 '세트장'을 빠져나오려 하는 예능이었다. 아하 게임을 하던 '스튜디오'(그것은 최소한의 의미에서의 세트장이기도 하다)에서 시작한 그들은 장충체육관으로, 동대문 운동장으로 (이것들은 좀더 세트장에서 멀어진 것이다) 가더니 지하철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어딘가로(여기서부터 세트장이 아니었다)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물리적인 세트장을 탈피해 왔다.

한때는 전형적이고 다소 상투적이기까지 했던 방송가의 물리적 세트장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큰웃음이 보장되곤 했다. 대표적으로 모내기 특집이 그랬다. 비 오는 논두렁에서 뒹구는 일은 그 자체로 시답잖게 우스운 것이다. '세트장 아닌 세트장'을 통해 변칙적으로 재미를 확보하는 이러한 의존성은 최근의 방콕 특집 같은 것에도 발견되었던 바다.

아무튼,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물리적 세트장을 벗어나기만 해서는 머지않아 '(성장 발전상의 )동력' 자체를 잃어버릴 것을 직감한 TEO 사단은 새로운 세트장을 구성한다. 바로 관념적 세트장이다. 무한도전은 갈수록 'OOO 특집'의 이름으로 특정 주제/과제/컨셉을 내걸고 이것 하나에 모든 여건과 아이디어와 몸개그를 전면 집중해 70분을 채우는 (그걸 실패한 '특집'은 통편집되어 재방송을 타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왜 관념적 세트장이냐면, 기존의 세트장에서 볼 수 있던 철골 구조물, 카펫, 폭죽 같은 물리적 요소들은 사실상 없어지되 개그, 상황극, 캐릭터, 도전, 팀 꾸리기, 액션, 교훈, 사회적 의의 등등 비물질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특정 감동과 재미를 창출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계획대로 잘 될수록 그 특집은 레전설이 되었고, 잘 안 되었을 때는 통편집되어 창고에 박혀 있다가 발굴되곤 했다.


그들은 과연 세트장 자체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 방송의 본질상 70여분간 별 요점이 없는 신변잡기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무한도전의 지난 십몇 년 역사상 그들은 성장주의, 목적주의, 성과주의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각본과 세트장이 주어지지 않는 예능에서도 빅재미를 만들어낸다며 뛰쳐나간 그들이 정작 스스로 만든 각본과 세트장에서 낑낑대게 된 꼴이란 아이러니가 아니면 무엇인가.

심지어 '쉬러 간다', '우천시 취소하는 특집으로 한다' 같은 관념적 세트장을 나가는 듯한 기획마저도 사실은 치밀하게 (또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각본, 체계, 어떤 그림을 무조건 따내기 위해 고안된 설계와 배치로 기능했다. 방송이니 그래야만 했다. 심지어 무한도전은 리얼 예능을 표방한 탓에 오히려 그 반대로 작위미, "일부러 철저하게 어떠어떠하게 한다" 하는 기획이 주는 즐거움도 넘볼 수 없게 됐다.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 "시즌1" 종영은 시사적이다. 이렇게까지 일부러 대본과 내용구성, 로케이션 등을 '어기고' 다닌 방송은 일찌기 없었는데, 그런 쇼가 유지 불가능성이 가시화된 이후로 그걸 끝내 부정하다가 마지못해 마침내 수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그것이 쇼이기를 표방하는 이상은, 그것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기획, 각본, 목적하는 결과의 집합체(set)에서 실행되게 되며 그래야만 한다."


무한도전은 자기가 얻어야 할 교훈을 이미 다 얻었겠지만, 그걸 보며 몇 년을 함께한 일반 대중은 과연 어떤 교훈을 제대로 얻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의 삶 여러 영역에, 사실은 불가능한 그리고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성장주의 계획이 삼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물리적 세트장을 가질 수 없었기에 철저히 자신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자본과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었던 일반 대중도, '디카'와 스마트폰을 손에 넣으며 다른 의미에서 물리적 세트장 없이 '쇼'를 해 오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든 쇼는 쇼이므로 이들에게는 크게 둘 중 한 가지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무한도전이 그랬듯 각종 컨셉과 설정으로 무장한 관념적 세트장을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인생 전체를 물리적이고 통합된 세트로 구성해 버린 것이다.

둘 다 별로 건전하지 못하다. 전자는 경제규모 상위국가의 대표 민영방송사의 간판 예능조차 끝내 버티지 못한 고강도의 정신 노동을 일반 대중 개개인이 감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후자는 속된말로 자기 인생을 팔아서 관심을 얻고 유지를 하는 마이너스 게임이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이 보고 배운 것은 무한도전이나 인간극장, 세상에 이런일이 등이었을지언정, 그들이 정말 그것을 동경하고 모방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탈-세트장 예능의 대표주자였던 무한도전의 종언 이후 가장 질서 있는 퇴장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냥 순순히, 물리적이고 인위적이며 전면적이고 조작적인 계획의 존재를 인정해 버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쇼"라고 이해하는 세계는 철저히 그 계획 속의 세계로 한정하고 샌드박싱하여, 그 안에서만 쇼의 문법과 방식이 작동하게 내버려두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그 밖에 나와 있는 방식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아주 그로테스크한 만화의 작가가 될 수는 있겠으나, 작가로서의 그를 예능 방송 게스트로서의 그의 자리에 불러내는 일은 하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또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더라도, 자기 개인사를 죄다 털어놓는 지금 대다수 유튜버들의 방식을 따르기보다는, 채널 속 자아를 좀더 허구적 체계로 확립하고, 분리 관리하며 그것을 게임의 룰로 이해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

요는, 쇼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쭙잖게 대본과 세트장과 계획과 목적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고 하다간 실패만 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무한도전 역시 무한하지 못하게 도전을 멈췄다. 우리는 아직 목적지향주의 자체를 중단하고 그 너머를 상상할 만큼의 급진성과 거기 따르는 각종 능력 요건을 갖추지는 못했으므로, 쇼는 결국 쇼이니 순순히 세트를 짜고 그 안에서 행동하자는 겸손한 교훈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든다.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세트장 예능의 종언: <무한도전> 종영에 부쳐  (0) 2018.04.01
포주 레진  (0) 2018.01.31
장르로서의 이생망  (0) 2017.10.31
텍스트  (0) 2017.01.10
무식이 배짱이라고 한두 줄 더 얹어 보자면  (0) 2016.07.18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한희성 씨가 레진코믹스 불공정계약 폭로를 진행한 작가들을 고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인신을 좀 비방해볼 양으로 써본다.

