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정동영 씨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손호철 교수가 <한국정치사> 시간에 초빙한 세 정치인 중 두 번째로 온 것이다. 물론 그의 보좌진과 카메라 두 대가 먼저 들어와 있었지만. 그가 말한 내용이 나중에 보니 그의 트위터와 주간경향 인터뷰에 다 실려 있었다. 50분의 강연이 끝났고 질문을 받고 있었다. 사실 질문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순간이 왔다. 그래서, 에잇, 이럴 때 한 번 개겨 보자, 하고 손을 들었다.
철학과 08 김어진입니다. 이건 그냥 지금 생각나서 물어보는 건데, 서민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즘 특히 이 정부 들어서 유난히 국민이 아니라 서민이라는 말을 그렇게 쓰는데...
그가 잠시 벙쪘다. '이거 뭐라고 대답해야 되지?' 싶은 표정이었다. 대답을 주워섬겼다. 군사독재 시절에 나온 용언데, 서민이 영어로 뭐냐고... 나도 모르고 그도 몰랐다. '인민', '국민' 이야기가 우물쭈물 나오다가 결국 11학번 모 학우의 신변잡기 질문으로 넘어가고 강연은 끝났다. 이후 사인회와 촬영회 이후 손 교수님과 정동영 씨, 나, 학우 몇 분이 마지막에 남아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도 서민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일이 없다 한다. "좋은 질문이었어요." 글쎄, 잘 모르겠다. 손 교수님은 영어로는 'pled(맞나?)'라고 부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일반대중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글쎄, 나는 이 '서민'이란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첫 번째 정치인을 지지해 볼 생각이다. 이 단어는 '빨갱이'라는 용어의 시대가 끝나가는 이때 등장한 바 오늘날의 계급 구분선이다. 향후 10년간 우리는 이 단어로부터 뿌리내리는 거대 담론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게 맞다면 서민이란 일본에서 들어온 용어다. '서얼 출신' 할 때의 '서(庶)'자를 쓴다. 바로 그 어감이다. 적통이 아닌 것, 불쌍한 것, 거둬들여야 하고 보살펴야 하고 삶과 살림이 모자라는 누군가에게 이 '무리 서'자를 붙여 부른다. 대체 누가 서민이야? 니가 뭔데 날 서민이라고 불러? 왜, 내가 전셋방에 살고 울 아버지가 타일시공 노무자고 내가 몇천만 원 학자금 대출 받으니까 내가 서민이냐? 난 한 번도 서민이었던 적 없다. 학생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돼서, 사람이었다가, 국민이었다가 프롤레타리아트였다가 웹폰트 디자이너였다가 현역 군인이었다가 개인이 되긴 했는데, 서민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단 말이다. 사전을 찾아 보니 벼슬이 없는 일반인을 서민이라 부른단다. 아 그렇구나? 벼슬이 있는 너네들은 서민이 아니시구나?
"서민이 행복한 나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 프레임이 지난 십몇 년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진 않았었지만, 보이지 않게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구축되어 왔다. 큰일났다. 치통이 그렇듯, 육안으로 이 쓴 뿌리가 확인 가능하게 된 지금, 이것은 심각하게 침투하여 곪고 아파오기 시작할 것이다. 심지어 정동영 씨 본인도 서민이란 단어를 가끔 선택했었다고 한다. 잘 모른 거지. 이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세계관과 계급 구도를 구축하는지. 서민이 행복한 나라에서 서민들은 'MB물가'에 해당되는 물건들만 하염없이 소비하며 4대강 운하 옆에서 합리적으로 지급되는 비정규직 임금을 받고 일하다가 종편방송에서 흘러나오는 '1위 예상' 아이돌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런 웃음을 웃는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정치적'이고 '불온한' 생각은 하지 않고, 그렇게 그들은 이름과 '만화 프로필 사진'을 붙이지 않는 친서민적인 세상의 일반명사로 전락한다.
