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볼 영화가 그다지 없더군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를 볼까 말까 고민중입니다. 결국 에반게리온을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밑도끝도 없이 그 자리 가서 지른 거죠.
- CGV의 이런저런 정책에 대해 고민하고 왔습니다. 왜 평일엔 되는데 공휴일엔 멤버십포인트로 영화표를 살 수 없는가, 왜 포인트로 팝콘밖에 팔지 않는가, 포인트 사용 방법에 대해 홈페이지에선 알기 어렵게 설명해 놓았으면서 왜 멤버십은 자꾸 모집하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주로 볼 게 뻔한 광고를 왜 올라간 사람들이 봤을 때 똑바르도록 붙여 놓았는가 등등. 포인트 매표는 담당자한테 물어봤더니 '티켓팅 시스템이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돼 있다'라고 하더군요. 경제 문제냐 경영 문제냐. 오랜만에 좀더 생각해 볼 문제.
- 매진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영화를 한 표 사겠다고 하니까 곧바로 5열 1번 좌석을 주더군요. 혼자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라고 말해줬습니다.
- 줄거리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는 에반게리온이 맞습니다. 심지어 앞쪽의 미사토네 집에 가는 장면은 아예 애니 DVD판스러울 정도. 그런데 애니로 나왔던 거보단 쉽네요. (원최 한 6화쯤 보다가 때려쳤기 때문에...) 애들이 시끄럽게 굴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이런 영화를 15세도 아니고 12세로 책정하다니, 아직 우리나라 등급위원회는 멀었다니까.
- 애니보다 쉽다고 한 말의 뜻은, 그러니까 거부감이 드는 표현이나 짜증나는 시퀀스가 많이 줄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극장이라 좀더 일반인을 배려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 에반게리온과 안녕 절망선생의 공통점은 딱 두 개. 절망적인 이야기와 눈이 행복한 타이포그래피. 정말 에바 시리즈에 사용되는 굵은 명조체와 그걸 사용하는 디자인 감각만은 크게 평가할 만합니다. 우리나라로 하자면 HY견명조는 좀 아니고 산돌명조B 정도면 될까요? 아냐, 아냐. 그보다 더 쎄야 해.
아주 잠깐씩만 지나가는 한자들이지만 놓치지 않으려고 자막보다 그런 것들에 집중을 해버렸습니다(본편 이외의 것에 신경써버린 거죠). 특수 전쟁에 사용되는 군사적인 서체는 역시 그렇게 생겨야 해요. 올곧고, 칼같고, 두껍고, 커야 좋고.
하테나에 따르면 문제의 명조체는 마티스EB 혹은 극태명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군인을 징집하고 배치를 할 땐 임무나 각종 상황 등을 알려줘야 되는 건데 왜 그런 게 전혀 없죠? 일부러?
- 왜 사도들은 일본만 공격하나요? ㅋㅋㅋㅋㅋ
- 짜증나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줄거리 흐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그래서 세계관이나 험악한 장면들이 어느 정도 이입 이해가 가능하더라는. 별개 인격을 억지로 붙여놓으면 괴란쩍을 수밖에 없어요. 폭주를 하든 벽을 치든, 그런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순순히 따르는 게 이상한 거죠. 뭐 틀린 말이면 할 수 없고요.
- 아무튼 긴 시간 동안 멍청하게 입 벌리고 보고만 있으면 되는 적당한 영화.
- 음향도 그렇고 영상도 그렇고 치고 맞고 하는 장면들은 이펙트가 정말 킹왕짱. 효과 하는 사람들은 정말 재미나게 했겠던데요.
- 원작(애니)에선 많이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만(불쾌감 견디느라고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이 작품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장면, 소품, 메카닉, 인물구도, 상황, 이야기, 풍경, 음향 배치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에 '생각들을 아주 빽빽하게 채워넣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앞서 말했던 '인격 연동의 부작용'이나 괴물의 다양한 형태, 건물의 설계 구석구석 등등, 웬만한 사람들은 합체로봇 만화 같은 걸 보면서 그냥 지나칠 사소한 문제까지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모조리 메꾸어 놓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 정도 정성이면 당연히 좀더 평가받을 일(もっと評価させるべき)이죠.ww
정말 보는 내내 생각의 밀도를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여느 작품 같으면 빈틈이 많고, 그래서 거기에 머릿속으로 딴죽 거는 일이 많은데, 에바는 그럴 틈이 별로 없습니다.
- 있다고 한다면, 역시 이 만화에서도 구약성서와 계시록은 어쩔 수 없이 우려먹히고 있다는 것. 일본 놈들 십자가 엄청 좋아해요. 신기한 건 복음서의 용어나 네타(...)는 전혀 모르면서도 666이니 뭐니 하는 거엔 빠삭하다는 것. 하나의 '신화'로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좋다 이거야, 내가 가서 그 신화를 '사실'로 만들어주겠어. (...)
- 일본 사람들은 지구 멸망이나 거대 전쟁에 대해 늘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때는 일본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는 모양입니다. 침략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는 나라 국민으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 우타다 히카루 노래 하나 건졌네. 예고편으로 볼 땐 별로였는데 그냥 음악만 들으니 괜찮네요.
- 영화 보면서 생각한 거 두 개. '절망선생 극장판 나오면 어떨까', '나는 내 이름이 되겠다'. 아이디어 베껴가면 죽음.
- 에반게리온 원작이나 애니를 감명깊게, 혹은 끝까지 다 보신 분은 절대, 절대 가지 마십시오. 이걸 다운받아 볼걸 돈 버렸다고 후회합니다. 하지만 에바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전부터 속쓰렸던 분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작 하나쯤은 봐 둬야지 싶으신 분들은 가서 보세요. 돈 안 아깝습니다. 정성 많이 들였습니다. 초딩이나 애들도 별로 안 들어오니까 괜찮아요.
- 엔딩 크레딧 끝까지 보세요. 가사 번역도 돼 있고, 맨 끝에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 계단에 애들 앉아있는 포스터, 거기 오른쪽에 적힌 이상한 단어들. 키워드입니다. 일부러 배워서 볼 필욘 없지만 알면 좋습니다.
- 별점 5점 만점에 4점. 적당한 영화에 붙이는 점수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수입된 에반게리온 극장판이라고?
- 이건 짤방
- 짤방 하나 더 (아니, 이것때문에 짤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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