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힐링캠프 출연 관련 트윗들 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정리해서 올립니다. 비유로 돼 있으니 이해를 하기 어려우면 주석을 봐 주세요.
사회란 무엇인가? 무릇 사회란 오늘[각주:1] 점심 뭐 먹을지[각주:2]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닌가? 혼자 점심을 때워야 하는 사람은 하여간 스스로 내린 결정을 스스로에게 집행시켜[각주:3] 혼자 우걱우걱 뭔가를 먹을 테니 문제가 안 되지만,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야 너 밥 안 먹었지 나도 안 먹었어, 그래 오늘 점심 어떡할까"라는 질문이 오고가는 순간 이것은 인류 지구출현 이래 가장 심각하고 만연한 당면 위협이 되어 복수의 인간을 '사회'로 만든다. 농경혁명 이전에는 산열매나 짐승을 채렵해 오는 것이 큰 문제였고, 산업화 또는 상품작물 재배 이전까지는 없는 살림에 어떻게 몇 없는 반찬들을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만들어 먹어볼까가 큰 문제였다면, 수많은 점심식사 서비스[각주:4]가 흥망성쇠를 거듭한 오늘날 우리에게 점심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잘 설계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세련된 질문으로 요약된다. "짜장[각주:5] 먹을래, 짬뽕[각주:6] 먹을래?"
짜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용 대비 최대 포만감[각주:7]을 자랑하는 점심밥의 지존이 아닌가? 대국의 소스와 야채와 면발[각주:8]을 선진국의 조리기구[각주:9]를 이용하여 급하고 대차게 볶아 짜고 맛있게 빨아먹는 그 맛은 과연 반도의 민족이 기다려왔던 맛인지도 모른다. 한때 우리는 실로 짜장면이란 것을 한 번 먹어보려고 애쓴 시절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정 별미가 생각나지 않을 때[각주:10] 크게 실망스럽지 않은 선에서 선택하는 대단한 메뉴가 되었다. 한편 짬뽕이란 무엇인가? 스트레스 해소[각주:11], 짜장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별미[각주:12], 한번 맛들이면 잊을 수 없는 그 진득한 고추기름의 매운 국물은 또한 우리의 입맛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짜장보다 짬뽕, 더 나아가서는 짜장을 배격하고 오직 짬뽕인 자만이 있을 정도로 또한 쟁쟁한 선택인 것이다. 지난 몇십 년 간 선조와 선배들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 두 메뉴를 적절히 '돌려 먹는[각주:13]' 것이 당장 점심을 때우는 가장 간편하고 안전한 방편임을 깨닫고 이를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오늘도 우리는 직장에서, 동아리방에서, 촬영지에서, 투표소에서 묻고 또 묻는다. "짜장 먹을래? 짬뽕 먹을래?"
그러나 과연 우리는 매일, 매주, 매년 이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으로써 점심밥을 먹고 살아가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만족하면 그만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첫째로 뭐든지 맛맛으로[각주:14] 먹어야 한다는 근본적 욕망[각주:15]이 문제된다. 매일같이 짜장 아니면 짬뽕을 강요하는 일터는 아무리 "중식 제공"[각주:16]이라는 후한 조건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점점 싫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선택이나 고민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오히려 점심을 매일 직접 골라먹는다는 인간의 즐거움을 말살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어제는 짬뽕 먹었으니까 오늘은 짜장" 따위의 점심을 고르는 태도는 마침내 주문전화번호[각주:17] 또는 다른 종류의 점심밥[각주:18]을 잊게 하고 주방장 위주로 공급되는 점심시간[각주:19]을 만들고 말 것이다. 어느 날 울면이 먹고 싶어 엉엉 울더라도 주방장이 "울면 안 돼" 하면 그만인 점심시간을 원하는가?
둘째로 점심밥의 형태가 본디 다양한 것임을 망각할 위험이 있다. 중식 제공이란 말이 중국식 식사 제공의 줄임말은 아니지 않은가? 중식을 제공해 준다는 곳에 가기만 하면 으레 "짜장이냐 짬뽕이냐" 질문을 받던 필자는 과연 중식 제공이란 중화요리를 제공한다는 뜻이거니 이해했었으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 실로 그렇다. 우리는 각자 도시락을 싸 올 수도 있고[각주:20], 다같이 시켜먹을 수도 있으며[각주:21] 몇 개 그룹을 만들어 알아서들 먹고 오라고 정해줄 수도 있다[각주:22]. 우리가 짜장 아니면 짬뽕으로 통일해 시켜먹게 된 것은 과정상, 통념상 그리 된 것일 뿐 어떠한 형이상학적 필연성도 없는 대단히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의 누적일 뿐이고 따라서 "야 안되겠다 내일부터는 각자 도시락을 싸오자"라고 하더라도 사실 놀라거나 화를 낼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런 제의에 반기부터 일으킨다. 매번 현금 걷는 문제[각주:23]라든가 메뉴의 다양성 추구라든가 어떤 이유가 있을 텐데 왜 그 이유를 듣는 게 아니라 반대를 하게 되는가? 짜장이냐 짬뽕이냐의 점심 식사 방법의 생리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짜장이냐 짬뽕이냐'와 같이 협소한 선택만을 하고 살다 보면 소모적이며 비본질적인 오해와 논쟁과 관심사에 쏠리기 십상이다. 간짜장이니 쟁반짜장이니 해물짬뽕이니 삼선짬뽕이니 사실상 다 거기서 거기인 선택을 가지고 '짜장을 희한하게 먹는다[각주:24]'느니 '진정한 짬뽕이 아니라[각주:25]'느니 취향의 문제를 걸고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짬뽕 시켜서 양파는 안 먹고 단무지하고만 먹고 있는 사람한테 "야 니가 다마네기[각주:26] 다 먹었냐"라고 무안을 주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마네기가 뭔지도 모르는데다 다마네기를 실제로 맛보지도 않은 사람이 "다마네기가 뭔지나 알아야 먹을 것 아니냐, 다마네기를 줘 봐라"라고 역정내어 싸움이 붙을 때 어떤 이간질 잘 하는 사람[각주:27]이 "아, 다마네기란 단무지의 일본말이야"라고 거짓된 정보를 뿌리면[각주:28] 싸움은 수습할 수 없는데다가 다음과 같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그래 내가 '다마네기'를 좀 먹긴 했어 근데 먹으면 안 되냐?" (사실 그는 다마네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안 되지! 난 맛도 못 봤는데 다 없어졌으니까." (사실 그의 앞에 놓여 있던 다마네기들은 이 싸움에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짜장만 먹고 있는 그의 옆 자리 몇 명[각주:29]이 다 먹었던 것이다.) "그깟 다마네기 좀 먹으면 어떻다고 그러냐? 나도 돈 내고 먹는 거 아니냐?" "나는 뭐 돈 안 냈냐? 너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이것이 우리 사회의 꼬락서니다. 지극히 오랜 세월 우리는 점심을 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이제 점심을 챙겨먹는 세계가 된 이후로 우리는 짜장을 동경했고 짬뽕에 매료되어 이 둘만 있으면 점심시간은 어떻게든 언제까지고 만족스럽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짬짜면을 시켜먹을 것이냐 하면, 마치 실제로 짬짜면의 인기가 형편없듯이, 그것이 근본적 해결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고 다시 각자 수렵을 하는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냐? 그것도 답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서로를 알 만큼 알고 합의를 할 줄 아는 친구들이 누군가의 집에 모여 마냥 점심 문제를 가지고 고민만 하고 있을 때 으레 해 주는 대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감히 도전한다. 왜 이게 안 되는가? 아무리 의심하려 해 보아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굳이 어디에 전화를 해서 우리가 먹을 점심을 남한테 시켜야만 하는 상황[각주:31]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그랬다. 짜장면과 짬뽕은 강력한 추천메뉴였고 신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점심을 때우는 방법 중 하나일 뿐, 절대 완전한 양면적 선택이 아님은 분명하다. 게다가 우리의 냉장고에는 의외로 지금껏 짜장과 짬뽕과 기타 온갖 별미를 동경하며 주워 오고 기르고 사 오고 쌓아 놓은 식재료[각주:32]가 적지 않다. 게다가 우리들 중 누구도 요리를 할 줄 아는[각주:33] 사람이 없으리라고도 나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첫째 점심밥을 먹는 것이요 둘째 즐겁게 다같이 밥을 먹는 것이지, 절대 짜장이냐 짬뽕이냐의 인습에 가까운 기계적 양자 선택을 반복하며 평균 이하의 집단적 만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다같이 조리하고 상을 차리는 과정은 손이 가고 귀찮고 쉽지 않을뿐더러 시켜먹는 음식과 같은 본새도 나지 않을 것이다.[각주:34]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필자는 다같이 만들어 먹는 점심식사를 가지고 싸움이 일어난 사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요리를 만드는 과정은 굉장히 많은 합의와 양보와 이해와 협동에 기초하기 때문에 싸움이 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며, 좀 늦어지더라도 모두가 수긍, 만족, 또는 그 이상을 경험할 수 있는 점심밥을 원한다면, 그리고 여태껏 짜장이냐 짬뽕이냐로 어쩔 수 없이 점심을 통일해 왔던 지난 점심시간들을 반복하기 싫다면, 이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도해 볼 만한 방편이 아니겠는가?