빨갱이라는 용어는 '인간 자체'를 말살했다. 이제 서민이라는 단어가 등장해 인간의 '규모'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이 이슈파이팅, 프레임 전쟁을 해야 한다. 두고 봐라. 앞으로의 정치인들은 통계자료에나 존재하는 '서민'을 위한답시고 되도 않는 짓들을 할 것이고, 기업의 광고는 '사람을 향합니다'에서 '서민을 향합니다'로 바뀌면서 더 착하고 살뜰하고 '가엾어질'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 우리는 서민인가보다' 하고 극히 소시민적인 규모와 '깡'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대가 던져 주는 상식에 만족하는 착한 사람으로 살든지 미친놈으로 지탄받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맨.
오는 월요일에 신촌역에서 약간의 이벤트를 진행한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바로 그 찌라시를 뿌리는 샌드위치맨을 할 예정이다. 재밌겠지?
누가 보면 무슨 공모전 준비나 기업에서 홍보차 나와서 돈 받고 저질R을 하는 건가 싶을 거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우리 바로그찌라시는, 저 기득권 세력이 아무리 흉내내려고 해 봐야 그들의 찌질함을 입증하는 것밖에 안 될 어떤 멍청함의 원조를 보여줄 거다. 봐라, 이게 니들이 그토록 따라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젊은이들 곧 너네들의 고객님들로부터 사랑받고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인 줄로만 알고 있는 바로 그 새로움이다. 근데 그거 아냐? 니들이 백날 공모전 열고 천날 인턴 뽑고 억만 년을 벤치마킹해 봐야 너네는 이런 거 절대 못 해. 왠지 알아? 너네는 너무 똑똑하거든. 잘났거든. 가진 게 많거든. 그래서 망가지고 싶지도 않고 굳이 비용과 대가를 지불해 가며 새로워질 생각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되거든.
이거 하나만 알려줄께.
너네가 만드는 300여 편의 TV 광고 중, 정말 '미친' 광고는 한 편도 없었어.
그리고 너네는 우리 찌라시를 주워 읽고는 월요일 아홉 시의 임원회의 들어가서 이런 거 못 만드냐고 닦달하겠지? ㅋㅋㅋ
백날 해 봐.
별 재밌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은데 재밌고 세련되고 유용한 것이라고 억지로 생각하고 믿는 거, 이제 질리기 시작한다. 너네는 어린이들이 뭘 재밌어하는지 모르는 어린이 신문사 임원진들이야. 어린이들이 보기에 참 불쌍한 사람들이지. 너희들은 <바로그찌라시>의 프리미엄 에디션을 만들 수는 있을지라도, 절대로 <바로그찌라시>의 멍청함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오빠지만 사랑만 있으면 상관없죠?>.
원제는 お兄ちゃんだけど愛さえあれば関係ないよねっ. 니노미야 군 시리즈를 쓴 작가의 최신작이라는데 이건 미친 작품이다. 다음 분기에서 애니가 나올 확률이 높다. MF문고J가 앱을 잘 만들어 놔서 함 봤는데... 음... 캐릭터 설정이 약간 어설프고 이렇달 사건 없이 작가적 망상 대화만이 계속 이어지긴 하지만 2권 미리보기에 등장한 긴베(사와타루긴베 하루오미, 猿渡銀兵衛春臣)쨩이 좀 좋은듯ㅇㅇ 암튼 지켜볼 일이다. "브라콤은 불편하지 불행한 건 아니에요!"라니! 뭐가 그렇게 당당해! 아니 그보다 6년 떨어져 산 게 16년근 홍삼들한테 그렇게 큰 일인가?!
부흥회.
이번 한미 FTA 집회를 한 번도 안 나갔다. 정말로. 심지어는 나꼼수 콘서트도 한 번을 안 나갔다.
