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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도 무식이 탄로날 처지이므로 최대한 짧게 쓴다.


그래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이여, "메갈"의 등장 이후 기분이 어떠신가들? 이런 부문에서 자기반성을 하지 않아도 좋았던 대다수 여러분은 아마도 그들을 (여러분이 득 보고 계신 모순덩어리 세상의 모순덩어리 규범에 입각해) 양껏 비판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된다. "성평등도 정도껏이지 거 되게 쿵쾅거리네!"라고, 지금껏 여러분이 '신녀성'과 '이대녀'에게 변함 없이 정력적으로 그래 오셨듯이. 이 글은 그런 분들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만 앞으로도 그렇게 세계의 절반을 제2의 성 정도로 오도하며 착실히 도태(淘汰)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다.

그런데 우리 중 그렇지 않은 일부는 조금 당혹스럽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다 알겠고, 그럼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인 것이다. 역사와 문화에 절절히 흐르는 여성혐오, 지금도 이어지는 여성과 성소수자에의 억압, 성평등의 필요, 다 이해하겠고 납득하겠다 이거다. 이 글은 여기서 시작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럼 이제 그 여성혐오와 성차별의 기득권에 있는, 소위 "평범한 남자"들은 이 모순에 대해 무슨 행동으로 갚으면 된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있단 말인가?

한 가지 있다. 가부장제(patriarchy, 부권제[각주:1])를 용맹히 때려부수면 된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가부장제는 각 집안 어른 중 남자 어른을 우선으로 모시자는 제도이나,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가부장제란 기실 온 천지에 가득한 인류 사회 대부분의 작동 원리 그 자체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면,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역할이며 부성(fatherhood)에 있어서는, 그 핵심 구성 가치가 이 세상 전체의 가치에 얼추 비슷하게 연동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선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生] 역할이 기대되는 자다. <시경>에서는 이를 "아버지 날 낳으시고[生]"로 요약하여 가르친다. 확실히 내 아버지가 없던 정자를 생산해 내 어머니에게 착상시키지 않았던들 나는 나지 않았을 것이니,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아버지의 역할이란 숭고한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 원리는 모두에게 발견되었으며, 그리하여 인류는 이것을 생산(生産)과 성장, 혁신과 창업을 떠받드는 단 한 가지 형식의 경제로 조직하여 유지하고 추앙하였다.

또한 아버지는 똑바르고 딱딱하고 힘차게 오래오래 버티며 곧추서 있을 것이 요구되는 자다. 아버지 노릇에 사용되는 부위가 하필 그렇게 생긴 까닭이다. 이것은 모든 (적어도 절반 정도의) 인류의 무의식에서는 더없이 목전에 선명한 하나의 이상적 목표로 주어져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십여 개의 철제 페니스가 땅을 쉼없이 강간'하는 장면을 그렸을 때, 우리는 인류가 추진해 온 단 한 가지의 산업 발전 양상이 얼마나 가부장적이었던가를 낯뜨겁게 목도하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가 직선적이고 직접적이며 목적 지향적으로 강력하고 부단하게 정력적이기만 해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뿐 아니라 아버지란 어떤 정상적 표준과 규격을 제시하고 이를 준수하기(시키기) 위해 규율과 방침과 제재를 해야 하는 자다. 만들어낸 걸 기를 땐 기르더라도 만드는 단계에서만큼은 멀쩡한 것을 만들어 놓아야 기르는[鞠] 자(<시경>에 따르면 기른다 함은 이미 낳아진 것을 관리하는 것이며 그 역할은 어머니다)에게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다했노라고 강변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가부장적 정치는 필연적으로 권위와 규범의 정치이며, 모든 비정상적 상황과 비표준적 존재를 '쉬쉬하고' 덮어놓는 정치, 처리가 불가능한 규격 바깥의 잘못 낳은 존재에 대한 배제, 말소, 부정, 무화(無化)의 정치이곤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경제가, 산업이, 정치가, 요컨대 기반 문화 전체가 순 다 아버지 입장이었고 언제나 가부장제적이었으며... 에라이... 좆 같았다는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잠시 좆같다는 한국 비속어의 의미를 좀 새겨보자. 나쁜 의미에서 남성기 같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아무데서나 저 혼자 멋대로 발기하고, 죽어도 자기는 지금 당장 용두질을 해야겠다고 우기며, 한바탕 '싸튀'만 할 수 있다면 뭐든 그저 다 좋게 여기고, 그러므로 낳는 짓 외의 어떤 뒷일에도 아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설명해 놓고 보니 정말로 좆같은데, 그런데 과연 우리가 몸담은 가부장제적 체제나 문화나 사회 중 이런 행태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그 얼마나 되는가? 실로 없다시피하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여성혐오에 진력이 난 페미니스트들이 매일 증언하고 있는 세상의 실체이다. 정치인(CEO)이 아무 공약(프로젝트)이나 막 싸질러놓고 뒷수습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그가 몸담은 부성적 정치(산업)의 세계에서 뒷수습은 공약(프로젝트)을 낳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트 폭력이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것은 연인 사이라는 지극한 개인사에서조차 일련의 규율과 정상적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가부장제적 세계에서 지당하기 때문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가부장제의 지배층인 "한남 앱충"의 생리와 모든 꼴불견에 대하여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가부장제는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의 역할상을 제시해 기초 사회를 유지해 온 순기능을 해 온 체제라는 점이 있다. 또한 없던 것을 생산해내야 하는 시대에 가부장제란 필연적으로 호출되는 사고 체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가 무슨 시대에 살고 있느냐인데, 과연 지금 우리가 뭔가 완전히 새롭고 전에 없던 무엇인가가 없어서, 혹은 더 강력하고 완벽한 내치와 외치가 부족해서 이 사달이 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미 근본적 의미에서 임계치에 임박해 있는 인류에게, 뭘 더 낳는 것만을 목적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실제적 해결을 주지 못한다. 낳는 건 낳을 만큼 낳았고 이제는 그걸 잘 기를 때가 온 것인데, 오직 가부장제의 수혜자들만이 그 방법을 못 배워 혼란에 빠져 있을 따름이다.

시대가 페미니즘을 호출하는 이유, 그리고 내가 가부장제를 분쇄해야 한다고 우기는 이유가 여기에서 온다.