사회란 제사(社)를 지낸 뒤 젯밥 먹으려고 모이는(會) 동료(societas, 소시에타스)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사회가 점심을 먹는 방법이 짜장 또는 짬뽕 둘 중 하나만을 시켜먹는 것으로 한정될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우리가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면, 그래서 모두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납득한 모양의 밥을 다함께 나눠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지어 먹을 정도의 재료가 이미 충분히 우리에게 있다면, 좀 늦어진, 좀 더 탄, 좀더 라면스프 맛이 나는 식단이면 뭐 어떻겠는가. 이제 우리가 먹고 싶어하는 것은 그런 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그런 밥을 지어먹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제 충분히 '놀러온' 것과 같은 경험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고[각주:35] 이제 중화요리만 연속으로 내리 먹는 시절은 지겹기도 하지 않은가.
거의 두 달 뒤[각주:1]면 전역 1주년이 됩니다. 참 보람차고 빽빽하게 지낸 한 해였습니다.
머리 꼬리 자르고 통보하자면, 제가 지금 잉여가 아닙니다.
주로 @SYWAM과 @theveryflier(그리고 애니메타 기록갱신)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데, 이거 하고 나니 다른 거 할 여력이 안 남아버리는 반도의 흔한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이십대 미청년. ㄳ
자연히 블로그 관리가 소홀해지고 있습니다.
방송국 가시내라든가 폰트 제작이라든가 번역질이라든가 영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몹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죠시라쿠가 출동하면 어떨까? 여! 자! 락![각주:2]
하여간 좀 창조적인 일과 결과물로 여러분을 맞지 못하는 점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최근 현안들에 대해서 간단히 적겠습니다.
1. 레이디가가로부터 촉발된 교리와 성관념 갈등 문제: 나는 이것조차도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은 관념적, 피상적, 추상적 인본주의와 근본적, 교조적, 부차적 신본주의의 대결구도입니다. 내 생각, 내 몸, 내 성별과 내 목숨이 내 것이라는 생각과 그렇지 않은 거라는 생각의 부딪침 말이죠. 보시는 바와 같이 여기선 논리적 타협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동성애를 싫어하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2. 총선 이후 진보진영 낙착 문제: 그들이 국민은 대변하지 않고 자기들을 대변하는데 당연히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돼 있었던거죠. 물론 과대평가된 진보신당의 지지도 문제였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명박을 반대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얼마나 빨리 깨우치고 오답노트를 만들어 내느냐는 문제인데, 여전히 딴지일보는 정신 못차리고 모두가 병신인 줄 아는 정권을 병신이라 부르는 에너지 소모를 하고 있습니다.
기획이란 없던 일을 만들어내는 짓이다. 따라서 태반은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바로 그것, 무로의 회귀, 보통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현실과의 사투가 바로 기획이다. 그 싸움에서 이겼을 때, 이 세상에 꼭 필요했던 무엇이 하나 탄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전율과 경외감 속에서 기획하라.
제1강령: 혹해야 한다.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보통은 재미와 우스움이지만 그 밖에도 오리지널함, 아름다움, 기본 욕구를 해소시켜 줌, 공감 등의 기본적인 인간의 선호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그 기획만의 별다른 모습으로 충족시켜 주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을 갖춘 것을 보고 혹한다고 한다. 절대 당신의 이름을 드높일 생각으로 기획해선 안 된다. 그런 사심이 투입된 것치고 근본적으로 혹하는 것을 나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제2강령: 될 것 같아야 한다. 될성싶지 않은 것에 투자할 바보는 없다. '되면 한다'라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그 기획에 투자하거나 투신할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기본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바로 될성싶으니까 까짓 한 번 해 본다는 심정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어조를 바꾼다. 명심해야 한다. 만약 될 것 같지 않겠으면 될 것 같은 정도와 방향과 방법과 대상으로 바꾸어서라도, 될 것 같게, 그럴듯하게, 하려면 할 수는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기획이 통과된다.
제3강령: 되어야 될 일이어야 한다. 보통 기획이란 아주 단순한 개인적 일차적 욕망 또는 갈구에서 시작한다. 그 일들의 태반은 굳이 이루어질 필요가 없거나 이루어져선 안 되거나 이루어졌을 때 별로 좋지 않았던 일이다. 그 기획이 실현되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라. 내 기준으로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들먹일 수 있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 듣기 좋은 말로 둘러대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가 납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진짜 이유를 탐험해서 발견하라는 뜻이다.
제4강령: 내재적인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지구력이란 대단한 힘이다. 무슨 일이든 똑같이 30년간 하면 TV에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기획을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힘은 재력도 인력도 아니다. 기획 그 자체의 지구력과 치명적인 매력이 그 기획을 끝까지 끌고 가는 법이다. 1주 전에 꺼냈던 기획이 오늘 막막하다면, 당신은 기획을 한 게 아니라 개꿈을 꾼 것이다. 어떡하면 이것을 계속하여 이끌고 갈 수 있게 할까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올려놓고 풀어라. 여기엔 인력과 재원의 문제가 포함된다. 투자금이 없어 기획하지 못한다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기획에 장기적 생존 능력이 없어 보이니까 투자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5강령: 그 기획의 설명을 아주 길게도 아주 짧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 요컨대 스스로 뭘 기획하고 있는 것인지 더 명확하고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획들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전 전제 설정 설명이 있다. 이게 많으면 많을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딱 세 문장으로, 딱 두 문장으로, 딱 한 문장으로 그 기획을 설명해본 뒤 1000자 이상의 글로, 3000자 이상의 글로 다시 설명해 보자. 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 당신은 그냥 망상을 한 것이다.