포주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끌어안을 포[각주:1] 에 가진놈 주 자를 써서 포주라고 하고, 창녀를 고용해서 그들과 같이 지내며 그 영업을 돌봐주고 수익을 얻어먹는 자를 부르는 말이라 한다. 그렇다면 레진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본질적으로 포주(抱主)다. 웹툰 작가님들이 기생이란 얘기가 절대 아니라, 레진이 자기가 취급하는 대상들을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기생 창녀로 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애초에 그 소위 야동 블로거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그걸 직함이라고 부르자면) 그 직함이란 게 무엇인가? 조직적으로 제작 생산된 음란물을 제 블로그에 들여와 늘어놓고 짐짓 진지한 체 오시오 보시오 사시오 하면서 방문자와 인기를 벌고 공개적으로 낄낄거리는 것이 아닌가? 비디오 속에서 필사적으로 제 몸 파는 “창녀”들이 있고, 그걸 영상으로 찍고 유통을 하며 파는 포주들이 있었다면, 레진은 그 포주들이 던져주는 각종 ‘품번’들을 주워와 주섬주섬 되파는, 그야말로 리셀러 포주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던 자가 뜬금없이 웹툰 사업을 한다기에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도, 처음에는 그저 좋게 생각했다. 성인용 만화를 파는 게 수익의 본질인가보다, 그놈 참 아닌 체하면서 꾸준히도 밝히는 놈일세, 하고 말았다. 그런데 폭로되는 내용들을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고 ‘이게 대체 무슨 사고방식으로 나오는 짓인가…?’ 하는 의문만이 커졌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연재처와 편집부를 자처할 셈이면, 막말로 작가와 척을 지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냐?

소위 ‘지각비’, “모든 작품을 프로모션해야 한다면 우린 프로모션 안 하겠다”, 유난히 레바를 밀어주며 재밌는 웹툰 사이트를 강조하려는 알리바이 공작, 말도 안 되는 수익 배분률, 편집부라고 믿을 수가 없는 방조와 방치와 무관심, 각종 관계자들의 성추행이며 비방 발언과 사생활 감시 등등 별별 폭로가 다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겨우 한 가지 아이디어로 정리가 된다. “레진이 작가들을 작가가 아니라 이를테면 ‘나가요 아가씨’ 따위로 보고 있는 거라면?”

레진의 없다시피한 작가관리와 양아치 같은 영업짓거리를, 포주와 성노동자의 구도에 집어넣고 도식화해 보면 썩 말이 된다. “쉽고 간단한 일 돈많이 벌고싶은 분들 환영 숙식제공 정부공인기업” 따위 아주 그럴듯한 문구로 순진한 사람들 홀려서, 소속을 시키고, 야한 것 야한 짓을 원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쉴새없이 내보내 고객 만족을 시키고 코인을 받아낸다. 그러고는, 당신 거두어서 일감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라며 그 수입을 7대 3으로 갈라 그 7을 얻어먹고 산다. 물론 이게 작가님들에게도 모욕적인 수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시라. 정말로, 한희성의 사고방식이 이것과 아주 다를까?

당신이 그의 밑에 있는 작가인 한, 애초에 그는 당신의 “작업”과 근무환경에 아무 관심이 없다. 한희성 입장에서는 당신이 고객들에게 약속한 날짜에 약속한 장소로 나가서 코인을 환전받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 나간 자리에서 휴재공지가 웬말이냐고 욕지거리를 듣든, 최고의 작가님이라고 상찬받으며 그 작업을 도촬당해 불법사이트에 뿌려지든 그건 한희성 입장에서는 근본 자기 알 바가 아니다. 몸이 힘들어서 도저히 못 나가겠다는 당신의 읍소에도 그가 꿈쩍할 이유는 없다. 알아서 나아서 계속하든지 혼자 망가지든지 할 일이다. 왜? 꼭 당신이 아니어도 되기 때문이다! “이 일 하겠다는 다른 사람들 많아요!”

이게 그냥 일개 ‘일못’의 덜렁이 짓거리라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텐데, 폭로되는 정황들이 소름이 돋는다. 503정부 시절 그 누구도 우수하지 말았어야 할 창조경제의 우수 사례로 자신을 적극 노출시킨 일이며 최근에 레진코믹스가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돈을 발랐다는 폭로에 와서는, 레진의 포주짓거리는 거의 확신범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양아치라면, 내 사업의 본질이 이쁜 여자애들 내다팔아서 화대 받아먹고 사는 것이라면 나로서도 박근혜 같은 어리숙한 정권이 들어섰을 때 잽싸게 감투를 사둘 것이다. 그리고 그 쪽팔림을 감추기 위해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필사적으로 술을 살 것이다. 나라도 그럴 것 같은데, 한희성처럼 속 다 보이는 기둥서방이야 제깐에 생존 전략이랍시고 달리 무슨 약을 더 쳤겠는가?

레진코믹스 사태에 우리가 분노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 사태는 단지 한 기업이 상도덕을 어겼다거나 원고 단가, 수익 배분률, 편집자 의무이행 등의 계약상 세부 쟁점이 있다거나 하는 데서 얘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사안의 본질은 윤리에 있고 한희성이라는 대표자의 의식 그 자체에 있다. 결코 그렇게 취급되지 말아야 할 웹툰이라는 업태와 그 노동자들을, 확신하건대, 한희성은 무슨 성매매업소 취급하듯 취급한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노동윤리의 유린이고, 완전한 인간 배반이며, 순전한 사악이고 용납할 수 없는 추잡이다. 레진코믹스 사태를 정말 해결하려면 법제화를 통한 작가들의 노동환경 개선이 최고 급선무지만, 그 다음에는 정말로 레진 한희성의 모가지와 좆을 잘라야 한다.

오랫동안 꾸준히 포주 짓거리로 제 벌 돈 다 벌며 수많은 사람들 눈에 피눈물 맺히운 이 후릴 놈의 패륜아 새끼를 포함해 이후 그 누구도, 콘텐츠 바닥에서 이런 양아치 짓거리를 꿈도 못 꾸게 해 줘야만 비로소 이 얘기는 끝이 난다. 레진씨, 불만이 있으시거든 나도 좀 고소하오. 그러면 나는 순순히 벌금형을 받는 대신 법정에서 당신을 이보다 더 공개적으로 모욕줄 생각이다. 아니면 이제라도 제발 작가님들에 대한 무례를 멈추고 모든 책임을 지고 고자가 되시오. 그리고 그 허섭스레기 같은 앞잡이 레바는 당장 내치든지 읭읭이 따위 날로 처먹는 3류 개그 만화로 당신 사업의 양아치스러움을 성실히 덮는 짓거리를 속히 중단시켜 주시라.