페미니즘의 역할은 불 보듯이 자명하다. 가부장제의 폐해에 대응할 수 있는, 혹은 아예 그걸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하고 억압되지 않은 발상과 방식을 제안하고 관철해 실현시키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반대는 가모장제가 아니며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부장제 바깥에 있을까? 적어도 남자들이 발기차게 들고일어나서 왈가왈부 토론하고 몇 가지 완벽한 방침과 규범을 정해 밀어붙일 만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 페미니즘에게 턴을 넘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이 닳아빠진 질서를 무너뜨리기 편하도록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는 작업이 있는데, 이제 좆 까는 짓은 그만하자고 나서서 부정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도 폭력적이고 기타 성별에게도 폭력적이지만 남성에게도 폭력적이다. 특히 그 남성이 정상적이고 규범에 맞으며 사회가 바라는 요건과 이상(理想)에 부합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렇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규격과 정상, 표준을 추구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공허하고 맹목적이면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필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질투와 증오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한남 앱충'들과 '군무새'들이 '권리만 요구하고 의무를 지지 않는 여성들'에게 쏟는 그 분노, 그들의 처량한 처지,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자 이제 여기서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있는 소수파의 양식 있는 남성 여러분을 다시 불러 보는 바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 불가능한 추구, 이제 아무도 원치 않는 생산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역할에의 눈먼 복무, 그 "수고와 희생과 손해"를 보상받기 위해 애쓰는 고생과 그 과정에서 세상에 끼치는 해악에, 당신이 동참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게 무슨 남자다운 것이라도 되는가? 당신마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좆 까라지!


정리하자면 이렇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첫 단계는, 당사자 남성으로서의 가부장제에 대한 탈권위와 전복이며, 여기서 말하는 가부장제란 결코 집안에서 "공처가"가 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 영역에서의 가부장제적 질서와 방식과 행태와 악습을 고발하고, 그 체계의 기득권으로서 그 모순을 순순히 시인하며, 적극적으로 혁파해 나갈 것이 요구된다. 맹목적 성장에의 거부, 목적 지향성으로부터의 탈피, 정상성에 대한 권위적 강압 문화의 극복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구체적 행동 요강은 더욱 세분화될 것이고 장차로는 더 다양한 거시-미시 사회에서 더 예리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행동들이 더 많이 요구될 테지만, 어쨌든 지금부터의 인류 발전의 한 축에 합류하는 데 있어 특히 (도태되고 싶지 않은) 남성들이 더욱 명심해야 하는 요점은 한 가지로 분명하게 모인다. 여자는 적이 아니다. 성소수자도 적이 아니다. 가부장제가 적(敵)이다. 그 장벽이 일단 무너지고 나면, 세상은 독일 통일 전후처럼이나 다르게, 전면적으로, 훨씬 더 낫게, 도대체 그전까지는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는가 의아할 정도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휴 결국 무식이 탄로나고 말았다. 많은 질책과 비웃음 바랍니다. 끝.

  1. 여기서는 부득이 학술적으로 옳은 표현인 '부권제'보다는 좀더 친숙하고 전개에 편리한 기존 표현인 가부장제를 사용한다. 죄송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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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2017.05.09 19:43

기도


동굴에 벽화를 새기는 마음으로
담벼락에 오늘 사진을 덧댄다
사냥터 같은 세상에서도
냉수 한 모금의 기쁨은 있었으므로

주여
만일 계시어든
이 하룻밤 우리 다리가
조금은 덜 아프게 해 줍소서

모닥불 앞에서 주술을 외던
제사장 대신
춤을 추는
희벍은 스크린을 쥐고 잔다


9/5/2017, one day before "melbourners" and the new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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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다음 칼럼에 대한 공개서한의 형식을 취합니다. 참고해 주세요: [임마누엘 칼럼] 한국에는 기술보다 과학적 사고가 필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님께.

교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지구의 날을 맞아 응용과학의 겉면만을 피상적으로 즉각적으로 감각적으로 소비하는 행태를 버리고 우리 모두 좀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력을 기르자는 취지의 기고를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부분 동감했습니다. 특히 매체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서 사고력을 사용할 기회를 앗아가는지, 우리가 얼마나 “기술적인 성취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가득차 있으면서 정작 “스마트폰이나, 정부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는지 지적하신 대목이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제안해 주신 내용들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의무적으로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게 하는 교육 관련 법”이 그렇고, “‘주의 지속 시간’”이라는 개념이 그렇고 “젊은이들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조치”가 특히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교수님께서 개탄하신 현 상황을 고치는 방법이 이러한 외부적이고 개별적인 조치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이런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런 조치들을 해 봤기 때문입니다.

대략 2년쯤 전에 ‘스마트 보안관’이라는 앱이 소개되었습니다. 한국방송통신위원회가 오랜 시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하고 설치를 강권한 애플리케이션이지요. 목적은 명백했습니다. 청소년 스마트폰 중독 완화와 부적절한 정보로부터의 청소년 보호. 기능도 계획상으로는 훌륭했습니다. 이제 적어도 청소년들은 비디오 게임을 줄이고 “정책이나 경제에 대한 글”을 조금이라도 더 읽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스마트 보안관이라는 검색어의 연관키워드는 ‘뚫기’가 되었고 애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이것을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결국 사업은 순식간에 백지화되고 맙니다.

의무적으로 어려운 글을 읽도록 장려하는 문해력 향상 프로그램은 어떨까요? 글쎄요, 교수님의 글을 소개한 중앙일보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에 따르면 “이렇게 또 수능 비문학 지문이 어려워집니다…ㅠㅠ” 그리고 교수님이 제안하신 교육 관련 법의 한국적 결과에 대해 이 댓글보다 정확하게 내다보는 분석은 달리 더 나오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정말로 그래 왔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기성세대에게 책임이 있는 허물과 폐습을, 다가오는 신세대가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해 왔습니다. 나쁜 것은 어른이지만 앞으로 잘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었죠. 이는 거의 미신적 전통이라 할 만한 불합리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논의의 범주를 벗어나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제 제 요지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게으르거나,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인내력이 없다거나 해서 과학적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지요.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부지런하고, 세상은 그들의 관심을 지나치게 요구하며, 그래서 그들은 만사에 초인적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는 많은 정신적 자질 중 과학적 사고를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사고력의 ‘trade-off’가 일어난 것이죠.

기왕 경제 용어를 썼으니 조금 더 알은체를 해 보겠습니다. 비용과 효용 모델을 도입해서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한국인들에게 있어 과학적 사고를 관철할 때 얻는 효용은 비용에 비해 턱없이 모자랍니다. 혹시 “설명충”이라는 인칭명사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구태여 답하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참고할 수도 있을 사실관계를 굳이 전재(轉載)해 오는 봉사자들에게는 이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열심히 검색하고 책 찾아서 뭔가를 써 올리는 비용에 비해 돌아오는 효용이 절망적이니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한때 자신의 자존감을 ‘스피드왜건’으로 내세우던 설명 봉사자들은, 순식간에 온라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미디어의 행태도 그렇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미디어가 사안에 대해 일어나야 할 반응과 감정을 그들이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 모든 걸 끼워맞춘다고 하셨지요. 타당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시청률이며 접속자 수 따위의 얼마 안 되고 일회적인 수치 때문에 휘둘리는 바보스러운 작태라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안은 이미 알려져 있고 이해 가능하며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 대단히 지겹고 반복적인 구태의연함의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구태의연한 것을 각개 사안별로 가설 세워 검증하고 꼼꼼히 복기하는 것은 과연 비용 대비 효용을 얼마나 보상하는 일일까요? 한국인들은 그런 일에 머리를 낭비할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바보스럽게 모든 것을 정해진 틀에 끼워맞춘 다음 편도체가 시키는 대로 반응하겠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지금 우리가 실제로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차갑고 차분하게 다시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실제 삶이 어떤가 하면, 바보스럽고 구시대적이며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가득 꽉꽉 들어차 있는 삶이라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교수님의 조국에서 주로 나오던 정치 경제 이슈가 무엇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제가 지난 20여년간 보아 온 이 나라에서 정치 이슈의 절대 다수는 “제발 뇌물 받지 마라”였고 경제 이슈의 대부분은 “제발 돈벌이로 사람 죽이지 마라”였습니다. 단언하건대 이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합니다. 이제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에 과학적 사고가 필요합니까, 아니면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법치 질서가 더 긴요합니까?

