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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Make Nothing Happen

2016. 3. 2. 22:47




이 나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어떤 해프닝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진부한 수준의 유쾌함과 흥미도를 갖춘 드라마가 최신 특별기획 드라마랍시고 찾아온다. 어디서 너무나 많이 본 억양과 자료화면의 뉴스가 매일 새 뉴스라고 보도된다. 또 한국인 연구진이 세계 최초의 중요한 발견을 했다. 또 외국 새댁이 시월드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는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50년 전에도 화제였던 화제의 맛집이 다시 화제가 된다. 다시 강남이 핫하다. 다시 복고가 유행이다. 다시 야당에 희망이 보인다. 이번에야말로 삼성이 애플을 제칠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청년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 웹툰, 새 페이스북 페이지, 새 애플리케이션, 새 신도시, 새 정책, 새 패드립, 새 옷, 새롭게 급부상하는 트렌드, 새 쇼핑몰, 새 이슈, 새 프로모션, 새 프로그램.


뭔가가 정말 새롭다면, 우리는 그게 당최 뭔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하며 생소해할 텐데, 우리는 도대체 그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새로운 것을 만나 본 적이 없으므로, 어떤 “새”것 앞에서도 어리둥절해하지 않고, 생소해하지 않았다. 익숙하게, 너무도 익숙하게 새것들을 집어삼켜 소멸하고 ‘어 좋다’ 트림하고 드러누워 왔다.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는 익숙하게 비웃을 만한 것이고, tvN의 새 예능은 익숙하게 경탄할 만한 것이며, 디즈니 픽사의 새 영화는 익숙하게 재미있으면서 유익하고, 백종원의 새 밥집은 익숙하게 맛있으면서 익숙한 정도의 거리낌을 갖고 있고, 새 어그로꾼은 익숙하게 욕을 먹으며, 새 정치인의 새 사상은 익숙하게 재단된다. 이역만리 외국에서 왔다는 (자국에서는 분명히 엘리트일) 사람들은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따위 질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으며, 버라이어티 예능 쇼의 새 게스트는 너무나 익숙한 통과의례를 너무나 뻔하게 기대되는 수순대로 따라 준다.


이 나라는 통째로 촌구석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아는 것만을 계속 알고 싶어하고, 모르는 것들을 기어코 모르고 싶어하며, 생소함 그 자체를 즐기거나 누리지 않으려고 용을 쓸 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도시 어떤 시장 어떤 가게에 대해서든 ‘OO국의 자갈치시장’ 따위로밖에 설명하지 못하고, 어떤 풍습 어떤 생활 어떤 사고방식에 대해서든 ‘그럼 ~할 때는 ~겠네요?’ 따위의 무례한 어림짐작에 기어코 “YES (민망)(민망)”를 받아내며, 어떤 문화 어떤 정치 어떤 경제에 대해서도 굳이 외국인 억양이 팍팍 묻어나는 더빙을 덧씌워 완전한 남의 나라 코쟁이 외계인들의 이야기로 뭉개 버린다. 생소한 것을 즐길 줄 모르고 받아들일 줄 모르고 생소한 대로 누릴 줄 모르는 두메산골 촌놈들이, 그저 이해하고 있는 유머와 웃음과 비판과 사고방식 속에서 끝없이 자기소멸 중이다. “마! 쓰까무라!”가 그렇게 웃기고, 또 웃기기만 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해야 할 이 스테레오타입 덩어리 유머는, 그러나 이 깡통 촌구석 반도에서 가장 대단한 해학이고 재치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생소한 어떤 것이 곧 죽어도 나오질 않는, 촌뜨기 동이족의 나라이다.