PS. 내친김에 한 명만 더 저격하고 가자. 권정혁 씨? 당신이 구루는 무슨 얼어죽을 구루여? 포주 새끼 밑에서 시키는 대로 작가님들 실어나르는 봉고차 구루마 운전수지. 먹을 나이 다 먹은 남자로서의 부끄러움과 개발자로서의 최소한의 의협심이 아직 있다면 제발 그 한희성의 좆을 가위로 자르고 레진 깃헙을 sudo로 지우고 거기서 나와 주시오. 그것이 야동블로거의 후장과 박근혜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 그 과거를 손 터는 유일한 길이다.

PS2. 레진에서 유일하게 챙겨보던 앙영 작가님이 정말 절묘한 시점에 탈레진에 성공하신 것이 새삼 생각나면서 다행스럽달까 왠지 뒷맛이 씁쓸하달까 그렇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

  1. 물론 여기서 안는다는 것은 성교한다는 의미의 완곡어이다. 좀더 어려운 한자일 줄 알았는데 이것이었구나 하는 허탈감이 상당하다. [본문으로]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세트장 예능의 종언: <무한도전> 종영에 부쳐  (0) 2018.04.01
포주 레진  (0) 2018.01.31
장르로서의 이생망  (0) 2017.10.31
텍스트  (0) 2017.01.10
무식이 배짱이라고 한두 줄 더 얹어 보자면  (0) 2016.07.18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딱히 정리는 안된 잡감들. 쓰(려)고 보니 순 꼰대소리인 부분 ㅇㅈ합니다.

현재 이 나라의 청년 세대에게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관념은 아주 만연하고 광범위하다. 공감을 사기 쉬워서 콘텐츠 제작이나 칼럼, 기사 작성에 많이들 이용했고 나도 그랬다. 심지어 “헬조선”의 지옥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로서 청년 사회 붕괴를 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니, 너도나도 아주 즐겁게 이생망 이야기를 했다. 그런 서사의 생산과 소비는 과연 유효하고 유익하며 유의미할 것이라 믿었다.

재수생과 반수 이야기 - Sepia☂

그러나 이런 만화가 디씨에서 나와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형국이 되고 나면 이제 ‘이번 생이 망했다’는 썰과 탄식은 오히려 하나의 장르, 좀 나쁘게 말하면 하나의 타령조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핵심은, 우리의 삶이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기록해 노출하고 묘사하는 일의 사회적 효용이 과연 그렇게 긍정적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서사의 생산 양상은 흡사 386, 486들이 송강호와 황정민을 앞세워서 그들의 젊은 날을 스크린으로 보상 및 상찬받고 싶어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다. 동일한 점은 다들 모르지 않는 특정 세대의 목격담이며 경험담, 그들이 특정적으로 공유하는 정서와 사상을 굳이 예술 장르의 형태를 빌어 전시한다는 것이고, 차이가 있다면 ‘넥타이 부대’들은 그래도 뭔가 해봤다(해본다)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 비해 ‘청년들’은 결말부를 증발 내지 페이드 아웃시켜 버린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는 확실히 그 세대가 내다보았던 미래상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386, 486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바꿔나간다는 주인 의식이 충만했다면 그 직후 세대는 바로 그들, 삼촌 외숙부 할아버지뻘들에게서 “참교육을 시전”당한 입장이라 이렇다할 미래관 자체가 각별히 없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시궁창으로서의 현재, 그래도 한때는 퍽 멋모르게 즐거웠던 과거, 그리고 “이번 생은 분명 망했다”라는 대책 없고 확고부동한 결론뿐이다.

그런데 이 결론에 아무런 다음 스텝이나 돌파, 타개의 수가 전혀 없다 보니, 이 세대는 지금 이 결론의 무한 소급과 재생산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 만화가 그렇다. 현재 저 만화는 “공부 자극 확시켜주는 만화”로 홍보되어 유포되고 있는데, 여기서 아주 독특한 생산-유통-소비 행태가 관찰된다. 만화 줄거리 자체는 ‘별 노력 없이 그냥 가는 대로 가면 이렇게 된다’는 것인데, 이를 유통하는 측은 공부라는 노력이 없었을 때 이렇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아마 동시에 소비하는 입장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디테일 오진다”라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과거로서의 디테일에 주목한다. 주로 같은 세대인 이 만화의 소비자들은 극단적으로 과장되고 극화된 주인공을 욕하는 것—그리고 작품이 원하는 대로 그 감상에서 거의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다—을 주된 감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이생망이라는 장르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논해도 좋을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이것은 장르 예술의 형식이고 소비 패턴이다. 그 장르에만 나오는 요소들, 그 장르가 천착하는 정서와 논리 구조의 세팅, 그 장르에서 응당 받아야 할 감상과 교훈 등이 정형화될수록 그것은 더욱 확실한 장르가 된다.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 특정한 느낌과 생각이 반복적으로 공고해지는 것을, 이 만화를 포함한 꽤 많은 매체와 콘텐츠에서 점점 목격하고 있다.

문제는, 이생망이라는 장르가 주는 감상이 퇴폐미보다는 퇴폐 그 자체에 더 가까우며, 이 장르에 세팅되어 있는 가치와 관점과 관념 체계가 다분히 퇴행적이랄까 후진적이라는 데 있다. 퇴폐미는 적어도 엄숙주의에 대해서는 반성을 촉구하는 데 비해 퇴폐 자체는 어떤 것도 반성하지 않는다(오히려 그런 것 따위 반성하지 않아도 좋다는 전제가 다분한데, 특히 이 만화의 결말부가 어떤 장면으로의 이행도 특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압축적으로 암시한다). 또한 “너(나)는 이마만큼 쓰레기 새끼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도 않냐” 같은 말들은 정말로 “공부 자극”을 시켜준다기보다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효과를 일으켜 그냥 자기의 ‘쓰레기 같음’에 더 주목하게 만드는 효과를 일으킨다. 정말 그러냐는 얘기는 묻지 마시라 그냥 이것 다 내 근거 없는 잡감이므로.