제6강령: 혼자만 재밌어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점검하라. 이것 역시 아주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의 '혼자'란 기획자 본인만 뜻하지 않는다. 기획자 주변, 기획자의 근친, 기획자에 대해 다소나마 알고 있어서 객관이라 할 수 없는 모든 시선을 뜻한다. 객관적인 감상을 찾아라. 누군가가 욕에 가까운 비판을 하고 있다면 이는 매우 좋은 징조이므로 꼼꼼히 살펴 읽고 그 욕한 사람이 다시 더 욱할 만한 패치 버전으로 혹은 그 사람이 팬으로 변할 만한 어떤 반응으로 보답해 주어라. 그런 것이 없었다면, 당신은 학예회를 개최하고 있었을 뿐이다.
제7강령: 맨 처음 생각했던 것에 매달리고 또 매달려라. 당신은 그 맨 처음 아이디어 때문에 나머지 아이디어를 생각한 것이다. 절대 나머지 아이디어 중 일부 때문에 그 맨 처음 아이디어가 괜찮았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망상 중 하나로 치부할 수 있었던 그 발상을 그렇게나 부풀리게 만들었던 그 최초의 아이디어를 잊지 마라. 또 기억하고 또 고집하라. 여건이 안 돼서 맨 처음 것은 실현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하여튼 절대 잊지 말고 어떻게든 그것을 실현시켜 소원 성취해줄 것인지를 고민하라. 10년 이상 유지되는 기획에는 항상 초심이 지켜지고 있다.
제8강령: 말로 개괄할 시간이 있으면 실행해 본 다음 그것을 보라. 혼자 머릿속으로만 혹은 모두가 말로만 뭔가를 구상하는 회의실에서는 일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될 일도 안 된다. '우리가 보고 싶어했던 그것'이 눈앞에 실물로 불완전하게나마 나타나면, 그전까지의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장난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논의는 바로 디테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회의를 느닷없이 중단시키고 진척된 내용을 실현해 보라. 누워 있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불을 켜고 시작하라. 그것이 싫다면, 당신은 그냥 '나 이런 창의적인 사람이야' 운운 거들먹거리는 게으름뱅이에 불과하다.
제9강령: 일반 대중이 실제로 접할 분량의 최소 3배 이상을 제작하라. 한마디로 이것은 생각의 뿌리를 내리라는 의미이다. 식물의 잠재력은 뿌리에 있고 기획의 잠재력은, 나중에 따로 비하인드 설정이랍시고 공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을,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발상과 재료와 구상에 있다. 누가 알아줄 것을 기대하고 구상하지 말라. 당신이 혼자 재밌어할 만한 끝없는 비밀 이야기를 쓰지도 말라. 그 아이디어의 무의식을 만들라는 말이다. 프로그래머들 버그 잡는 심정으로 왜냐는 질문, 어떻게 그러냐는 질문을 천번만번 계속하라.
제10강령: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뛰어넘어라. 사실 하나. 현실에서, 당신의 기획을, 정말로 재밌게 지켜보는 사람은, 전혀 없다. 사실 둘. 현실은, 당신의 기획이, 없어도, 잘 굴러간다. 사실 셋. 현실에, 당신의 기획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당신은 천재가 아니다. 당신이 나타나서 이 모든 중원 무림을 평정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 좀 하지 말라.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진실이 있다면, 평범한 몇몇 인간이 아이디어 몇 개에 회까닥 돌아서 돈이니 평범한 가정이니 목숨이니 하는 것들을 팔아치워 그 발상에 죽자고 파고든 결과가 그 수많은 천재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화에서는 연주 장면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작품에 쓰려고 만든 데모 부틀렉이 스튜디오애니멀 본사 창고에 있다는 모양인데 실제로는 접해 보지도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은 필자가 상정한 이미지에 맞는 곡들을 가지고 억지로 묘사를 해 보기로 한다.
분량이 갑자기 길어졌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13회 안에 구겨 넣으려다 보니 안배가 안 되기 시작하면서 좀 조급해진다. 원래 시나리오를 전부 하나가 되게 써 놓은 덕분에 토막을 내기가 어렵다. 발상을 바꾸어 읽을거리가 많아졌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말이 너무 길어졌다. 나머지는 이제부터 재개할 서사로 말하겠다.
세팅이 끝났다.
사방이 콘크리트로 조악하게 마감되어 음악을 연습하기에는 한없이 부적절한 그 격납고 안에, 세미한 하울링이 무슨 환청 혹은 백색 소음처럼 울리고 있다.
소희가 마이크 스탠드를 붙잡고 앞으로 기대는 자세를 하고 있다가, 그녀의 뒤에 자리한 세 명을 한 번 쭉 둘러보고 물었다.
“준비됐지?”
잠시 후 형준이 스틱을 네 번 치고, 4인조 플래닛셰이커의 역사적인 첫 연습이 시작됐다.
지구방위고등학교
#2 우리는 지방고 플래닛셰이커였다
형준의 드럼이 잠시 쿵짝거리며 독주를 하는가 싶더니 동철의 기타와 형직의 베이스가 동시에 들어오면서 메인 모티브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일단 연주는 별다른 변주 없이 각자의 악보대로 진행됐다. 베이스 라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기타 역시 지난 며칠 간의 맹연습으로 커버한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카피를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 수준이긴 했다.
세 명의 그루브가 아직은 맞는 듯 안 맞는 듯 위태위태한 가운데 30초가 훌쩍 지났고, 이제 소희가 특유의 당찬 소리 대신 일부러 그 발성을 죽인 듯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연주에 올라올 차례였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난 정말
항상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이젠 아냐 이제 난 당신 없인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사실 이 곡은 메인 모티브가 거의 연주의 전부를 차지하고 semi-chorus에서의 제2모티프 그리고 후반부 ‘달리는’ 파트에서만 신경을 쓰면 되는, 무난한 모던록이다. 원곡의 달리는 파트에서는 신디사이저가 메인으로 들어오지만, 키타(숄더 키보드라고 하는 건반악기)나 신디사이저가 없는 것도 문제고 있다 해도 관리가 어렵고 해서 여러 이유로 신디 파트는 소희가 육성으로 카피하기로 덮어둔 채 플래닛셰이커에 신디는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재 플래닛셰이커는 기타리스트 보컬과 기타, 드럼 그리고 방금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베이스의 4인조 진용을 갖추었다.
내가 좋아하던 많은 것들도
이제 내게 의미가 없고
이제 난 당신과 함께할 뿐
소희의 목소리가 사운드 전반을 덮고 있는 동안 동철은 자기 연주 잡기 바빴고, 형준은 동철과 소희의 눈치 그리고 형직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기 바빴고, 형직은 이 곡의 주된 루프를 파악하자 점점 눈치를 보지 않고 있었다.
이때 verse의 마지막 한 줄을 남겨 놓고 소희가 나머지 세 명 쪽으로 돌아섰다. 신호를 주는 것이었다. 이제 세미코러스로 넘어갈 것이었으니까.
그게 나의 행복이에요
과연 이제 막 들어온 베이스는 처음 보는 악보를 재빠르게 읽어내고 아까와는 사뭇 다른 리프를 카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하이햇이 퉁탕퉁탕 두드려 맞고 있고, 소희는 ‘요’를 한참 길게 뽑고 있었다. 이제 세미코러스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잠깐.”
소희가 왼손을 들어 연주를 멈추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린 순서대로 드럼, 기타, 베이스가 연주를 그만두었다. 다들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듯 소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스 진짜 안 들린다.”
“그러니까.”
형직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두었다가, 형준의 대답을 듣고는, 쟤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소희가 거기에 덧붙인다.
“넘어갈라 그랬는데, 앰프 터질 거 같애서 안 했거든.”
“잘 했어.” 동철도 한 마디 한다. 그렇지 않아도 기존의 기타 라인, 보컬 라인에 더해서 이번엔 베이스까지 한 개의 앰프에 다 꽂아 쓰다 보니 동철 역시 아까부터 입력이 오버될까 봐 시원스럽게 스트로크를 긋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스까지는 무리인가...”