“레퍼런스”가 없으면 아무 기획도 읽거나 쓰지 못하는, 누가 드립 하나 만들면 기어코 다 닳아빠지고 문드러져서 일간지 신문지면 부제에 찍혀 나올 때까지 우려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 번도 결코 자기 눈을 감고 자기 머릿속에 불을 켜서 자기 환등기를 돌려 본 적이 없는, 그저 미국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만 쳐다보다가 값싸고 맛있어 보이는 것 위주로 도떼기 수입해오기 바쁜, 번역이 없으면 제아무리 유익한 콘텐츠라도 거들떠볼 생각을 하지 않는, 누가 꼭 옆에서 “이것은 마치~” 운운 설명해줘야만 뭔가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그래서 자기의 사고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객체와 대상 앞에서 애처럼 화내며 칭얼대기 바쁜, “김정일 카섹스” 같은 데카당트하고 무의미한 농담 앞에서 질색 팔색을 하며 압수수색 영장을 기어코 인쇄해야만 하는, 스스로 어떤 것도 탐색해본 적 없지만 어떤 뉴스에든 완벽하게 반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런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공공연한 공작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또한 촌뜨기 자영업자들의 나라이다.


뭐야, 무슨 생태보호구역 지정이라고? 그럼 우리 집값 떨어지는 거 아냐? 우버? 우리 택시하는 50대 가부장들 다 죽으라는 거야? 손님들이 TV조선 틀지 말래? 그럼 신문은 어디 좌파 신문 아무거나 하나 구독해두면 되는 거 아냐? 아 요즘 젊은이들은 저런 그림 쓰는 게 유행이야? 그럼 우리도 간판에 저거 넣을까? 이번에 만드는 게임은 좀 애니팡같이 못 해? 보니까 손님들이 무슨 성서 구절 써 있는 거 걸어놓으면 좋아하더라고? 청년배당 저거 땜에 애들이 야간근무 안 하겠다고 다 나가는데 지금 제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우리도 좀 한국민속촌 같은 거 못 하나? 아니 서울시장은 진짜 미친놈인 게, 메르스 그거 뭐 죽으면 얼마나 죽는다고 하던 단체행사를 다 취소를 시켜 버렸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뭐 먹고 살라고?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또는 훈련되어서, 또는 배워서, 또는 바다 밖에서 보고 익힌 바가 있어서, 다소나마 생소한 어떤 것을 새롭게 내놓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굳이 부른다면 비정치적 진보주의자 내지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보다. 아니지. 그런 분류는 옳지 않다. 이 나라는 무시무시한 촌구석이기에, 이곳의 모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사람들, 뭔가 완전히 다르고 생소한 어떤 것을 일으키는 사람들, 아니면 그 중간 어딘가에 속한다. 반드시 그렇다. 이 스펙트럼은 흔히 부르는 좌우 진영, 보수-진보의 구도 안에 있지 않다. 기어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익숙하고 안락한 진보’를 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뭔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낯설고 이론적인 보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좌파=민주당=홍어 운운하는 1차원적 도식화는 그야말로 벌레 정도의 사회지능에 머무르는 촌놈들에게나 가능한 것이고, 세상은 그 이상으로 얽혀 있지만, 일단 이 나라의 인습적 고착성과 배타적 폐쇄성을 생각할 때, 유일한 진보는 오직 더 많은 낯선 것들에 있으며, 유일한 수구보수는 낯선 것들의 말살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좌도 우도 없고, 그저 자영업자적 수구보수의 이데올로기 하나만이 수십 년에 걸쳐 유구히 이어져 오는 중이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떤 급진(radicalness)도 용납되지 않아 왔다.

그게 사태였다.


당신이 이 고리타분한 촌구석을 내 조국 자랑스러운 KOREA로만 주워섬길 양이 아니라면, 당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사상 성향 따위는 정말 아무래도 좋으니, 하나만 요청한다.


새롭자.

급진하자.

지나치게 새롭자.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 되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무엇을 일으키자.

이 나라의 촌놈들이 할 말을 찾지 못할 사태를 만들자.

다들 이게 뭐지, 저게 뭐냐, 어버버 어버버 하고 있을 동안에, 잽싸게, 한 마디를 외치고 사라지자.


당신도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이 나라는 기어코 촌구석보다는 좀더 나은,

그래도 뭔가는 실제로 발생하고 벌어지고 일어나는

조금은 덜 부끄러운 배달의 민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Shock and awe losers, THIS IS THE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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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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