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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633

오늘 그 아이팟은 평소와 지나치게 똑같은 동작으로 내 손에 붙들려 나왔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고 싶어했을지도 모르겠다. 딸려가 본들 주머니 속에서 썩다가 다시 이부자리 머리맡에 놓일 텐데. 나 대신 그 좋아하는 스마트폰과 패드에 이어폰 잭을 꽂을 텐데.

어쩌면 그것은 날 괘씸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까지 8년 동안 별의별 곳을 다 돌아다니며 귀를 심심하지 않게 해 준 게 누군데. 대학생활과 군대를 누구 덕분에 버텼는데. 그 잘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갖기 전까지 제일 애지중지하던 몸이 누구였는데, 네까짓 게 감히.

그래서 그 아이팟은 제 갈 길을 갔다. 아마도 조조영화 한 편을 보려고 버스에서 내릴 때, 아니면 극장 좌석 어딘가에서, 또는 외선순환 지하철 2번 칸에서, 어쩌면 그 직후 갈아탄 163번 버스에서.

데이터는 다 백업받아뒀었다. 어쩌면 120GB라는 저장 용량은 로컬 디바이스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구시대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The Book of Eli>에 나오는 그런 아이팟이 내게도 있다는 일말의 허세 섞인 자부심은 있었다. 그 모든 유산(legacy)이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손에 붙들려 있기를 거절했다. 수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략 천 년쯤 지나면 고고학자들은 지금 시기의 디지털 자료들을 복구하지 못해 광광 울 꺼라는 트윗을 봤었다. 동료 한 명이 그 얘길 듣고 이런 말을 했다. “글쎄 그런데 그때가 되면 디지털 고고학자들이 데이터를 발굴해내려고 어떻게든 또 할 걸요?” 뭐 여차하면 우주로 전파를 쏴 두면 어떻게든 보존은 되지 않겠느냐, 따위 실없는 농담으로 그 얘기를 마무리지었다.

슬프다거나 낙담이 되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그 얘길 해 봤더니, 다른 동료가 맞받아준다. “근데 물건이라는 건 갈 때가 되면 가더라고요.” 그러게 말이다. 2008년 세밑에 사서 2016년 구정 전에 보내니, 딱 8년이다. 그것도 제딴에는 꽤나 눈치를 봤겠지. 그리고, 내게 띄지 않게 조용히, 오늘처럼 주인이 조용히 즐거울 날을 봐서 스스로를 분실 처리한 거겠지.

그것의 기종은 iPod Classic 120GB이고, 모델은 블랙이었다. 이름은 iYUPTOGUN이었다. 그것에게, 없는 염치를 무릅쓰고 사실은 그간 깊이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다.

서울대입구역에서
2016.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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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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