소희가 이제 생각을 해 보겠다는 뜻으로 말끝을 흐리는데 이번엔 형준이 오른손을 들고,
“내가 말야.”
발표를 시켜주길 바라는 눈치다. 모두가 주목하는 것 같자 형준이 잽싸게 들어온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생각해본 게 있거든.”
“?”
이번엔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형준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 봐.”
그러고는 일어나 모두를 가로질러, 로봇의 오른팔 아래를 지나 일직선으로 저쪽 가장자리의 정비반으로 들어간다.
정비반 내부는 여기저기 그을리고 잘려나가는 등 한 번도 교체해본 적 없어 보이는 단단한 작업용 나무 책상 몇 개가 있고, 벽 한 쪽을 가득 메운 각종 공구며 자재며 아직 덜 끝난 작업물로 가득한 찬장이 있다. 그 반대편 벽 저쪽 구석에 달린 출입구를 열고 들어온 형준이 불을 켜자, 보호창으로 덮인 형광등과 전등갓을 쓴 백열전구에 그리 밝지 않은 빛이 들어왔다. 깜박거리며 켜지는 형광등 빛을 헤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발걸음으로 형준은 문이 달린 정 반대편 구석으로 급하게 걸어와 찬장 제일 안쪽 아래층 구석을 뒤지며 중얼거린다.
“보자... 그 선을 내가 여따 놨는데...”
그리고 과연 거기서 어떤 검은 선들이 한 무더기 나온다.
“아, 있다!”
그 뭉치를 한아름 안고 형준은 아까 갔던 그 경로 그대로 다시 돌아와서는 나머지 셋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게 웬일, 통제탑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나? 모두가 한참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가 기어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야, 너 어디 가냐?”
표동철이 약간 큰 소리로 불러서 묻는다.
“통제탑에,”
형준은 뒤룩뒤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디를 올라가는 운동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덩치의 소유자였다. 계단을 올라가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서, 대답을 할 때나 이따금 옆을 돌아보아 답을 던져 주었다.
“방송실, 있잖아?”
“너 설마?”
“어, 그 설마야!”
방송실이란 말을 듣고서야 다들 그 검은 줄들이 뭔지를 눈치챘다.
“이게 라인 젠더랑 연장선이거든?”
지금 형준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면 상상도 못 했고 실천도 못 해봤을 만한 계획을 실행해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대식당이 3번인데 여길 기타로 깔구, 병기반이 왼쪽이니까 여기따 5번 라인 줘서 베이스 틀고, 6번 라인으로 시공반 쪽에 깔아서 드럼이 출력되게 하는 거야.”
음, 눈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설명하겠다. 한마디로, 지금 형준은, 통제탑에 있는 격납고 방송 시스템을 멋대로 만져서 각 구역의 스피커를 악기 연주에 이용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여기쯤 말했을 때 이미 형준은 통제탑의 허술한 출입문을 따고 들어가 전방 강화유리 창문을 열고 있었다.
소희가 묻는다. “그럼 보컬은?”
“보컬? 아 그거야,”
창문을 열고 상반신을 한참 앞으로 뻗어 내민 형준이 득의양양하게 머리 위를 가리킨다. 천장 H빔 서까래에 달린 조명 사이사이의 스피커들이 보인다.
“당연히 1번 중앙방송이지!”
이때 형준의 안경이 천장 조명을 받아 쨘 하고 번득였다.
형준이 위에서 “이건 베이스!”, “이건 기타!” 등을 외치면서 선의 한쪽 끝을 집어던지면 아래에서는 시키는 대로 그걸 악기에 연결해서 세팅하고, 위에서는 gain과 전체 프리셋을 맞추면서 소리를 테스트해 보는 식으로 세팅이 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기술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고,
“지잉~”
“와 쩔어!”
뭘 하나 설치할 때마다 감탄하기 바쁜 탓이었다.
둥둥. 챙챙.
“우와 대박!”
디리리리리-익, 뜬뜬 뜨든.
“이거 신기한데?”
아, 아, 하나 둘 하나 둘.
“이거 지금 내 목소리야?”
“테스트 계속해 봐!”
“싫~어!”
“야 소리지르지 마! 여기선 더 크게 들린단 말야! 아나 보컬 gain을 줄일 수도 없고...”
두 번째 세팅이 끝났다. 이번엔 드럼 쪽에도 마이크를 하나 놓고 빈손이었던 소희도 세컨드 기타를 잡았다. 그렇게 세팅해도 중앙방송 믹서는 자리가 남았다. 형준이 이걸 알았을 때 탐을 낼 만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하자면 여기가 거대한 돌비서라운드 시스템 같은 거거든!”
물론 스피커는 조잡한 방송용이지만, 여러 곳에서 여러 개의 스피커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비견할 만했다 하겠다. 다시 형준도 통제탑에서 내려와 드럼 자리에 앉았고, 이제 소희가 신호만 주면 시작할 수 있었다.
“준비됐지? 간다!”
다시 시작된 드럼 독주 두 마디는 이번엔 모두의 오른편에서 들려왔다. 시멘트 벽에 울리는 메아리를 받아 겹쳐 들려오는 드럼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원곡의 드럼 소리와 흡사했다.
그리고 기타와 베이스 리프. 그들의 바로 등 뒤 왼편에 있는, 학생 및 교직원 전체의 최대 150%까지 수용할 수 있는 지하대식당에서는 기타의 메인 모티브가 시원시원하게 울렸다. 오른쪽에서만 들리던 드럼의 비트 위에 베이스가 왼쪽 병기반 스피커로부터 가세하면서 이제 쿵쿵거리는 느낌이 양방향으로 들려왔다. 이건 대단한 감각이었다.
소희가 잡은 세컨드기타는 일단 4번, 모두가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정비반으로 깔았다. 분명히 아까는 네 명의 곁에 있던 앰프에서 세밀하고 자잘하게 나던 소리가, 이번엔 지구방위로봇이 들어찬 거대한 지하 벙커의 사방에서 마치 우연의 일치로 노래를 틀어놓고 합친 것처럼 크고 엉성하게 섞여 들어왔다. 아주 색다르고 좋았다. 그러나 전율을 느끼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었다.
소희가 노래를 시작하자, 메인 보컬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보컬의 등 뒤가 아니라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전체 통제 방송 아니면 수업 종소리만 나오는 그 스피커에서, “...이젠 아냐 이제 난 당신 없인...” 노래가 완전 라이브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소희는 순간 얼떨떨해서 하마터면 가사를 놓칠 뻔했다. 자기 귀로 자기 목소리를 듣는 데 실패할 정도로 신기한 것이었다. 모든 교실과 작업실마다 베이스, 기타, 드럼이 산발적으로 소리를 뿜어 섞고 있고, 그 위로 어떤 크고 조용한 목소리가 “...목마르고 숨쉴 수 없이 거칠어...” 노래를 포괄하여 얹는다.
마지막 하이햇 일곱 번.
4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마지막의 모두 같이 쫙 커지다가 확 멈추는 부분은 실패한 채 기타와 드럼의 잔향이 남아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지금은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하여 경탄할 때였다. 한참 넋이 나가 있던 소희가 “와우! 하이파이브!”를 외치고 뒤로 돌아 점프를 뛰며 나머지 세 명에게 번갈아 하이파이브를 건넨다.
“어때 죽이지?”
형준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맞춰준다.
“어, 끝내줘! 목소리가 막 천장에서 울리니까 짜릿짜릿한데?”