이 장르, 현시창 이생망 장르에 가장 가까운 역사상 유사 사례는 신파극이라고 보여진다. ‘불쌍한 새아가, 못된 시어머니’ 등으로 촌스럽게 정형화된 비극들은 분명 특정 세대 특정 집단에게는 지극히 유용하였으되 지금은 심지어 공중파 아침 드라마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장르화된 신파극을 만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주 간단하게도, 우리가 정말로 그런 세상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싶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학의 미학으로 점철했던 신파극이 한물 갔듯이, 아주 정교하고 정당하며 말리기 어렵고 모두에게 쉽게 전파되는 자조의 미학으로서의 이생망 역시 적절한 시점에 종말할 것으로 예상되기는 하지만, 다만 이 장르가 한 세대의 뇌리에 어떤 정서를 얼마나 각인할 것인가가 우려스럽다. 실로 우리는 신파극이 낳은 손녀뻘 장르, 막장 드라마를 지금도 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론은… 장르로서의 이생망, 장르로서의 현시창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장르는 다분히 자기파괴적이랄까 지속 불가능하달까 바람직하지 않달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별로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거니와 자꾸 되풀이할 소리가 못된다. 할 거면 어떤 타개, 돌파, 최소한의 확실한 골계미나 퇴폐미를 확보하고 가야 한다. 이런 장르, 현재 청년 세대가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표현상의 장르화를 이제는 덮어놓고 긍정하기 어렵다. 우리의 이번 생은 확실히 망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망했는지까지만을 거듭 되풀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일이 과연 어떤 예술적 역사적 공헌을 할 것인가 그런게 있긴 할까 하면 그건 의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세트장 예능의 종언: <무한도전> 종영에 부쳐  (0) 2018.04.01
포주 레진  (0) 2018.01.31
장르로서의 이생망  (0) 2017.10.31
텍스트  (0) 2017.01.10
무식이 배짱이라고 한두 줄 더 얹어 보자면  (0) 2016.07.18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텍스트

2017.01.10 21:49

최근 읽고 있는 텍스트는 위키문헌에 올라와 있는 각종 연설과 선언, 문학 작품들이다. 위키인용 랜덤도 가끔 돌리고 있다. 한국어 위키인용집은 좀 빈약해서… ㅋ 그리고 팟캐스트로 KBS 라디오 시사고전을 틈틈이 조금씩 듣고 있다.

사실 알은 지는 3년쯤 됐는데 중간중간 구독을 쉴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건 요즘 꾸준히 들을 계기가 있어 다시 듣고 있고, 또 뭐 있더라… 아 그래, <아수라>, <라라랜드>, <너의 이름은.>, <아가씨>처럼 모두가 다 넋놓고 텍스트로 읽고 있는 작품들은 가급적 안 읽을 작정이다.



여기에는 뭐 우열의 차원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이냐 부차적인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위키문헌 랜덤을 돌리다 보면 원초적인 무엇들과 마주치곤 한다. 김명순이라는 역사상의 여성주의자를 만나기도 하고, 환단고기 본문을 읽게 되기도 하고,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의 기자회견문이나 박근혜의 개헌 제안 국회 연설 원문을 접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분명 오늘날 숱한 트윗과 카드뉴스와 소리 소문으로 가공 각색되어 전해지는 것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원문을 내가 직접 정독한 적은 없지 싶어서, 전혀 새롭고 경이적인 경험이 되고 있다.


라디오 시사고전도 마찬가지다. 3분이라는 시간이 짧은 편이고, 그걸 대다수 청취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려다 보니 좀 안 맞는 예시나 대수롭지 않은 군말들도 왕왕 들어가곤 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절대적으로 지키고 있는 한 가지 원칙, 동양 고전 속의 원래 한문을 제대로 된 방식으로 새겨 읽고 뜻을 푸는 것만으로도 이 기획은 충분히 훌륭한 데가 있다. 덕분에 나 같은 사람도 “불학자는 수존이나 행시주육이라” 같은 문자를 쓰고 산다.


방금 잠깐 밝혔지만, 요즘은 모든 텍스트가 아무 컨텍스트에 집어넣어도 쭉쭉 흡수되도록 굉장히 잘 커팅되고 소화되고 표백되어 다른 뭔가의 재료로만 쓰이고 있다. 흡사 식자재 가공육과 같다고나 할까. 요즘 시절에 좋은 제작자, 훌륭한 크리에이티브란 바로 이 식자재 가공육에 무슨 양념을 치고 어떤 조리법으로 끓여서 어느 국물에 담가 내놓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걸 잘 한 것이 그 무슨 영화니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니 하는 것들인 모양이다.


마침 우연찮게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 역시 이르기를 <너의 이름은.>을 짓기 꽤 오래전에 한동안 일본 고전 문학을 탐독하면서 서로의 몸이 바뀌는 설정을 접할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렇다면 그 고전 문학은 바로 그 당대 시절의 일본 대중에게 <너의 이름은.>만큼의 감동을 주던 무엇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난 아니라고 본다. 요즘 사람들이 굉장한 영화라고 칭송하고 있는 작품들이 다들 이런 식이다. 고전 텍스트라는 이름의 몇 가지 식재료를 가장 현대적으로 버무린, 어쩌면 그뿐일 수도 있는 결과들.


세상이 비인간적이기 짝이 없어져서, 우리 중 대다수는 2시간 정도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할 시간이 영화 볼 때 말고는 없는 지경에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라라랜드와 너의 이름은.에 지나친 의미 부여와 과대 해석을 수행한다는 감이 있다. 사실 그 패러디 포스터들은 벌써부터 질리고 언론 보도가 나가는 시점에서는 이미 식상하다는 감이 있다. 사람들의 일반 교양 수준이 지금보다 책 한 권 정도만 더 높았더라면 이 영화들은 그냥 잘 만든 영화, 논술용 영화 정도로 적당하게 언급되고 지나갔을 것들인데, 참, 싶다.


그래서 일부러 안 볼 생각이다. 사실은, 다들 하도 떠들어서 이젠 1도 보지 않았는데도 어느 정도 그 내용이 추측이 된다. <아수라>는 그냥 누가 착하네 나쁘네를 설명할 것 없이 내 눈에 거슬리는 새끼는 다 조져버린다는 이야기일 테고, <라라랜드>는 현실적이기만 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완전한 삶을 누리는 촌각에 대한 환상일 테고, 등등 말이다. 썩 틀리지 않지 않은가? 이렇게 잘 응용되고 가공 조리되어 무슨 맛일지 대충 짐작이 되면, 안 먹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쓸데없이 길게 썼는데 결국 요약하자면 난 응용 제작된 상업 콘텐츠들보다는 좀더 원초적인 텍스트들을 보려고 한다. 요즘 그게 내 취향이기도 하고, 그게 불편한 팝업을 두어 개 줄이는 원초적인 방법일 거라고 믿기에.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주 레진  (0) 2018.01.31
장르로서의 이생망  (0) 2017.10.31
텍스트  (0) 2017.01.10
무식이 배짱이라고 한두 줄 더 얹어 보자면  (0) 2016.07.18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AWS로 워드프레스 호스팅시 주의사항  (0) 2015.12.14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여기에 덧붙이는 글.