심지어 정치와 경제를 벗어난 생활 전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속성장 산업화 시대의 생활 양식이 아직도 먹히는 줄 알고, 혹은 그 다음 단계의 사회에 대한 각오가 총체적으로 미흡해 있어서, 아무튼 여러 이유로 ‘지금껏 살아온 대로’ 꾸역꾸역 살고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지만 각자의 사업체는 지금껏 해온 대로 성장해야 하며, 그래서 우리 각자는 추가 근무와 더 적은 행복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이 근본적 불행 양산 체계를 해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한강 다리로, 스마트폰으로 도피를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사고력은 터무니없이 값비싼 것입니다. 아카데미 수강료, 순수문학이나 기초학술 분야의 책, 문사철 전공수업 등은 그 돈을 내고 내 것으로 만들기엔 어디 가서 쓸 데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인문학의 위기”, “기초과학 홀대” 운운의 지엽적인 몇몇 용어로 묶여서 이 사회 전체의 병폐와 별 관련 없다는 식으로 분리시키는 행태조차도 불만족스럽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력이 없는 게 아니라, 과학적 사고력을 사용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비용 때문에 그걸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설명충 소리나 들을 게 뻔한데 팩트체크는 왜 하며, 아무나 한 명 지목해서 화내고 넘어가면 그만인 뉴스를 무슨 유난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피곤해 죽겠는데 어떻게 주말에 책을 펴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을 때, 오히려 열심히 사고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좀더 낫게 만들어준다는 확신이 설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가 과학자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네티즌 수사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 그러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 그러했고 각종 게이트가 터졌을 때 그랬습니다. 그 사안들은 조금 덜 지겨웠고, 약간의 새로운 설명이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이 지겹디지겨운 사회가 조금은 변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죠. 이제 제 요지가 분명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이 모든 행태는 철저하게 경제학적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경제학적으로는 언제나 합리적이었다는 뜻이죠.

친애하는 교수님께, 이 모든 의견에 찬동하여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사안이, 이 병폐가, 이 추한 사회가 교수님의 기고문 속 전제들처럼 단순하고 한심스럽고 직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과학적 사고는 뇌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뇌에 더하여 과학적 사고가 가능한 ‘토양’까지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모든 국민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반나절 정도는 아주 딴생각을 하고 살아도 좋다는 보장이라든가, 정부 혹 기업체가 성장과 결과 위주의 방침에서 벗어나 좀 다른 걸 목표하기 시작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죠. 그렇게 과학적 사고력에 대한 비용이 할인되고 효용이 오르면, 한국인들은 얼마든지 과학적 사고력을 구입하고 유통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저를 가장 슬프게 하며, 저로 하여금 교수님의 기고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게 합니다.

부족한 졸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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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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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샤나즈
    2017.04.24 22:2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내용과 크게 관계는 없는 말이지만, application은 강세가 a 쪽에 오기 때문에 발음이 '어'가 아닌 '애'가 되어 애플리케이션이 됩니다..!
    • 2017.04.25 21:5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말씀해 주신 transcription의 건 확인하였고 적극 수용하며 반영하겠습니다..!

0.

이 글은 다음 팀블로그 게시물에 대한 첨언 내지 주제 넘은 오지랖이다.
[아무키 대잔치-트럼프①] 정치는 도덕이 아니다. 선악도 아니다. (이찬우의 엔터 더 보이드 @ 팀 블로그 아무키)


1.

물어보니, 이 글의 필자는 사람들이 안희정을 지나치게 싫어하는 상황이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트럼프(의 지지자)를 극렬하게 싫어하고 꺼리는 장면 역시 낯설다고 했다. 그래서 쓴 글이라는 취지다.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그러면 차라리 제목을 '안희정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같은 걸로 저돌적으로 뽑고 전개에서 '미국 같은 극단적 사회로 나가고 싶은 거냐, 토론 좀 하자' 하는 쪽으로 가면 어떠니" 했는데, 말만 알겠다 하고 그만이었다.

그리고 ppss에 이 글이 팔리자마자 가차 없이 달려온 베댓 두 개가 이런 류의 논지의 구멍을 완벽하게 가리켜 주어서 달리 더 붙일 말이 없다. "전제가 틀렸습니다. 우린 지금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을 하고 있는 거에요." "누가 보면 우리가 배제해서 일베 생긴 줄 알겠네."


2.

전제 얘기가 나온 김에 몇 개 전제를 정돈하고 지나가자. 한국의 진보-보수는 형식적으로 지나치게 경도되고 내용적으로 비표준적인 것이 사실이다. 냉철하게 분석하면 '자유주의 정당'이 되는 민주당과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언론' 정도로 분류 가능한 한겨레가 각각 "대중 진보정당"과 "빨갱이 신문"으로 불리고 있고, 사실상 민족주의적 세미파시즘에 가까운 것이 "애국보수"로 참칭되고 있으며, 중간적 진보라 부를 만한 플레이어는 별로 없고, 있느니 저 왼쪽 내지 아래쪽(어딘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사용하는 비유)으로 가고 있는 극소수 좌파가 있다. 자세한 건 김규항 선생께 여쭤보자.

아무튼, 그런가 하면, 누구의 워딩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흥미롭게도 적절하게, '상식'과 '비상식'의 이념 대립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것은 현실정치의 층위가 아니라 정치학, 정치철학의 차원일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대단히 영향을 끼치는 감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저런 말(생각)을 할 수가 있나", "사람이 저러고도 부끄럽지가 않을까", "자기 친족이 당해도 저럴까"로 대표되는 상식의 진영이 있고,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파렴치의 진영이 있어 그들을 상식 진영에서는 몰상식, 비상식이라 부른다.

여기서 이 글의 진짜 핵심 문제 그리고 원본글에 대한 나의 오지랖의 핵심 논제를 꺼내 본다. 자기를 상식의 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있는데, 자기를 비상식의 편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3.

힐러리 진영이라고 쉽게 부르자면, 그들이 트럼프 진영을 대차게 까고 조롱하며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상식의 편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설마 사람이 이걸 모르려고? 아니 어떻게 "자박꼼"(내게 전권이 있다면 그의 막말 'grab by one's pussy'는 이렇게 번역시킬 것이다)을 입으로 내뱉을 수가 있지? 국경에 장벽이라니 저 사람 미쳤어?