내 블로그를 지켜보신 분들이라면 의아해하실 것이다. 이상하다, 얘가 후회하지 않으러 어디 다녀오겠다는 글을 쓸 때가 됐는데, 왜, 하고.
몇 번인가 기도해 봤다. 몇 날인가는 맘만 먹으면 참가할 수 있는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바빴다, 라고만 말하면 안 되겠지. 사실은, 기도해 보는데, 그분께서 매번, "이번에는 가지 마라. 기도해라." 라고 하셨던 것이다. 정말로.
그리고 안 가길 잘 했다. 물론 기도에 대해 받은 응답이 있으니 못 믿을 바는 아니었지만, 김규항 씨가 올려 준 누군가의 편지와 바로그수뇌부끼리 소회를 주고받은 과정에서, 영적이지 않은 부문으로도 확신이 섰다.
이건 부흥회라고 한다.
그 말 한 마디 들으니 모든 게 깨끗해진다. 즉석에서 모인 돈 3억은 사실 헌금이다. 김용민 씨가 '목사 아들 돼지'가 되기 전부터 그는 이미 CCMer에서 기독교적 운율로 정치비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국 투어를 돌고 있고, 이것은 엔터테인먼트가 됐고, 기획하고 장사하고 (기득권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뻗댈 수 있는 힘이 되고 있고 이미 또 다른 팬덤이다. 이 나라는 팬덤 그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터라, 이미 트위터에서도 나꼼수 그 자체라기보다는 나꼼수의 성격과 방향과 속도와 굵기가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터였다. 늑약은 11분만에, 세상에서 제일 큰 시장을 당당히 진입한다는 그 공익광고의 패기는 다 어디 가고 대체 뭐가 그렇게 아쉬웠는지 비공개로 잽싸고 힘겹게, 통과돼 버렸다.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와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의 일은 어차피 이루어질 일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냥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가 '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여기저기서 메아리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가지 말라.
생각해 보면 너무나 창피하다. 기독교인들은, 경찰 추산 5천을 훨씬 넘었다는 나꼼수 여의도 집회를 훨씬 능가하는 능숙함과 스케일과 여건과 체계를 갖춘 집회를, 일 주일에 한 번씩 합법적으로 열고 또 열고 또 열고 또 연다. 수없이 대단한 연사와 팟캐스트 제공자들이 주옥 같은 말들을 쏟는다. 매주. 그런데 아무 일도 없다. 오죽하면 저들이 일을 만들고 있을까 싶어질 정도다. 교회가 해야 되는 일, 근데 안 하고 있는 일. 그래서 그들은 교회와 그 방식을 흉내냈다(김용민 PD가 있는 시점에서 이미 확신범임). 그렇게 3억이 모였다.
주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가지 말라. 나의 나라는 너희 중에 임한다. 아니, 너희 중에 내 나라가 '임해야' 한다.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내가 거기 있다. 너희는 몇천, 몇만이 SNS와 온라인 라디오 방송으로 연대해서 모여야 감동이 있고 해방이 있고 내가 있는 줄 아느냐? 너희는 도대체 지난 수년간 매주 몇 번씩 내게로 모이면서 그동안 뭘 했냐? 너는 뭘 했냐? 네가 거기 머릿수 하나 더하면 뭐가 달라지는 줄 아느냐? 너는 어째서 내 나라의 머릿수를 채우는 데는 동참하지 않는 거냐? 가지 마라. 내게 기도해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무슨 일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나에게 다 물어라. 내가 명을 내리리라. 거기서 그들의 지시를 받지 말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거니와 그게 아무 유익이 없다."
정말 큰일이다. 기도가 절대적으로 모자라다. 그 할당량을 인터넷 뉴스와 트위터 타임라인이 대신 채우고 있고 거기엔 아무 영적 흐름도 없다. 그게 진짜 큰일이다. 영원과 무한의 진리와 정의가 이 사회의 기존 이슈파이팅에 근근이 빌붙어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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