소희의 왼손이 오늘따라 힘차고 화끈한 동작으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치우고 가자’ 제스처를 했다. 베이스를 해체하는 동안 형준은 나머지 두 명에게도 소감을 재촉한다.
“야, 형식아, 괜찮지?”
쳐다도 안 보고 베이스 만지며 대답하던 형직이, 이름을 잘못 불린 데 대해서는 지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는지
“아까보단 잘 들리는데... 그리고 난 형직”
까지 말하면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형준은 동철에게 쫓아가 있었고 형직은 안중에 없었다. 동철도 한창 고무고무 고무되어서 형준과 떠드는 중이다.
“그냥 앞으로도 이렇게 가자! 너 이거 어떻게 생각했냐?”
“어, 그냥, 뭐, 나도 드럼 마이크 써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뭐랄까...”
소희가 마이크 라인 정리하면서 한 마디 거든다.
“가만 보면 형준이가 전기기술에 소질 있어.”
형준은 아주 당황스러워한다. 누군가가 언젠가 자기에게 말하리라고 생각했던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응? 내가? 내가 무슨 소질이 있다고?”
“사고치는 소질이 있지.”
이 목소리는 선생님 2의 목소리다. 음, 그러니까 어른들의 사정상 구체적인 이름은 밝히지 못하는 선생이, 방금 이들이 걸어 내려왔던 계단의 저 위쪽 거의 꼭대기에서 펜스를 붙잡고 내려다보며 혀를 차고 있었던 것이다. 셋이 다 그쪽을 주목했다. 그래야만 했다. 누가 이 시간에 여길 온 것은, 그들에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생님 2의 목소리가 큰 폭으로 불분명하게 울린다.
“이게 누구야, 지구는 안 지키고 사고나 치는 사고메이커들 아니야?”
표가 발끈한다.
“누가 사고메이커에요?! 우리 이름은...”
선생님 2는 그의 말에 관심이 없다. 그냥 하려던 말을 계속한다.
“이놈들아, 공부도 지지리 못하면 지구라도 열심히 지켜야지 놀고 있냐?”
하형준이 송형직 쪽을 한 번 눈으로만 쳐다본 뒤 대꾸했다.
“우리라고 다 공부 못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난 너네들을 잡으러 간다는 억양으로, 선생님 2는 하던 말을 계속하며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간다.
“오냐 그래 그 똑똑한 머리로 뭔 짓을 하길래 이렇게 시끄럽게 구나 볼까?”
위를 쳐다보던 네 명의 시선은 자연히 다시 서로에게로 모였다. 뭣됐다. 이제 어떡하지? 나머지 세 명이 자연스럽게 형준을 본다.
“...얘들아?”
“?”
“내가 뛰라고 하면...”
형준이 허리를 굽혀 집어든 한 가닥 전선의 끝을 보여주자마자,
“전선 뽑아들고”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뛰어!”
거기서 꽥 소리를 지르니, 지금 뛰라는 건지 좀 있다 뛰라는 건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자동으로 자기 악기와 한 가닥 줄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아무 데로나 뛰었다. 형준은 잽싸게 반대편 끝을 뽑아 주러 통제탑으로 달려갔다. 선생님 2는 저 위 우측계단에서 아직도 한창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는 좌측계단으로 애들이 올라가 도망치면 그땐 잡기 어려워진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리고는 다급한 마음에 몽둥이를 휘두르며 괜히 목청만 높인다.
“야이놈들아! 거기 안 서?”
“서란다고 서는 병신이 어딨긔”
고함소리와 계단 뛰어내려가는 또는 올라가는 소리가 탭댄스 돋게 오후 여섯 시의 격납고에서 신나게 울렸다. 이것이 역사적인 4인조 플래닛셰이커의 첫 연습이었다.
플래닛셰이커가 4명을 모아 학교에서 연습한 게 역사적인 사건으로까지 강조되는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야, 너 밴드 안 할래?”
“네? 저요?”
“그래 너. 너 이름 조안나지?”
사실 그날 안나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입학식 날부터 며칠 내내 영 말이 없고 뭔가 대단히 불만족스럽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쏘아보듯 하는 눈매로 1학년 AP반 맨 뒤에 앉아 자기 등을 째려보고 있던 ‘소문에 따르면 이 학교 교장 손녀딸’인 신소희가, 갑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아침부터 자기에게 그렇게 다짜고짜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놀랍게도 한 번도 안나의 자기소개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소희가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러나 소희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말해 보았자 입만 아프다.
“아 됐고, 밴드 할래 말래?”
”글쎄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그렇게...”
“근데 넌 왜 존대말을 쓰냐?”
“제가 생일이 느려서...”
물론 이건 변명이다. 그녀에겐 특히 소희가 더더욱 남으로 느껴져서인 것뿐이다. 소희는 밴드를 할 생각이 없는 1인을 재빠르게 무시하고 대화를 끊는다.
“아 어떡하지? 밴드를 해야 되는데.”
다리를 앞으로 뻗고 상체를 젖혀 의자를 뒤로 넘길 듯 까딱거리던 소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도, 교실에 들어오는 보조승무원마다 다 불러세워서 일일이 “야, 너 밴드 안 할래?” 물어보고 있었다.
물론 아무도 락밴드 따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상해 보라. 장소는 무려 지구방위고등학교고 때는 2027년이다. 버스로 지하철로 걸어서 학교 교실까지 납시어 자리에 앉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인 사회였다.
다음 날 소희는 A4지에 흑백으로 이따만큼 뭔가를 복사해 왔다. 한 손에는 투명테이프, 한 손에는 그 광고지를 들고 교실 게시판마다 복도마다 화장실마다 그걸 붙이고 다녔다. 라이브 공연 중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모습의 락커 사진으로 지면을 꽉 채운 뒤 그 위로 짧고 굵은 광고문이 올라와 있었다.
지구방위고등학교
유일의
락밴드
REBORN!!!
planetshakers
문의 1-AP 신소희
신소희는 ‘소문에 따르면 이 학교 교장 손녀딸’이었다. 뭐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소희가 광고지를 학교 사방에 붙이고 다니면서 아무나 붙잡고 “야 너 밴드해 보고 죽을 생각 없어?”라고 물어본다는 소문이 전교생에게 퍼진 것은, 비단 소희가 그렇게 ‘나댈’ 것 같이 생기지 않은 세련되고 귀여운 외모여서만은 아니었다.
“플래닛셰이커를 알아?”
“1학년이?”
“야 이거 플래닛셰이커 재결성인가?”
3학년의 나희영, 김국환 그리고 2학년의 윤덕희가 뿜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플래닛셰이커의 팬클럽 <새틀라이트>의 멤버였다.
돌발 과학퀴즈 하나. 행성을 도는 위성이 있다고 치자. 어느 날 그 행성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면 그 위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1번, 같이 없어진다. 2번, 행성이 없어지던 순간의 진행 방향으로 투포환이 날아가는 원리와 같이 날아간다. 3번, 폭발한다. 4번, 돌던 궤적을 점점 축소시켜 한 자리에 고정된다. 음, 실은 나도 정작 문제는 냈지만 답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몇 년 전 지방고 동아리 통폐합 대집행 때 플래닛셰이커라는 행성을 잃어버린 새틀라이트에게, 정답은 1번이었다. 학교의 명물이 될 수도 있었던 이 락밴드는 면학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안 된다는 학교의 탄압을 받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그때의 영광을 아련히 기억하던 선배들 몇 명만이 구전으로 그 존재를 전해 왔다. 그것을 나희영이 1학년일 때 2학기에 당시 3학년이던 몇 명이서 부활시켰다. ‘지구를 지키는 고등학교’의 락밴드 동아리는 패기부터가 다르다. 나희영과 김국환은 그때 보았던 기절초풍할 감동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들은 훌쩍 졸업하고 중견 기업에 취직해 가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플래닛셰이커 벌써 두 명 들어갔대는데?”