그런데 그게 정말 그야말로 몰상식이었다면, 그걸 듣는 이들, 그걸 말하는 이들, 그걸 말하는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사람으로써 과연 얼굴을 들고 눈을 뜨고 그걸 기억이나 하려고 했을까? 정말 몰상식한 일은 그렇게까지 화제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깊은 밤 지하철이나 버스 좌석에 앉은 채로 구토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듯이. 하지만 트럼프는 주목되었고 논의되었으며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환영을 받았다. 이 현상의 성립 자체를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혹시 없는가?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간단하다. 트럼프가 누군가에게는 몹시도 상식이었다는 점이다. 그게 진보든 보수든 파시즘이든 뭐든 그건 정말 아무래도 좋고, 상식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리버럴에게 공격받아서 더욱더 트럼프의 세계로 몰두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상식을 몰상식으로 공격받다 못해 비빌 언덕을 찾다 보니, 자기가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선에서 가장 강력한 무엇을 찾은 것뿐이다. 아무 내용도 없는 구호 "다시 위대한 미국을"이란 바로 단 하나 이 심정을 성문화한 것이다.
윗글에서 인용해 온 뉴욕타임즈조차도 이 층위까지는 다루지 않았지만(적절한 처사였다, 이런 뇌피셜 잡소리보다는 물증이 있으니), 나는 이 차원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뭐 트럼프나 힐러리를 공약 하나 발언 하나 논란 하나 일일이 팩트 체크해 가면서 지지하고 반대할 턱이 있나? 하물며 실질 문맹률 얘기가 나오는 이 나라에서는 더군다나.

그래서, 나는 윗글이 그런 차원을 좀더 말해주기를 바랬다. 이건 좌우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상식 클러스터(다발)의 조우(encounter)고 충돌이라는 점을 말이다. 어떤 상식 다발은 주목되고 논의되고 발언권을 얻을 기회를 못 얻었고(원글에서는 그걸 "배제"라고 불렀다), 그러니 일베도 탄생하고 뭐도 탄생하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한국에서 엄청나게 모호하고 틀리게 사용되고 있는 '진보', '보수'의 워딩에 넣어 버리니, 페이스북 댓글 두 개와 맞다이를 뜨는 초라한 행색이 됐다.


4.

자 그러면 상식 다발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여기서부터는 내 패를 꺼내야겠지. 그러면 지금 유효하게 작동하는 정치철학 및 사회이념 대립각은 구체적으로 무엇 대 무엇으로 갈라서고 있는가? 제목에 쓴 이상한 단어들을 여기서 드디어 꺼낸다. '논리적 이득'이라는 상식의 세계와 '인간적 숭고'라는 상식의 세계가, 일단 이 나라에서는, 지독하게 부딪혀 피 튀기는 중이다.

논리적 이득이라는 가치 체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우리에게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응당 논리적 계산을 통해 가장 공리주의적으로 선한 선택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배운 인간의 덕목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이 뭔가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 논리와 계산과 선택의 과정에서 '개이득'을 보는 것이다.

인간적 숭고라는 가치 체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사람다운 사람이기를 요구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응당 인본 도덕과 사회의 정의를 이해하고 깨우쳐 모든 선택과 행동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떳떳한 인간의 덕목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이 뭔가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바로 그 떳떳함, 쪽팔리지 않음, 요컨대 숭고하고 멋진 삶 자체인 것이다.

무기질적으로 병치해 놓고 보니 뭐 둘 다 뭐 아주 이상하거나 괴랄하지는 않지 않나? 하지만 우습게도, 이게 한국 정치경제 이념의 대립각의 기반이 되는 순간부터는 이런 가치 체계가 서로에게 정말 괴이하고 끔찍하게 보인다. 한쪽은 다른 쪽이 "보상금 받았으면 조용히 계시고 순수한 유가족 아니면 빠져라" 운운하는 벌레로 보이고, 한쪽은 다른 쪽이 빨갱이 선전선동에 놀아나서 '우덜식 ~주의'에 빠져 사람 쥐어패는 참교육이나 시전하는 "씹선비"로 보이는 것이다.


5.

사실 사람이 좌뇌가 있는가 하면 우뇌도 있어서, 이 둘 중 한 쪽 가치체계만을 이해하고 살아가기란 쉽지도 않으며 올바르지도 않다. 그리고 뻔하나마 굳이 언급하자면, 딱 이 두 가지 상식 다발만이 성립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상식의 연쇄들이 상호 연관하며 가치체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가치체계가 더 다채롭게 구성될수록 다원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개이득을 찾으며 논리적 실속을 찾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졸렬한 소인배가 되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거칠게 사례를 들자면, 일베 유저들 중에 어디 후원금 내거나 무슨 활동을 착실하게 하는 사람도 많고, 오유인들 중에도 악덕 알바생이나 "꽃뱀"(!!!)에게 당할 뻔해 혼났다는 사람도 꽤 있잖나. 평범한 사회적 존재들은 다들 으레 그렇게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상식의 세계를 구성하고 거기 맞춰서 살아간다. 자기의 상식이 세상의 상식과 좀더 많이 겹치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모두가 점점 익명화되어가는 요즈음에 특히 더 두드러지는 바, 더 많은 사람들이 몇몇 특정한 상식적 발상들만을 지나치게 선택하여 기능적이고 불완전한 인격을 형성한 채 전적으로 횡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자 이 타이밍에 내가 혹시 여러분께 예를 들어 Social Justice Warrior나 "넷페미"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시냐고 물으면 어떨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다면, 답하지 않아도 좋다.


6.

나는 사람들이 자기의 상식 다발의 명세를 좀 스스로 알았으면 좋겠다. 아 나는 무엇은 옳다고 믿고 무엇은 안 된다고 믿는구나. 아 내가 지지하는 것은 전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는구나. 아 이러이러한 생각은 입 밖에 꺼내면 안 되는 거구나.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몇몇 선진 사회가 수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훈련시킨 토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윗글에서도 잘 말했듯이 우리에게도 그게 필요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다. 그걸 가질 시간과 차비와 여유와 사고력이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은 '좌표'뿐이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LTE의 속도로 욘나게 달려와 나의 불쾌한 인지부조화를 해소해 줄 준비가 돼 있는 선택적 정보들만이 온 사방에 가득 둘러쳐져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가장 유약하고 우스운 것은 평화 협정 제안이다. "당신의 생각을 상식의 한 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어요!"라는 시그널, 그것처럼 모두에게 코웃음을 살 만한 행태는 없을 듯하다.