  1. 세상에 CIA보다 많은 것을 아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사실은 예로부터 본질적으로, 지도란 정보가 아니라 데이터다. 그것도 개중 가장 단순하고 중립적이며 기계적인 축에 드는 데이터. 지도가 정보가 되는 순간은 둘 중 하나다. 거기에 정말 시시콜콜하게 누가 어디에서 뭘 한다가 다 적혀 있거나, 아예 전인미답의 땅의 지도이거나.

  2. 사실 이 나라에서는 지도라는 데이터로부터 정보를 뽑아내는 사고력을 발휘할 일이 퍽 드물다. 예를 들어 쉽게 말하자면, 한 동네의 사회지리적 정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그 동네 전담 택배 기사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소리.

  3. 초딩들의 휴대폰으로도 GPS를 잡는 오늘날 “기밀 군사지도”는 형용모순에 가깝다. 기밀 지도란 결국 정보 비대칭성으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의 핵심 요소인데, 현대 전술에서 정보 비대칭이 뭐 얼마나 큰 변수인가? 핵미사일 개수가 진짜 변수지.

  4. 청와대가 어디 있는지(효자동 뒤에 있다), 국정원이 어디 있는지(헌인릉 뒤에 있다), 서울화력발전소가 어디 있는지(상수동 뒤에 있다)를 지도에서 숲 이미지 합성시켜 누락시키는 게―네이버는 진작부터 그렇게 했고 다음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치고 있다―과연 군사 안보일까?
    진짜 군사 안보란 건 지구상의 위도-경도 좌표로부터는 좀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그라운드 제로 사방 5km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핵심 정보와 지휘권과 전투력이 손망되지 않게끔 하는 일이 군사 안보 아닐까? 다른 예를 들자면, 누구나 청와대에 들어와서 관광하고 구경하고 다 하지만 국가 기밀은 기밀대로 잘 지켜지는 그런 것이―백악관이 그렇게 하는데―군사 안보가 아닐까?

  5. 지도 유출을 두려워하는 논리의 기저에는 특정 장소에 외부 유입이 들이닥치는 순간 모든 게 끝장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건 보안도 아니고 전투도 아니고 그냥 농성이다. 산성 쌓고 들어가서 문 닫고 스텔스 위장막 쫙 펴다 놓고 그저 버티는 복지부동 말이다. 지도가 단지 데이터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런 마인드셋이 정립돼 있는 게 너무 뻔히 보여서, 그 점이 우스울 따름이다.

  6. 그나마 오늘날 지도 데이터는 민간이 상업용으로 만드는 것이 태반이다. 그 지도에도, 버스 정류장들 이름 다 참고해서, 어느 군부대 앞인지 몇 사단 예비군 훈련장인지 대충 다 써 있다. 이래도 지도가 그렇게나 국가의 안보에 치명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는가? 솔직히 말해서, 지휘통제소 천막에 쪼그리고 앉아 아세테이트지에 소대 마크 중대 마크 그려넣기 바쁜 높으신 분들의 전쟁놀이를 위해 우리가 불편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뭔가?


에효 모르겠다. 바닷가 마을이니까 물 포켓몬 등장 확률 UP 같은 게 데이터에서 정보 만들어내는 발상인 건데 우리나라에서 누가 이런 걸 하겠나. 구더기가 그렇게 무섭다는데 장은커녕 김치 한 포기도 담그지 말아야지 ㅇㅇ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생활임금과 기본소득

급하고 추하게 고도산업화된 나라라서인지 이곳에서의 일〔勤務〕이란 일종의 속죄 내지 고행이 되어 있다. 다들 논다는 것, “숨만 쉬고 사는 것”을 끔찍하게 금기시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공포와 금기시의 이유가 사후적—수입이 없어지거나 생활에 지장이 가거나 파산 상태가 되거나 등등—차원이 아닌 사전적 차원, 즉 사상적/이념적인 차원에 있다는 점이 슬프게 흥미롭다.
모두가 이미 아는 바, “취업 안 하면 어떡해?”의 발화에서 장래 일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의도되지 않는다. “취업을 안 할 수는 없다”라는 무의식적 규범을 스스로에게 돌려 말해 들려주는 것이 의도되어 있을 뿐이다.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냥 넌 그럼 뭐 할 거냐고 묻겠지. 할 거 없으면 취업이나 하라는 식으로.
일해서 돈 벌어 식솔을 부양하는 것이 유일하게 허용된 긍정적 선택지인 마당에 실존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생활이라는 실존을, 인간 존엄을 위한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하자는 것은 그래서 단순 생떼가 될 수 없다. “수입”으로 대표되는 자유자본시장경제를 포기하는 비용보다는, 그 수입의 최저선을 인격적 수준으로 합의하는 비용에 우리는 더 지불 용의가 있다.

2. 패션좌파와 진보적 정치문화의 의제

패션좌파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소비적 문명 자체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어차피 똑같은 아메리카노 사 마실 바에는, 앉아서 돈백만원 벌자고 꼼지락거리는 구차한 삶보다는 자본권력이며 체게바라며 운운 꿈과 이상을 늘어놓는 것이 더 “쿨”한 것이다. 좌파성이 라이프스타일과 분리 가능한 별개체로 기능할 수 있는 이상, 윤서인이 맨날 두드려패는 헬조선 타령 깨시민들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온전히 기성 좌파의 직무방기의 결과다. 세상에 싸울 의제가 몇이고 바꿔야 할 삶의 디테일이 몇인데 그저 닭그네 까는 법만 가르친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진보적 정치는 지금의 삶과 세상에 만족하지 말자고, 좀 덜 불가능하게 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구체적으로 꿈꾸는 정치여야 한다(잠 안 자고 깨어만 있어서 만사에 예민하게 구는 깨시민질이 아니라).
그렇기에 진보적 의제들은 ‘더 나은 세상’, 나와 동네와 법률과 습관과 전통의 변화라는 것을 구체화해 눈앞에 들이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여기서 흡연을 금지한다, “병신”이라는 표현을 인격모독으로 간주한다, 청년 1인에게 매월 51만원 상당의 온누리상품권을 지급한다 같은, “어 그럼 난 뭘 해야 하지”가 튀어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크 이런거 되게 멋있지않냐 넌 몰랐지? 이게 진보야” 같은 거드름 대신 말이다.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텍스트  (0) 2017.01.10
무식이 배짱이라고 한두 줄 더 얹어 보자면  (0) 2016.07.18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AWS로 워드프레스 호스팅시 주의사항  (0) 2015.12.14
아 XE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0) 2015.09.16
백업  (0) 2015.06.16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순전히 나의 fails를 case studies로 바꾸기 위한 기록. 눈물 없인 읽을수 없을껄!!!