“진짜?”
“저 봤어요.”
“아 깜짝아. 누구세요?”
“저 덕희에요. 윤덕희. 왜 그 재작년 기말 공연 때 중학생인데 왔었던...”
“아 그게 너야?”
“뭘 봤는데?”
“지금 보니까 드러머랑 기타가 들어왔어요. 제가 혹시나 해서 C섹터 가봤더니 있더라고요. 그래서 Anthem 가르쳐줬어요.”
“니가 Anthem을 알아?”
“아 그때 들은 곡들은 제가 다 안다니까요! 어, 근데 저 죄송하지만 이름이...”
“어, 나는...”
나희영과 김국환과 윤덕희가 이 일을 계기로 원년 새틀라이트 멤버로서 자연스럽게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면서 일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2학년 중에는 윤덕희와 더불어, 첫눈에 소희의 당당한 모습(과 아마도 외모 버프 때문)에 반해 버린 AP 석미령이 주모하여 새틀라이트의 부활을 도모했고, 1학년 중에서는 주로 멤버들의 친구 위주로 플래닛셰이커의 부활과 새틀라이트의 재집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제대로 된 활동을 한 게 없으니 나설 기회가 없었다 뿐이지, 일이 여기까지 오자 플래닛셰이커의 부활과 새틀라이트의 존재는 학교에서 공공연한 것이 돼 버렸다. 다만 이번 학기에 기말 공연 잡혔네 멤버가 벌써 4명으로 갖춰졌네 하는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 일이 진행되는 것이 없어서 판을 벌인 소희 입장에서는 초조하던 차에 오늘 드디어 베이스를 영입했고, 뜻밖에 격납고 믹싱 체제까지 성공해서 몹시 기분이 좋았다. 다만 망할 놈의 당직선생 때문에 저녁 일곱 시나 다 되어서 복날 개처럼 헐떡일 수밖에 없었을 따름이었다.
숨을 고른 소희가 주변을 둘러보니 번화가로 들어온 길이었다. 코코아톡 알림이 와 있었다.
표동철: 다들 어디야?
표동철: 난 일단 선생 따돌림
표동철: 나만졸라따라와 미친병기
하형준: 일단학교근처에 짱박혀있는중ㅋ
송형직: 집.
소희가 답장할 말을 생각하다 말고 궁금해서 물어본다.
신소희: 벌써 집갔어?
송형직: 학교 옆이야, 우리집.
신소희: 헐ㅋ
다시 위치 파악으로 돌아간다. 다들 족히 15분은 뛰거나 숨거나 따돌리기 바빴기 때문에 서로 잘 피했는지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신소희: 학교근처 어디
하형준: 나PP렌트
형준은 지금 만화 소설 비디오 종합대여점 체인으로서는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PP렌트 한구석 CCTV 바로 아래 초조하게 쪼그리고 앉아, 미처 다 넣지 못한 라인을 얼키고설킨 그대로 책가방에 우겨넣고 있었다.
송형직: 거긴 왜?
하형준: 아직라인정리 다못했거든ㅋ가봐야돼
신소희: 가긴뭘가? 내일해
표동철: 그래 그만하고 내일하지
이때 소희한테 전화가 온다. ‘할아버지’다.
“여보세요?”
“방금 당직선생이 전화가 왔는데, 너 또 학교에서 밴드했냐?”
“...네.”
코코아톡 알림은 통화 중에도 계속 온다. 귓전에 댔던 휴대폰을 좀더 떼야 했다.
하형준: 아맞다
“너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준다고서 억지로 지방고 다니게 한 건 내가 미안한데,”
하형준: 내일 창군기념일이잖아
이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형직도, 골목에서 다시 나갈 길을 찾던 동철도, 와이파이가 잡혔다 안 잡혔다를 반복하는 복잡한 상점가 속의 소희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자꾸 수화기 스피커로 할아버지가 귀찮은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너도 그 나이나 됐으면 공부할 생각을 해야지, 마냥 가수놀이나 하자고 학교 갈 거냐?”
결국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핸드폰 화면을 봤다.
하형준: 낙원상가가자
“그럼 당연히 가야지!”
“응? 뭐?” 기가 차서 터져나오는 한숨이 두어 번 이어진다. “너 진심이냐?”
“네? 아, 아니에요. 그 얘기 아니에요. 저 바쁘니까 끊을게요. 지금 가요.”
송형직: ㅇㅋ.
신소희: ㅇㅇㅋㅋㅋ아개웃겨
표동철: 뭐가 웃겨
신소희: 아몰라 낼 말해줄게 오늘 수고했고 낼봐
곧이어 형준은 PP렌트를 나오며 주변 눈치를 살핀다. 그때 소희는 네거리를 지나 점점 어두워지는 저쪽의 버스 정류장을 찾아 달려가고 있었다. 동철은 일반 주택 반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는 중이었고, 형직은 불도 켜지 않고 옷도 벗지 않은 채 가방만 던져 두고 자기 방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원래 90분 내지 100분짜리 장편 극장용 시나리오로 짰던 이야기를 1쿨짜리 TVA 시나리오로 바꾸다 보니 스토리 전개에만 260분을 소요하는 좀 늘어지는 듯한 시나리오가 됐다. 이 이야기가 만약 재미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두었던 원래의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TV판으로 수정했기 때문이거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지 못한 채 글로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재미있었다.
나머지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서사로 말하겠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 농담은 아주 치밀하다.
원안
스튜디오 애니멀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서 카메라 줌을 아주 크게 당겨 잡으면, 저쪽에 조그맣게 창백한 푸른 점 하나가 보일 듯 말 듯한 거리에서부터, 어두컴컴한 무중력과 진공의 공간을 거의 일직선의 같은 속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에도 그렇게 찾아왔듯이, 이번에도 지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각본
엽토군
화창한 화요일이었다.
지구방위고등학교 1학년 시공B반 교실은 창문을 있는 대로 다 닫고 있던 탓에 그 교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가 밖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오른쪽 턱을 괴고 창 밖으로 눈을 고정한 시공생 표동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이다. 햇빛이 사선으로 비쳐 들어오는 교실에서 혼자 무심하게 창 밖을 보고 있다니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같다. 그리고 잠시 후 동철의 책상 서랍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 너머에서, 전학생이랍시고 교실 앞문을 열고 미소녀들이 등장할 것인가? 그런 일은 한국에서는 없다. 대신,
“조용히 안 해?”
수업시간과 쉬는시간을 혼동하고 미친 듯이 떠드는 3류 실업계 고등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애꿎은 교탁만 매질하는 미묘한 미모의 여교사가 있을 뿐이다.
동철은 그때에야 표정을 무슨 생각 비슷한 것이 났다는 표정으로 조금 바꾸며 교실 앞을 본다.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감수
전경진, 김진혁, 허희정, 고지영, 장선녀, 조은수
쿠구구구구구구구...
그것은 낮고 육중하게 울리며 직감적인 공포를 일으키는 소리를 내며 푸른 별 지구를 향해 가속도 서행도 하지 않고―음, 잠깐, 방금 내가 진공의 공간을 날아오고 있다고 했던가? 그러면 그것은 소리를 낼 수가 없겠군. 다시 말하겠다.
(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
그것은 별다른 소리는 안 내며 한결같은 속도로 푸른 별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협찬
디시인사이드 한국애니갤러리
동철이 고개를 반사적으로 앞으로 돌렸다가, 문득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겨 교실을 한 번 훑어본다.