나는 여기서 멸망의 유황불 냄새를 맡고 있다. 다음 토론이란 영영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애초에 사람들이 뭐에 대해 뭘 생각하는 누가 나와 어떻게 토론해야 되는지조차 몰라서 온라인에서 하던 행태 그대로를 오프라인에 옮겨 놓으리라는 예상, 모두의 상식이 모두의 그럴싸한 논리로 정당화될 수 있기에 오히려 더더욱 모두가 모두의 비상식에 찔리고 다쳐 으르렁거리는 광경, 뭐 그런 것들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원글의 술에 물 탄 듯한 결문 주장이 그토록 싱겁다.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난 지금 한 집안이 갈라져서 서로 맞서는 남북전쟁 같은 꼴을 보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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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농담으로 써먹던 레파토리. 이 나라 돈은 다 어디로 갔느냐? 크게 3군데, 부동산에 묶여 있고 주식에 묶여 있고 4대강에 쏟아져 있다.
이 소릴 하면 너도 나도 그저 잘 웃었다. 굉장히 과장한 일반론이거든.

근데 최순실 스캔들 이후로는 이게 죄다 실상인 것으로 드러나 버려서, 이 소릴 생각할 적마다 다만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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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없던 7년간의 언론





7년 그들이 없는 언론 포스터드디어 개봉한다. 7년 그들이 없는 언론



새삼 끔찍한 계절이었지 싶다. 7년 전이면 2010년인데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니다. 이명박근혜라는 워딩 말곤 쓸 게 없는 잃어버린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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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개편 좀 하고 가실게요


요즘 내껄 너무 안한다 싶어서 한번 해봄. 아닌게아니라 종편가시내들은 초기 디자인이 너무 구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네모토끼 페이지에 자극받아서 업데이트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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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25를 순전히 도시락 때문에 간다.

학교에 편의점이 GS25밖에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김혜자의 MOM 도시락 브랜드가 런칭되기 전에도 GS25는 원래 도시락을 잘 하는 업체였다. 내가 ‘아 이제 가급적 GS25로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무렵, 편의점 도시락은 대체로 2500~3500원 선이었다. 싸게 먹으면 2800원, 큰맘먹고 좋은 것 집으면 3500원, 혹은 싼 것에 음료수 할인구매를 붙여서 3700원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GS25의 ‘갓혜자’ 도시락들은 전부 3000원이 넘는다.

개인적으로 이 어찌된 귀신 곡할 노릇인지 지금도 그 영문을 모른다. 도시락 하나를 삼천 원 넘게 받고 주는 게 무슨 ‘갓혜자’인가? 누구 말마따나 어디 가서 밥버거 두 개를 배부르게 먹을 돈일 뿐더러, 삼각김밥 3개를 사도, 아직은, 삼천 원이 넘지 않는다. 그런데 부르기로는 여전히, 도시락 하나가 3000원에 좀더 푸짐해졌다는 이유로 ‘혜자스럽다’라는 말을 만들던 그 시절의 감각 그대로, “갓(god)혜자 상품”이라 부르고 있다.

아니, 사실은 무슨 영문인지 잘 안다. 사실은 이것 비슷한 사태가 나라처럼 생긴 이 지옥 반도 사방에서 가열차게 일어나는 중이다. 지금 우리는 공급자에게서, 기업에게서, 자본에게서 상품과 서비스와 인간적 규모의 합리성을 구하지 않는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둘러보면, 도대체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들에게 구하고 있는 것은 ‘은혜’다. 그것도, 거의 자선에 가까운 은혜.

잠시 은혜라는 개념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독교적 용어의 은혜란, 창조주적 존재가 피조물적 존재에게 별 이유 없이 베푸는 호의 또는 그 결과의 소득을 의미한다. 두 가지 핵심은 영향력 관계의 절대적 일방성, 그리고 타당성 확인 없이 임의적으로 (arbitrarily) 주어진다는 점이다. ‘선물’에 자주 비유되는데, 그러므로 받는 쪽은 주는 쪽에게 원칙적으로 요구를 할 수 없으며, 주는 쪽의 호의에 감사하는 것이 받는 쪽의 할 일이고, 주어지지 않거나 다소 엉뚱해 보이게 주어지더라도 혼자 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은혜 관련 교리의 핵심이다.

이 교리는 그야말로 교리, 신앙, 종교의 차원이기에 성립한다. 다시 말하자면, 영향력 관계가 절대적으로 일방적이기 때문에 그 선물은 ‘은혜’가 되는 것이며, 그 선물을 주는 이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로, 우리는 토기장이의 손 안의 진흙으로 인정된다. 일상적 차원의 ‘선물’이 은혜와는 엄연히 실천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선물이란 때로는 받는 쪽으로부터 요구되기도 하고, 주는 쪽이 일종의 책무를 가지는 경우가 상황 맥락에 따라 있을 수도 있잖은가. 그것은 사람 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감히 사람이 베풀 수 없어 보이는 크나큰 호의가 베풀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은총은 은혜의 다른 말이다.)

이 시점에서 잠시 편의점 도시락이란 게 뭔가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편의점 도시락을 GS25로부터 선물받는가?

아니. 돈 주고 산다. 바싹불고기도시락을 진열장에서 꺼내서 계산대에 올려놓을 때, 누구도 ‘구하옵나니 제게 이것을 내려 주옵소서’ 빌지 않으며, 바코드가 두어 번 찍힌 다음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질문을 받았을 때 황송해하는 사람은 없다. 내 돈 주고 내가 사 먹는데 무슨 놈의 선물이야? 우리는 오히려 포장지에 쬐끄맣게 붙어 있는 “음료 무료 제공” 광고를 귀신같이 확인하고 “이거 사면 OOO 주시죠? OO맛 있어요?” 너무나 당당하게 묻는다. 굳이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그 당연함을 조금 벗겨내자. 우리의 구매 행위는 단 한 번도 선물을 받거나 은혜를 입는 과정이었던 적이 없다. 거기에는 지불, 제공, 그리고 그 거래 바깥의 사회적 합의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요소만이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왜 값싼 도시락을 파는 (것으로 선전되는) 이를 일종의 ‘신(god)’으로, 그 도시락을 은혜로 받아들이는가? 뭐 간단하다. 돈이 신이거든.

굳이 물신(物神, mammon)이 뭔지를 백과사전 뒤져서 설명할 것도 없다. 그 설명들은 밥값 몇천 원과 보증금 몇천만 원을 겪어 보지 못한 형이상학적 서술이기 때문에 별로 설명력이 없다. 물신은, 배금주의나 수전노적 행태의 숭배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허구적으로 부여받은 신적 권위를 실제적으로 행사하는 가치 저장 체제라는 차원에서 신이라 불릴 따름이다. 초고도로 발달한 신고전적 시장 경제 체제에서, 이 허구적 권위는 정말 그럴듯하게 부여된다.