거의 프리티어 php EB 기준입니다.

한동안 내 목표 = 이 글 업데이트 안해도될만큼 fail study 쌓는것 ^.^ ㅜ.ㅜ



일단은 이 슬라이드를 읽고 오자. 온갖 실패를 겪고 나니, 이 슬라이드가 얼마나 잘 만든 것인지 비로소 보임.

잘 이해가 안 되면 이제부터 아래를 읽도록 합니다.


  • 기본적으로 AWS는 “너는 서버를 굴릴 줄 알고 우리는 남는 서버가 있으니 우리 한 번 잘해보자”의 방침임. AWS가 나쁜놈인 케이스는 거의 없고 나의 서버 구축 운용 지식의 문제인 경우가 대다수.

  • 엘라스틱 빈스톡일 경우, 로컬에서 테스트 끝난 소스를 deploy하는 것이 기본. 워드프레스 관리자 메뉴에서 플러그인, 테마 등을 바로 받아 서버에 추가로 설치하는 것들은 version으로 관리가 안 된다. 따라서 오토 스케일링이 작동되거나 인스턴스가 재부팅되고 나면 추가 설치했던 요소들은 다 날아가고 없어짐.
    싫으면 위에 소개한 슬라이드에 설명된 대로, ①원하는 추가변경 작업 완료 → ②백업 플러그인으로 내려받기 → ③그걸 다시 application version으로써 deploy 를 하도록 한다. 해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문제없이 깔쌈하게 돌아가서 매우 놀람.

  • 일반 EC2의 경우는 모르겠는데, EB로 환경 구성했을 경우 DeliciousBrain에서 만든 Amazon Web Service와 WP S3 Offload는 필수로 깔아야 함. 안그러면 이미지 올릴 때마다 EB를 돌리기 때문에 맨날 WARN 뜨고 degraded됨.

  • 이미지를 S3로 처리하게 해놨다 하더라도, user avatar와 featured images는 기본적으로 home_url() 기반으로 세팅하는 것이 wp의 철학임. 따라서 인스턴스를 새로 구성하거나 버전을 EB에서 다시 deploy할 경우 다른 이미지는 남는데 유저 아바타와 특성이미지는 날아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영어로는 dead라고 부름. 일반 호스팅 업체에서는 s3 개념이 없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 프리티어가 뭘 돌리든 월 750시간 무료라고 하는데, 이게 총합에 대해서 그렇다는 말임. RDS 물린 environment를 한달 내내 4개 켜놓으면 유료 결제되는 사용량은 = EC2 3개 * 750시간 * 1시간비용 + RDS 3개 * 750시간 * 1시간비용 = 요금폭탄!!!

  • 프리티어 첫 과금이 깜짝 놀랄 정도로 발생했을 경우 침착하게 다음 순서에 따른다.
    1. 결제 물려놓은 카드의 잔액을 없애거나 해외결제를 중지한다. (이건뭐 각자 알아서들 하시라. 일단 결제를 시도하기 때문에...)
    2. 내가 뭘 create해봤다 싶은 모든 서비스에 들어가 불필요한 인스턴스를 모두 terminate할것. 특히 월초 시작됐을 경우. 지금 이 시간에도 과금은 되고 있으므로
    3. 우상단의 support center로 가서 create case를 눌러 자초지종을 영어로 설명하도록 한다. "나 프리티어인데 요금이 너무 많이 부과가 됐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정도의 의사를 전달하고, 답장 받는 방식을 web으로 지정해 전송.
    이후 기다리다 보면 알아서 처리해줌. 첫 청구는 거의 대부분 캔슬해 준다고 함. 내 경우에는 답장 받는 데 5일 걸림. 한번 100불 넘는 청구를 받아보고 나면 정신이 확 든다. 수시로 우상단의 (자기이름) > billing & cost management를 확인하도록 한다. 이번 달 청구요금이 별로 없거나 줄어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 일반 웹호스팅 때 하던 나쁜 버릇이 문제가 된다. 예컨대 예전 호스팅 업체 쓸 땐 루트폴더에 phpmyadmin도 깔고 codeigniter도 깔아서 썼었는데(물론 아무 문제가 없다) 이걸 워드프레스와 같이 묶어서 버전으로 배치하려니 개노답.
    RDS 따로 쓰기 싫고 이것저것 자기 맘대로 하고 싶다면 그냥 EC2에 콘솔로 DB, 언어 등등을 다 깔아 구축하든지 차라리 코드이그나이터만 굴리는 AWS 계정을 하나 새로 만들어서 쓰는 게 훨씬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냥 돈을 내고 새 환경 하나 구축해도 되긴 됨…)

  • 파일 이름이 한글로 된 이미지 등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다. 뭐 모든게 ascii latin-1로 맞춰져 있는 동네이니 당연한 일인데, 다음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면 도움이 된다.
    1. non-latin 파일명 통제 플러그인 설치. 난이도 낮음, 효과 큼, 문제해결력 작음. 내 경우에는 안형우님이 만든 플러그인을 쓴다.
    2. RDS(데이터베이스)의 파라미터 그룹 고쳐주기. 난이도 중간, 효과 중간, 문제해결력 큼. RDS 콘솔의 좌측 메뉴에서 Parameter Groups를 누르면 default.mysql.5.6 어쩌구 하는 것 하나만 보일 것이다. 이 밑에 비슷한 걸 하나 더 만드는데 다만 character_set_ 부분과 collation_ 부분을 죄다 utf8(-general-ci)로 고쳐준다. 저장한 다음 원하는 RDS에 적용하고 reboot 한번 해주면 됨. 다른 블로그 글들을 검색해서 하는 게 더 정확한데, (다행히 난 안 그랬지만) 인코딩 설정을 기존 환경과 충돌하게 설정하고 reboot하면 몇십 분간 in-sync로 안돌아온다는 케이스 문의들도 있었다. 주의해서 해볼일인듯.

  • Route53을 쓴다면 기본 요금으로 매달 50센트는 낸다고 보면 된다.