국어 교과서를 구겨 판치기를 하는 놈들, 뛰어다니는 놈들, 불량식품 간식 먹는 놈들, 서로 낙서를 주고받는 놈들, 자는 놈들, 잠꼬대에 욕을 섞어 꽥 지르고 다시 자는 놈들.
음, 별일은 없다.
안심한 동철은 다시 앞을 본다. ‘교 훈’, ‘지구를 지켜라’가 걸린 액자 아래로 지구방위사를 가르치는 여교사 구지영이 서툰 솜씨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주의를 끈다.
“얘들아 집중 좀 해. 이제 끝났어. 정리해 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집중을 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동철은 선생을 보고 있었지만, 그건 그냥 달리 볼 것도 없는데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두면 혼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을 뿐이니 무효라 하겠다.
교탁에 내려놓았던 분필을 급하게 집어들며 선생은 말한다.
“자 다시 정리해보자. 뭐랬지? 10여 년 전만 해도 외계인이나 UFO의 정체는,”
칠판으로 휙 돌아선 지영의 오른손이 칠판 가득 어지럽게 적힌 글자들 중의 ‘無’ 자에 닿자마자 분필은 그 글자를 동그라미 치고 선생이 말한다.
“없는 셈쳤다고 했지?”
교사의 말이 칠판에 적은 내용과 큰 차이 없이 겹치기 시작하면서 동철의 귀에 선생의 말은 점점 들리지 않았다. 칠판을 가만히 살펴 보니, 판서는 크게 3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현대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고비에 관한 것이었다.
UFO. 외계인. 2017년까지만 하더라도 이것들은 이 세상에 ‘전면적이고 총체적으로 등장’한 일이 없었다는 이유로 과학계로부터 이미 귀납적 존재 증명을 하지 못했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그 해 12월 3일까지만 말이다.
미 국방부는 그 날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Invasion by Monster’s Falldown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지구방위사 교과서에 따르면, 그 날 “거대 외계도약체”가 서울 테헤란로에 낙하하여 2시간 가량 “축소”한 후 “급팽창”해 다시 날아갔다. 불과 9시간 동안 지구에 닿았다가 사라진 외계 생물은 우리에게만 25조 원 규모의 막대한 참사를 일으켰다.
당장 다음 해에 UN 직속 지구방위회의가 신설되었고, 전세계적으로 군비가 증강되었으며, 한미연맹은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강력해졌다. 우리나라는 그 외계도약체의 피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받은 나라로서 특히 이 문제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 국민들의 대처 역량을 강화하고 한미연합 및 지구방위회의를 위한 전력과 인재를 증강하는 목적의 특수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지구방위고등학교’가 설립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동철이 칠판의 세 번째 단쯤을 보고 있는데 마침 교사가 목청을 높인다. 아마 수업시간이 지났는데 종이 울리지 않아 마지막으로 속도를 높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너네가 이 명문 지방고에 다니고 있는 거잖니? 어때, 알아야겠지? 시험에 나오겠지?”
누군가가 핀잔을 준다. “몰라요.”
명문이었던 건 정말 한때였다. 그때 훈련은 본격적이었고 장비는 최첨단이었으며 학생들은 전세계의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듬해에 ‘거대 외계도약체’는 오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오지 않았다. 사실은, 그렇게 지난 지 벌써 10년째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벌써 2027년인 것이다.
그리고 구지영이 무슨 핀잔인가를 더 주려는데 드디어 종이 울렸다. 선생은 급하게 교과서와 다른 소지품을 챙겨 나가며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다. 사실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시끄러운 교실이었다.
“얘들아 제발 중간고사 준비 좀 해. 아무리 시공반이라지만, 응?”
누군가가 한 번 더 선생의 등을 떠민다.
“아, 어차피 또 시공반일 텐데요 뭐.”
이쯤 되면 그냥 빨리 나가는 게 상책임을 알고 있는 여교사는 앞문도 닫지 않고 1-시공B 교실에서 도망간다.
이제 이 학교에는 긍지도 없고 지구를 지킨다는 생색도 없다. 이제 지구방위고등학교, 줄여서 ‘지방고’는, 그냥 진학률 낮은 수많은 동네 골칫거리 3류 실업계 고등학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말없이 지켜만 보던 동철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머리를 벅벅 긁는다.
“아이씨, 공부를 하긴 해야 되네.”
혼잣말이 끝나려고 하는데 앞문이 세차게 탕탕거리며 옆 반에서 온 웬 놈이 “야 대박! 완전 대박!” 소리를 지른다.
동철도 그렇지만 웬만한 시공B반 학생들은 모두 다 그를 주목했다. 그가 뜸 들일 겨를도 없이 바로 결론을 말해 버린다.
“지금 신소희가 플래닛셰이커 얘기한대! 중대발표!”
교실이 순간 들썩이고 동철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눈치 빠른 몇 놈들이 창가로 뛰어왔다. 창가 자리에 앉은 동철이 그 주변 분위기를 한 발 늦게 파악하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을 때쯤, 이미 동철은 창 밖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고 쳐다보려는 꼴통 시공생들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싸여 있었다.
간신히 밖을 확인하니, 세상에 무슨 싸구려 일본 드라마도 아니고 구령대 한가운데에 일렉기타를 멘 신소희가 마이크 하나 들고 위풍당당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분위기의 동급생이 포커페이스를 하고 서 있었다.
소희가 학교 창문에다 대고 왼손으로 특유의 삿대질을 해 가며 외친다.
“야 잘 들어!”
가뜩이나 우렁찬 기차 화통 목청에 교장 전용 마이크 라인을 사용하니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부로 플래닛셰이커에 베이스가 생긴다!”
애먼 동급생들과 선배들을 삿대질하던 소희의 왼손이 그 포커페이스로 휙 돌아간다.
따라서 모두의 시선도 그에게로 휙 쏠린다.
“송형직이라고 한다!”
쿵!
“이번 기말고사 직후에 한 건 할 테니까,”
쿠웅!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
쿠구웅!
“이상!”
왠지 이리저리 카메라로 왔다갔다 해야 할 것 같은 강한 임팩트의 외마디 연설이 끝나고, 신소희가 “가자.”라며 형직의 어깨를 툭 치고 마이크 라인을 정리하고 있는데,
“헉, 헉, 헥헥...”
3층에서 한걸음에 뛰어나온 표동철과 하형준이 구령대와 정문 사이에서 헐떡거리며 신소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맞다.”
둘 중 누군가가 먼저 입을 떼긴 뗄 건데 숨이 차서 둘 다 말을 못 하고 있는 상황임을 파악한 소희가, 허리에 오른손을 얹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일러준다.
“내가 너네한테 먼저 말하는 걸 깜박했네.”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애니멀
음, 방금 내가 아까 그것이 한결같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고 했던가?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보니, 그것은 신소희와 하형준과 송형직과 표동철의 머리 위로, 지구로, 10년 전에 지났던 그 궤적을 타고―점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방위고등학교 #1 이것저것 다가오고 있었다
제작
지구방위고등학교 입학처
새틀라이트
스튜디오 애니멀
이 네 명이 잠시 후 햄버거 먹으러 들어간 패스트푸드점 역시, 밖에서 보면 조용했다.
시끄러운 최신 가요 때문에 가게 안의 손님들은 거의 악을 썼고, 그 때문에 이 네 명 역시 거의 악을 썼다. 그리고 혼자만 2인분을 시킨 하형준은, 패티를 우적우적 씹으며 하던 얘기를 한다.
“아니, 그럼 얘기만 미리 좀 해 주지.”
표동철도 동의한다.