돈님께옵서는 자기의 권능을 내보일 때는 저 멀리 무슨 기업의 시가총액이나 강남 어디의 전세집 같은 곳에서 자신을 한없이 높여 감히 사람이 거역치 못할 온갖 위력을 떨치다가도, 가끔은 낮고 천한 편의점 같은 곳에 임하셔서 우리의 몇천 원 푼돈의 노력으로도 한 끼 밥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신다. 개념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지만, 큰 의미에서 보면 물신이 관통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같은 상황이다. 적어도,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는 점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무력하다. 백날 모으는 ‘포인트’가 티끌 모아 티끌인 것도 문제지만, 돈님의 진노 앞에 우리는 하룻밤 들꽃처럼 시들어 버릴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는, 돈님께서 그 은총을 거두시면 누구나 즉시 춥고 배고프고 정처 없는 신세가 된다. 도시가스 민영화에 따른 가격 합리화! 프리미엄 건강 혜리 도시락 4900원! 사람 세 명 누울 월세방 하나가 1000에 70! 정말이다! 모세가 노래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잘 모르겠지만, 당장 우리가 돈을 우리 통장에 모시지 않으면 무슨 참혹한 형벌이 주어질지는 넘나 명백한 것!

그리고 이 와중에 굳이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돈을 써야 쌓아서 쓸 수 있는 ‘포인트’는, 그리고 “합리적 소비”니 “절약”이니 하는 것은, 사실 모두 그저 ‘노오력’ 환원주의의 결과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하등 다를 바 없으며, 그러므로 아무 희망도 대책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논의하지 말자. (절대로 방금 GS POINT로 펩시 하나 사먹고 왔더니 포인트가 확 줄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뭘 논의해야 하느냐고? 뭐긴 뭐야, 우리가 “갓혜자”로부터 은혜 대신 사회적으로 정당한 거래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를 논의해야지. 다시 말하자면, 물신을 거꾸러뜨려 돈이 단지 돈이기만 하도록 만들 방안을 찾아야지.

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달리 말하자면, 시장 가격이 오르내린다는 이유로 그 대상 상품의 실제 가치가 쉽게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도록 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다.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도시락 하나가 몇십만 원을 호가할 이유는 하늘땅별땅 요만큼도 없다. 도시락에 금가루 뿌리고 영양제 섞으면, 한 사람 한 끼 밥이라는 본질이 갑자기 확 달라지는가? 그래서, 일반론의 차원에서야 천부당만부당하지만, 본질적 효용 총량의 jump가 일어나지 않는 일부 상품에 대해서는 최고가격제가 유효하다고 믿는다. 예컨대 도시락이 그렇고, 고위급 임원들의 연봉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규제는→나쁘다’의 공식만을 가히 전체주의적으로 떠받들어 왔고, 그 덕분에 지난 몇십 년간 겉으로는 모두가 돈을 많이 벌게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생산-소비된 상품과 서비스들의 본질적 효용 총량에 비해 그 금액이 물신의 권능에 의해 굉장히 부풀려졌음에 틀림없다는 점에서, 결국 언젠가 꺼질 크나큰 거품이다. 그리고 이 버블샤워 속에서 누구도 “야 이건 아무리 그래도 다들 너무 비싸”, “왜 싸게 팔아주는 게 고마울 일이야? 전체적으로 깎아야 한다니까?”를 말하지 못한다. 뭐, 누굴 탓하기는 어렵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고 싶은 것뿐이고, 우리는 300원 더 오른 것 때문에 밥을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통제권을 가져와야 한다. 우리가 통제권을 가졌다는 사실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은혜를 입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통제를 받는 시장이어야 한다.

정말이지 모든 게 이런 식이다. 건물주가 1층에 값싼 카페를 취미생활로 운영하는 것을, 결국 공간주가 계획한 이용 방식대로 낼 돈 다 내 가면서 쓰는 공간인데 ‘누구나 오셔서 자유롭게 어울리는 복합 문화공간’ 운운 생색 내는 것을 최근 들어 좀 지나치게 자주 목격하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낀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작동시킬 거라고 믿었지만, 그 이상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결과 우리가 얻은 것은 “갓혜자”다. 모든 게 시혜이고 은혜가 됐다. 저녁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우리는 각종 가격 결정자들이, 석유 공급자들이, 부동산 소유주들이 착한 마음을 계속 가져 주기를 기도하며 조마조마 살아가는데, 맨큐는 우리가 합리적 경제인입네 수요가 감소하면 가격이 하락합네 물정 없는 소리를 한다.

많이는 바라지 않고, 일단은 갓혜자가 없이도 걱정 없이 도시락 한 끼를 먹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핵심은 갓혜자가 없다는 데 있다. 편의점 도시락은 ‘혜자의 MOM’ 브랜드이기 때문에 값싸서는 안 되며, 지불 용의가 5천 원이 넘지 않는 배고픈 사람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값싸야 한다. 차라리 반찬 수를 줄일지언정 말이다. (양을 늘려주는 대신 가격을 올려 받는 것도 실제 소비자 입장에서는 사실 굉장히 위선적이라고 느낀다. 아 ㅅㅂ 그니까 양은 됐고 액수나 좀 맞추자고! 내가 정말 양이 부족해서 이러는 거면 두 끼 값을 모아다가 9900 고기뷔페를 가서 한번에 찢어지게 처먹겠지 여길 오겠냐 이 개자식들아!)

생각나는 방안이 최고가격제 뿐이긴 한데, 말고도 더 있을 것이다. 아무튼지간에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하니 모두가 우려하던 대로 자본의 신격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는 무산자들이 자본으로부터 일방적이고 임의적인 신적 은혜를 구하게 된 지금의 상황인데, 그 단적인 사례가 ‘GS25 god혜자 도시락’인 것이다. 우리 이거보다는 좀 덜 상스럽게, 쪼끔만 더 성스럽게 살면 안 될까? 일단 김혜자 선생님 당사자 입장에서, 모두가 자기 이름 앞에 ‘god’을 붙여 부르면서 도시락이나 깨작거리는 꼴이 얼마나 씁쓸하고 부담스러우시겠느냐 말이다. 진열대에 뻔뻔스럽게 자화자찬하듯 붙어 있는 “갓혜자, 다 아시잖아요” 공식 POP를 보고 있는 내가 이다지도 거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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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의 “여혐” 이력을 이야기해야겠다.

한창 논술 실력이 인문계 대입을 좌우한다고 난리를 치던 고3 때였다. 학교에서 단체로 인하대인지 어딘지로 모의논술 시험을 보냈다. 시험 문제를 딱 받아봤는데, 결국 엄청나게 스트레이트한 질문 하나였다. “교사임용시험에서 여성들에게 가산점을 줘야 하는가?”

고딩의 눈으로 보기에도 출제의도가 뻔한 것이었다. 순순히 “아 네 그럼요 당근이죠”라고 써냈다간 0점을 받을 판이었다. 왠지 다들 그렇게 적고 있을 게 너무 뻔하게 보였고. 그래서 다른 생각을 적었다.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남성들에게 역차별이 될 수 있다, 교사라는 직군에서는 여성이 더 많고 다수이기 때문이다, 운운.

그리고 그 답안은 그 모의시험 전체 1등 답안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소문이라서, 진위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 요즘 말로 “여혐”을 해서 이득을 취한 이력이다.