  • 한 달 좀 넘게 이리저리 굴러 봤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이미지(미디어) 호스팅만 S3로 받고 애플리케이션(코드)은 일반 웹호스팅으로 받는 조합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이 내 생각.
    AWS가 지향(상정)하는 웹애플리케이션 개념에 워드프레스는 해당되지 않는다. 문제의 워드프레스가 기본 트래픽이 아주 높아서 일반 서버호스팅으로 비용 감당이 안 되거나, 상당한 양의 real-time 서비스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에는, 코드와 저장소와 DB를 모두 AWS에 넣어놓는 워드프레스는 확실히 '가성비 꽝'이다. 워드프레스는 24시 꾸준하게 운영되는 서버에서 대단히 정적으로 움직이는 CMS이기 때문에.

  • 다시 일반 웹호스팅으로 옮길 때는 DB 테이블 설정에 주의하도록 하자. 나의 경우에는 닷홈으로 다시 옮기고 나서 1주 정도 간격으로 자꾸 테이블 "일부"가 없어지는 기현상을 겪었는데,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을 파악하다 보니 AWS에서 넘어온 데이터베이스의 테이블들이 다 InnoDB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 나머지 안 날아가는 테이블들은 MyISAM이길래 모두 MyISAM으로 맞췄고, 현재까지는 문제 반복 안됨.


내가 앞으로 라이브 서비스 서버를 바꾸느니 종교를 바꾼다 ^_T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식이 배짱이라고 한두 줄 더 얹어 보자면  (0) 2016.07.18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AWS로 워드프레스 호스팅시 주의사항  (0) 2015.12.14
아 XE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0) 2015.09.16
백업  (0) 2015.06.16
둠칫둠칫  (0) 2015.05.14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무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저런 한국적 조건 때문에 CMS로 부득불 XpressEngine을 선택해서 작업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조금씩 들여다보기 시작한 XE인데, 무슨 함수 하나 찾으려고 파일 뒤지다가 방금 이런 코드를 봤다.

게시물의 등록시간을 출력하는 함수인 모양인데…







함수 찾아라등록시간() {

  $등록시간 = $현재객체에서->찾아라('등록시간');

  $년 = 문자뜯어와라($등록시간, 0번째글자부터, 4글자만);

  $월 = 문자뜯어와라($등록시간, 4번째글자부터, 2글자만);

  $일 = 문자뜯어와라($등록시간, 6번째글자부터, 2글자만);

  $시 = 문자뜯어와라($등록시간, 8번째글자부터, 2글자만);

  $분 = 문자뜯어와라($등록시간, 10번째글자부터, 2글자만);

  $초 = 문자뜯어와라($등록시간, 12번째글자부터, 2글자만);

  갖다주기 시간꼴로만들어서($시,$분,$초,$월,$일,$시);

}




ㅎㅏ… 네이버와 XE 개발팀은 뭘 먹으면 이런 근자감 쩌는 무대책 코드를 배포하는 거지… 그냥 일단 timestamp를 찍어놓고 변환을 하게 만드는게 옳은 도리가 아닌가… 도대체 DB와의 통신과정에서 저 '등록시간' 필드에 언제나 14자리 숫자가 착실하게 저장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행여나 DB 꼬여서 테이블 데이터 인코딩 바뀌면 어떡하려고…







모르겠다 입다물고 하던 일이나 해야지

그리고 장차 내가 만들게 될 서비스엔 이딴 로직은 집어넣지 않을 테다. 아니 어떻게 이게 말이 되냐고…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AWS로 워드프레스 호스팅시 주의사항  (0) 2015.12.14
아 XE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0) 2015.09.16
백업  (0) 2015.06.16
둠칫둠칫  (0) 2015.05.14
초조함  (0) 2014.12.20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백업

2015.06.16 23:20

다음클라우드가 서비스를 종료한다고 하는 이 시점에, 바이두와 360클라우드에 올려 놓은 만화 파일들을 익숙하게 다운받아 보다가, "야 어진아 혹시 몽촌토성 영상 원본 없지?"라는 물음이 와서 "내가 지웠을 건데 함 찾아볼께요" 하고 집에 와서 옛날 하드디스크들 열어보다가 문득 생각하는 것은, 내가 정말 많이 변하긴 변했구나 싶은 것이다.


당장 2012년 5월께만 하더라도 나는 몽촌토성에서 나 한 명이 구르는 비디오가 그렇게 일회적이고 두 번 다시 재현 불가능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냥 공식 유튜브 계정과 내 아이팟에 최종본을 넣어 놓았으니 이걸로 그만이겠지 하고 정말 어리숙하게 원본 파일들을 지워 버렸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미친 거 아냐? 최종본은 없어도 원본은 남아 있어야 될 거 아냐? 지금도 그걸 veg파일, sfk파일과 함께 통째로 싸그리 없애 버린 내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그 시절의 나는 백업 개념이 완전히 틀려먹어 있어서, 백업할 파일을 골라서 업로드했었다. 뭐 지금도 남아 있는 버릇이긴 한데, 같은 파일이 두세 번 올라간다든가 정말 하등 쓸모없는 파일이 업로드되느라 시간이 지나간다든가 하는 걸 잘 못 봐주는 편이다. 이제는 그런 게 아님을 알고 최대한 날것 그대로를 있는 대로 몽땅 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참 많이 변했다.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두고두고 옛날을 되씹고 싶지는 않다. 잊고 있던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걸 매일 반복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들은 다 어디에 저장해 놔야 유지가 된단 말인가. 2테라바이트를 주는 바이두 정도가 일단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으니 함부로 종료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이거 정도가 그나마 안정적일 것이다. 세월이 좀 지나면 저장장치 용량들도 좀더 늘어날 테니, 아무 생각 없이 파일들을 짱박는 것이 좀더 쉽고 값싸지겠지.


이 모든 데이터들이 어느 날인가는 그냥 스러지고 없을 거라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흔히들 디지털 자료는 영원할 거라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그 무엇보다 핵심적인 근거는, 그 디지털 자료를 찾을 만한 사람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날이 언젠가 반드시 온다는 점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그 자료들은 아무 의미도 소유주도 얻지 못한 채 유실되어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자료가 다시 위로 올라오고, 다시 한번 read가 되고, 캐싱이 되고 하는 거지 싶다.