여성혐오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잘못 던진 질문에 알맞은 답이 안 돌아오듯, 여성혐오라는 잘못된 워딩 때문에 ‘난 여성혐오 안하는데’ 따위 무의미한 리액션이 되돌아온다고 본다. 혐오라, 과연 여자(여성) 그 자체를 음식물 쓰레기나 썩은 고양이 시체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남성들이 점차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정적 감정,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들이 선호의 차원이 아닐 거라는 말이다. 그 반대말이 “여성사랑” 같은 게 돼 버리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라는 표현은 “된장녀” 비난과 “개념녀” 칭송의 이중적 행태를 아울러 설명하지 못한다. 장동민 같은 인간 말종에게, 기타 숱한 김치남들에게 어떻게 애인이 애인이 있는지 역시 ‘혐오’의 차원에서만 보면 설명되기 어렵다. 코르셋론이 빙빙 맴도는 이유는, “난 코르셋이 좋아, 허리 날씬해지고 싶어”와 “코르셋은 나빠, 넌 건강을 해치고 있어”가 접점 없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여성에의 억압이다.

억압의 차원에서 된장녀-개념녀 드립을 살펴보면, 된장녀 비난은 개념녀를 더욱 억압하는, 개념녀 찬탄은 된장녀가 되지 말라고 억압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장동민의 애인 역시, 그 남자의 미개하리만치 전근대적인 억압적 여성관이 승인하고 허용한 여성으로서, 그러므로 이 여성관이 존속 가능하다는 피동적 증명 수단으로 존재하지, ‘나비’라는 한 개인으로서 누군가의 애인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장동민은 비로소 위자료만 받아가는 이혼녀를 개그 무대에서 비꼴 수 있다—그의 여자는 이혼녀이기는커녕 세상에 둘도 없는 예쁜이이므로!

요컨대 혐오하는 방식은 한 가지일지언정 억압하는 방법은 두 가지일 수 있다. 말 잘 들으면 칭찬해 주고, 말 안 들으면 때리는 거다. 비슷하게, 최근 몇 년간 특정 여자 연예인들이 “여신”으로 떠받들리는 것도 실은 칭찬하는 억압이고 그런 의미에서 “여성혐오”의 한 축이다. 나는, 설현이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별개로, 설현이 절대적 추앙을 받는 작태가 그런 차원에서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예쁨받기 합당한 여자가 설현 정도밖에 없다니 이 무슨 집단 이지메인가?

억압이 혐오만을 이용한다면 지속할 수 없는 아수라의 군상은, 그것이 칭찬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개그맨들의 “여혐 개그”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조립 생산된다. 웃긴 분장을 하고 소리를 빽 지르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냥 웃긴 법이다. 그 내용에 농담 명목의 실질적 여성억압을 넣고 소리를 빽 지르면 뭐가 돌아올까? 일단 터진 웃음과 “난 장동민 웃기고 좋은데? 진지충들​​” 하는 쉴드가 돌아온다. 그렇게 억압 행위가 칭찬을 받으면, 왠지 또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엄청나게 정당해 보이거든.

나만 봐도 그렇다. 모두가 YES 할 때 혼자 NO를 외치면 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 득볼 수 있다는 게 제도적으로 보장을 받으니, 봐라, 대놓고 역차별이 어쩌니 괴상하게 조립된 논리로 비열한 여혐을 서슴지 않았잖나.


억압은 자동적, 피동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대항은 수동적, 능동적이어야 한다.


참 묘하지? 말 몇 마디가 사람을 옥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여길 벗어나지 마,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게 뭐라고 처음엔 괜히 신경이 쓰이고, 그 다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점점 ‘아 내가 뭘 잘못했나보다’ 느끼게 만든다. 그러다가 잠시 후엔 자기가 자기도 느끼지 못할 만큼 새삼스럽게 이 억압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래, 여길 벗어나면 안 돼, 누가 그러던데.

인스타그램 속 설리가 각광받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누가 그랬는데, 좆까 정신이라고. 실로 그렇다. 그러면 안 된다, 동생 같아서 그러는데 결혼 어쩌려고 그러냐 따위의 내면화된 억압 앞에 “읭? 왜안됨? 니들 븅신” 픽 비웃고 더 자기답고 싶은 사진을 공중에 뿌린다. 굉장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그럴 테지, ‘설리가진리’니까, 누가 뭐라고 압박을 주건 말건 스스로 직접 온전히 자기이고 있으니까. 장동민의 (레알)여혐 발언에서 파생된 구호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고. 딱 그대로 억압의 방향과 정반대로 뻗는, manually active한 해방 투쟁 방식 말이다.


이것은 통제, 억압, 소유, 승인, 기득권, 그러므로 제도의 문제이다. ‘혐오’라는 워딩이 불안한 이유다. ‘억압’ 내지 ‘통제’라고, 사태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어 말할 필요가 있다.

“날 혐오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날 사랑해 주세요”가 된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김치남들이 만들어낸 허수아비가 바로 ‘메퇘지’인 것이다. 더 쨍하게 말하자. “날 억압하지 마세요”, “날 통제하지 마세요”라고 말하자. 이건 달리 말하면 “당신이 어떤 종류의 나를 원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나답다는 이유로 당신에게서 무슨 허락이나 비난을 받을 이유는 하등 없으니,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세요”가 되니까. 훨씬 정확하고 명쾌하지 않은가?

어떤 인간도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억압하지 않으시므로. 어떤 여자도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여자는 인간이므로. 어떤 여자도 혐오되어서는 안 된다. 혐오는 억압의 한 형태이므로. 그러나 어떤 여자도 어떤 몇몇 이유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추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여성 억압을 승인하고 공고히 하는 주요한 메커니즘의 하나이므로.


하루라도 좋으니까 좀 사람이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때 논술 선생이 ‘우리 학교에서 인하대 모의논술 전체1등이 나왔다’ 떠들고 다니던 게 그렇게 부끄러웠던 이유에 대해, 나조차도 이제야 좀 생각이 드는 마당이다. 갈 길이 멀고 밤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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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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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반사

2016.04.04 14:05

1.


일로 만났다가 이래저래 안면을 튼 친구가 그 일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프로페셔널 프리랜서가 되어 다른 일들을 받아서 하더니, 문득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더라.

중복기고한 글들과 글이 모자라 실리지 않게 된 것들까지 포함하면 족히 스물 다섯 개 쯤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도통 쓸모 있는 글을 써내지 못하고 있다. 크게 사랑스러운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 기간 생각하고, 오랜 기간 고민하고, 나름 정제해 내놓은 글들은 읽히지 않거나, 쉽게 무시당한다. (출처)


삶이 피폐하고 워낙 바빠 치이다 보니 자기 삶으로 시작해서 자기 애정을 잘 담아 멋지게 내놓는 글이 쉽게 나오지 않고, “시류에 밀려 큰 고민 없이 금방 금방 써내려가게 된 글들이 '더 많이 팔린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는 거다.



2.


이 친구 심정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음, 다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적어도 프로라고 한다면,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떠밀리듯 이어져서 쓰게 되는 글이 잘 나와야 하고, 그걸 부끄러워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걸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 역시 자기 작업 방식의 일부가 돼야 한다. 내가 요즘 기회만 되면 외치는 ‘척수반사’ 이야기다.


나도 절실하게 느끼는 바다. 매일 적당히 쳐야 할 드립이 있고 충분히 채워야 할 지면이 있다. 달성해야 하는 일정량의 생산성과 내놓아야 하는 최소한의 크리에이티브 기준선이 주어져 있다. 요즘 그걸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면, 나도 못 믿을 정도로 해내고 있다. 정말이지, 반사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3.


콧속이 가려우면 재채기를 한다. 허벅지에 뜨거운 기름이 튀면 벌떡 일어나게 된다. 이걸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고민해서 정제한 다음 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이게 이런 몇 가지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과학 상식 정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척수반사라는 개념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사무실에 앉아 듀얼모니터를 바라보며 소제목을 짓고 변수명을 정하고 회의록을 작성하고 각종 자잘한 일들을 하다가 농담을 치다 보면, 내 뇌가 문득 놀라는 일이 왕왕 있다. 손발이 먼저 어떤 일에 대해 반사적으로 조치를 해 놓은 것을, 뇌가 제정신이 들어서 살펴보고 외치는 거다. ‘야 너 미쳤어?’ 근데 또 결과물을 볼작시면 그리 썩 못나지 않아서, 이성과 뇌가 데꿀멍을 먹기를 반복하고 있다. (최근 점점 심해지고 있다.)



4.


예컨대 빠른년생들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쓴 기사를 고칠 일이 있었다. 흩어진 문단들을 내용별로 모으고 손질하고 소제목을 달고… 하다가, 중간에 넣을 짤방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머리가 했다. 그러고서 그 생각을 머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내 손이랑 사무실 키보드가 막 뭔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모두 빠른년생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뇌가 (그리고 이런 척수반사적 드립을 꿈에도 못 꾸었을 원문 작성자가) 기겁했다. “아니 다 좋은데 너무 과격하자나여;;;” 그 말을 듣고 뇌는 ‘어떡하지’ 생각하고 있는데, 손이 멋대로 위키백과 검색을 하고 있었다. 스티븐 호킹, 앤서니 기든스, 그레고리 맨큐.



5.


돌이켜 생각해 봐도 미친 것 같은 과정이다. 논리의 비약이 너무 많아서 삐약삐약 하고 싶은 심정이다. (봐라, 또 이런 식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량적으로 통제가 안 된다는 거다. 생각을 하고 계산을 해야 견적이 나오고 ‘아 여기쯤에 뭐 넣으면 아귀가 맞는군’ 하는 “통빡”(“와꾸”라고도 한다)이 나오는데, 그게 아니라 원초적이랄지 무개념이랄지 하는 극단적인 직관에 그걸 맡겨버리는 짓이다. 무모한 도박에 불과하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을 바꾸고 있다. 이건 무모한 갬블링이 아니며, 갬블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요컨대, 자기의 직관을 평소에 충분히 갈고닦아 뒀다가, 전문가적 수지타산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멍이 있을 때 그 직관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척수반사’라고 부르고 있는 이 짓도 어떻게 잘 살려 볼 문제일 따름인 것이다.



6.


항상 홈런을 치는 타자는 없다. 항상 탐험대로부터 탈출하는 타잔은 없듯이. (음 이쯤되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사실 사람인 이상 항상 best output이 나와서도 안 된다. 모름지기 개연성(verisimilitude)이란 자연분포를 따르는 묘한 비율의 예외와 부족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기 때문에 뇌의 사용에 한계가 있어서, 항상 베스트를 찍을 수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프로들에게는 항상 the best output 내지는 the second best one이 요구된다. 항상 자기가 맡은 업무 분야에서 최고를 내놓지는 못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훌륭함은 갖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업무분야에 대한 두뇌 사고 이외의 매커니즘, 이를테면 척수반사적인 직관적 드립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중급 이상의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이제는 이걸 할 줄 알아야 한다.



7.


일상툰은 사실 굉장히 심도 깊은 분야라고 한다. 누구나 자기 삶에 재미있던 일 대여섯 가지는 있게 마련이므로 일단 덤벼는 보는데, 어떤 벽에 다다르면 다들 나가떨어진다고. 그 벽은 다름아닌 장기연재의 벽이다. 이제 털어먹을 자기 삶이 없다는 거지.


글쎄, 과연 이 변명이, 생활툰 분야에만 한정한다고 했을 때, 조석이나 스노우캣, 난다, 마조앤새디(심지어 그 이전에 마린블루스도 했던)의 정철연 등등 앞에서도 통할까? 안 통할 거다. 이 사람들이 매주 어느 요일을 채우는 방식은 절대 자기 일상을 열심히 궁리해서 머리로 그리는 게 아니라, 누구는 발로, 누구는 망상으로, 누구는 곁다리 이야기로, 하여튼 각자의 전략으로 돌파해서 머리 바깥의 것으로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 바다. 평생의 공을 들여서 딱 하나의 좋은 것을 내놓는 일, 그까짓 것쯤은 사실 디씨인사이드 아무 갤러리에서나 한 명씩은 다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힛갤로 가겠지. 하지만 그렇게 자기 안에 과포화돼 있어서 못견디고 ‘토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자기 안에 있거나 없거나 재료를 받아다 처리 작업을 해서 완성품으로 ‘제조되는’ 것도 있다.


둘은 완전히 취급 방식이 다르다. 이 사실에 대한 자각과 각오가 얼마나 있느냐, 그게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한 가지 척도일 것이다. 생활툰 도전자들이 자기 생활을 몇번 토해내다가 연재를 중단하는 것과, <마음의 소리>가 연재 1000회를 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9.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힘든 일인 건 사실이다. 말이 25편이지, 하루에 두 꼭지 써도 보름이 넘게 걸리는 분량인 건 사실이니. 그래서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 좀 길게 설명조(아마 실제로는 훈계조)로 써 봤다. 어떤 시점이 되면 프로들은 척수반사로 일을 하게 된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기의 직관과 ‘쪼’ 그리고 인성을 평소에 갈고닦아 놨다가 여차하면 휘두를 수 있으면, 그게 진짜 프로가 아닐까 싶다. 중국사에 남은 어느 시인은 술에 절어 떡이 되어서도 궁중 예악에 필요한 가사를 지어냈다지 않던가.


그러니, 그 친구나 나나 좀 파이팅하자는 얘길 좀 하고 싶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이제 아마추어 시절은 끝났다는 얘기니까. 다만, 이제 업으로, 커리어로, 포트폴리오로 하는 일이라면 지금부터는 조건이 갖춰져야 뭘 해내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같다. 무조건반사에 가까운 창작, 척수반사 같은 크리에이티브, 해 놓고 나서 다시 봤을 때 자기 머리와 보스와 클라이언트가 함께 놀라는 그런 지경, 자기가 어느 정도쯤인지를 아는 그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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