이를테면 우연히 영화 소개 TV프로그램에서 봤다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내 컴퓨터》라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현재 씨네21의 글을 클리핑한 진보넷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은, 영화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우연히 쇼윈도에 진열된 컴퓨터를 보고 그게 자기가 옛날에 빼앗긴 컴퓨터임을 알아차리는 장면 그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씬 하나가 그 어린 마음에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나도 내 컴퓨터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수 년 전에 잃어버린, 자기가 가꾸어 놓은 바탕화면의 '내 컴퓨터'가 그 모양 그대로 쇼윈도에 놓여 있는 걸 보면, 무슨 감회가 들까.


여균동 감독은 《내 컴퓨터》라는 영화의 원본 필름을 갖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안 그럴 수도 있다. 마치 내가 지금 TAILER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인 추진력과 기동력을 선전하는 바로 그 행사의 바로 그 원본 영상을 안 갖고 있듯이 말이다. 이제 그것은 어처구니없고 죄스러운 일이 되었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일 것이다. 완벽한 기억의 보존이 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면, 내가 남겨야 할 것은 어느 정도까지일까. 더 많은 백업은 그것을 더 많이 보장해 줄까. 어차피 언젠가 스러질 자료들이고 기억들이라면, 어떻게 스러지게 하면 좋을지를 좀 미리 생각해 두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생각이 엉킨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일부터 대학 생활 마지막 시험이다. 이제 정말로 학창시절이 완전히 끝나고 세상으로 던져진다. 낙서공책을 모으고 모든 것을 백업해 두고 마냥 내 아이팟을 들여다보며 애지중지 이 모든 게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는 유아적인 생각은 그만둔 지 좀 되었지만, 실존적으로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스러지고 싶지 않은 것인지 좀 잘 스러지고 싶은 것인지, 스러지게 내버려두기 싫은 것인지 어떤 것들은 스러지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것인지―잘 모르겠다.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AWS로 워드프레스 호스팅시 주의사항  (0) 2015.12.14
아 XE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0) 2015.09.16
백업  (0) 2015.06.16
둠칫둠칫  (0) 2015.05.14
초조함  (0) 2014.12.20
확인받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0) 2014.01.04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둠칫둠칫

2015.05.14 09:34
어제 그럴 일이 있어서 저녁 6시 반경에 신촌 유플렉스 앞에 있었다. 흰 티에 민트색 하의로 깔맞춰 입고 나온 20대가 한 스무 명 정도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스피커가 설치되고, 그들 중 여자 다섯 명이 가운데로 나와 레드벨벳 최신곡에 맞춰 커버댄스를 정말 능숙하게 선보이지 않겠는가? 민트색 치마는 치어리더 스타일이어서 있는 대로 나풀거리고, 표정은 어쩜 저렇게 프로페셔널하게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돼 있는 광경을 봤다. 적잖은 남성 행인들이, 흐뭇한 미소를 띠고 그 공연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왠지 우리가, 그들이, 모두가 조금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 5명의 훈련된 웃음과 배운 대로 추는 춤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큰 의미 없이 웃는 시선 처리와 사람 홀리는 치마의 비주얼 단지 그 둘 때문에 이런 무대에, 여성 아이돌에 홀리는 사람들이 있겠다 싶었다. 사람들의 주목과 카메라의 포착 없이는 성립이 되지 않는 그 ‘섹시도발’을, 한순간 진실한 것으로 믿어버리고 욕망하게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동아리방을 드나들 때마다 춤동아리의 연습을 봐 온 나는 안다. 군무라는 건 심각하고 따분하고 진지한 과업이다. 저 민트색 치마는, 지금이야 길거리 깜짝 공연에서 최고로 주목받는 주인공일지 모르지만, 그 직전까지는 그냥 딱 한두 번 입어보고 어디 박스에 다시 개켜두었을 물건이고, 아마도 저 다섯이 저 “섹시 댄스”를 연습하던 대부분의 시간에 그들은, 내가 봐 온 게 일반적이라면, 아마 헐렁한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전혀 섹시하지도 도발적이지도 않게 마냥 고생하고 있었을 거다.

다만 그들이 배운 대로 따라했을 그 춤, 그들이 수도 없이 들었을 “Give me that give me that icecream cake!” 따위 가사가 포함된 음악을 제공한 자들의 저의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크게 의심하게 된다. 뭐 하자는 것일까. 더 많은 5인조 여성팀이 더 확실하게 이 춤과 음악을 따라하게 만들면, 더 나은 세상이 온다고 믿는 것일까?
하! 그럴 리가 어딨어? 이번 “시즌”에 “애들”을 “굴릴” 때 쓸 “최신곡”이 뭐든 하나 필요하니까 팔아치우려고 즉석 떡볶이로 볶아내 놨겠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의 복합을 본 사람들이 괜히 성욕이나 일으키는 거대한 오해와 허위와 가공의 세상이 되든 말든, 음원 수입에 행사 출연료만 두둑히 받아 챙기면 그만일 테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챙긴다더니!

선비질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춤을 추거나 보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춤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게 허구화되고 우상화되어 소외될 때다. 약 4분간 숨가쁘게 공연된 그 춤에서, 정말 이 동작이 필요한가? 싶은 순간이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딱 하나 목적이 있긴 했던 것 같다. 관객에게, ‘지금 내가 당신에게 진심으로 애교를 부리고 있다고 믿어 주세요’의 신호를 보낸다는 그 한 가지 목적. 하마터면 나조차도 그 목적을 달성시켜 줄 뻔했으니,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뭐 오죽하겠는가. 이런 식의 것들이 밤낮 없이 유통되는 세상에서 성추행, 성폭력, “맞다 개같은년” 운운하는 방송이 없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5인조 무대가 끝나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20여명의 동료들이 합류해 다음 공연을 시작했다. 이제 그만 이동을 해야 해서 자리를 뜨다가, 문득 그들의 가방으로 추정되는 가방의 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제 그 저녁 시간 게릴라 공연의 자리에서, 그들의 춤이 뭘 의미하는지를 맨 처음부터 지켜봐서 아는 것은 오직 저 맥없이 널브러져 있는 가방들뿐이었다. 그리고, 천만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 가방 더미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들이 딱 한 번 보여줄 잠깐의 쇼로만 사태 전체를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들과, 그렇게 하라고 설계된 “둠칫둠칫”만이 가득히 있었다.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XE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0) 2015.09.16
백업  (0) 2015.06.16
둠칫둠칫  (0) 2015.05.14
초조함  (0) 2014.12.20
확인받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0) 2014.01.04
요즘  (0) 2013.12.14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781)
0 현재 호주워홀 (6)
1 내 (325)
2 다른 이들의 (251)
3 늘어놓은 (34)
4 생각을 놓은 (68)
5 외치는 (69)
9 도저히 분류못함 (27)

달력

«   2018/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tatistics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