“그러니까. 베이스가 필요하긴 필요했잖아.”
“근데 그게 너무 이렇게 갑자기 말이야.”
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신소희가 한 마디 해 준다.
“그니까. 내가 좀 서둘렀지? 미안미안. 아니 근데 진짜, 얘를 빨리 영입을 해야겠는 거야. 그래서.”
형준이 패티를 삼킨 후에 조심스레 묻는다.
“이름이...?”
“송형직.”
이번엔 동철이 소희에게 묻는다.
“얘가 그렇게 대단해?”
“내가 얼마 전에 집에서 교회 가래서 한번 갔거든?”
그런데 학생부 예배 시작 전의 어수선한 틈에, 어디서 많이 본 애가 강대상에 혼자 올라가 앰프에 라인 꽂고 혼자 베이스를 치더란다.
“너 교회 다녀?”
동철의 질문에 형직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실 형직은 함부로 거기 올라가면 안 되는 것이었고, 잠시 후 준비 완료된 찬양단이 올라오자 형직은 당황해서 서둘러 라인 뽑고 내려가려다가 보기 좋게 굴러떨어졌다.
“쭉 봤는데 잘 치더라고. 그래서.”
그러더니 소희가 콜라 컵 커버를 벗기고 한 모금 벌컥 마신 다음 컵을 땅 내려놓고 형직을 가리키며 득의양양
“알고 보니까, 얘 오피. 오피.”
뭔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뭐라고? 형준과 동철이 동시에 물었다.
“너 OP야?!”
형직은 당황해서 쑥스러워하는데 소희는 문득 괘씸한 생각이 불끈 솟았다.
“야 너네 뭐냐? 내가 초A급 AP인 건 놀라지도 않냐?”
“아니 너야 원래 할아버님한테 배운 것도 있고 하니까 보조파일럿 하는 거고.”
동철이 그 부분은 짧게 지적한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묻는다.
“야 근데 OP는 머리 좋아야 하는 건데?”
“너 머리 좋아?”
형준까지 그렇게 한없이 단순하게 질문하니 형직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 뜸을 들이더니,
“...어, 좋아. 머리.”
“야~ 잘 왔다! 너 아주 잘 왔어!”
형준은 몸을 뒤로 젖혀 가며 반가워하더니 몸을 앞으로 확 일으켜 건너편에 있는 형준의 어깨를 툭툭 친다.
“야, 우리 플래닛셰이커가 말야, 공부도 지지리 못 하면서 맨날 논다고 얼마나 눈치 받고 살았는지 아냐? 이제 우리도 공부 잘 하는 애 있다고 해야겠다, 그지?”
하형준의 오버액션을 쌩까며 소희가 일어나 말한다.
“됐고, 일어나자. 다 먹었지?”
“어 잠깐만!”
형준이 그래 말해 놓고 남은 설탕 덩어리 샐러드를 허겁지겁 먹는 동안 나머지 세 명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동철이 물었다.
“연습 가?”
“야, (우적우적) 그럼 당연히 가야지, (꿀꺽) 엉? 새 멤버가 왔는데!”
“다 먹고 말해. 제일 늦는 사람이 내일 빵 사기.”
“기다려, 소희야!”
이제는 삼면을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지방고의 운동장은 그래서 더욱 크고 허전하고 쓸쓸한 노을빛으로 물들려 하고 있었다. 그 오후 네 시의 텅 빈 운동장을 그 넷이서 오른편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근데 얘가 그렇게 잘 쳐?”
“작살난다니까?!”
학교의 오른편 현관은 자전거 자물쇠로 잠겨 있다. 앞장을 선 소희가 그 잠긴 현관으로 걸어가며 자세를 자연스럽게 낮춘다.
“오늘도 이 모양이네.”
문 앞에 쪼그리고 다가가서 문을 밀어 충분히 열리는 현관문 틈새로 오리걸음을 걸어 들어가는 소희의 뒤를, 나머지 셋이 그대로 따른다.
“도둑 들어도 모르겠다.” 형준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동철이 면박을 준다. “훔쳐갈 거나 있냐.”
모두가 동의하는 뜻에서 잠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우측 현관에서 가운데 쪽으로 좀 걸어가면 아래로 이어지는 널따란 계단이 있다. 지하로 하염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이 계단을 걸어갈 때 이야기를 하면, 소리가 위아래로 쩌렁쩌렁 울린다. 동철이 입을 연다.
“근데 여기 원래 이 시간에 잠그는 거 아니래매.”
“진짜?”
형직이 반응을 보이자 형준이 바로 대답해 준다.
“몰랐어? 원래 정비는 여기 5시까지 무조건 남아서 점검하고 가야 돼.”
이건 천하의 신소희도 몰랐나 보다.
“근데 왜 안 남아?”
“왜겠냐? 점검할 게 없으니까 걍 집에 가는 거지.”
“원래대로 하면 너네도 학교 끝나고 내려와서 교육 받고 가야 된대.”
동철의 말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소희가 묻는다.
“누가 그래?”
“원래 그게 규칙이야, 몰랐어?”
“진짜?”
대화가 이쯤 되었을 때는 그들이 학교의 지하 1층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불 꺼진 ‘격납고’는 최소한의 빛만 보이는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거기서 동철이 익숙한 발걸음과 동작으로 스위치가 달린 벽을 더듬어 불을 켠다. 펑, 펑, 펑, 저쪽 먼 구석부터 이쪽으로 천장 조명이 점등되고 있었고, 발 밑이 제대로 보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하던 얘기를 하며 걸음을 다시 떼었다. 소희가 앞서 가며 뒤편에 대고 물었다.
“야, 그럼 원래대로는 우리 지금 다 땡땡이야?”
“그런 셈이지.”
“근데 뭐, 학교에서 문을 잠그잖아.”
형준과 동철의 대답에 소희가 맞장구를 친다.
“아 맞네. 완전 웃긴다.”
그렇게 앞서 가는 셋과 거리를 점점 벌리고 있던 송형직을 하형준이 문득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본다.
“뭐해, 형식아? 여기야 여기.”
다시 형준이 돌아서서 가던 길 가는 것을 확인한 형직이 몇 걸음 바삐 따라잡으며 혼자 궁시렁거린다.
“...형직인데.”
천장 높이만 30m를 넘는 격납고의 정 중앙에는 상시 출격 가능 상태의 거대 로봇이 태권도의 준비서기 자세로 학교를 등지고 서 있다. 그 로봇의 머리 위로는 운동장이 있다. 3층짜리 학교 건물의 밑에는 로봇의 왼쪽 뒤편에서부터 지하 대식당과 파일럿 대기실, 비상 발전시설이 위치해 있고 통제탑은 파일럿 대기실과 발전 시설 중간쯤에 따로 높이 서 있다. 로봇의 왼쪽엔 병기반, 오른편엔 시공반, 앞에는 정비반이 있다.
원래는 여기서 밤낮없이 지구방위 기술을 훈련받고 교육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제 여기는 매년 하는 교육훈련만을 정규 수업 중에만 대충 시키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방과 후의 격납고는, 미승인된 밴드 동아리가 한 대의 거대 로봇을 관중으로 세워 놓고 매일 고래고래 연습을 하는 초대형 연습실이 되었다. 드럼과 앰프와 마이크 세트를 짱박을 장소는 진작에 찾았을 정도다.
자기가 칠 드럼을 발전실에서 끌고 나오며 낑낑거리는 형준을 뒤로 하고 동철은 한창 튜닝 중이었고, 형직이 조심스럽게 소희에게 묻는다.
“저기, 이런 건 C섹터에서 해야 되는 거 아냐?”
C섹터라 함은 학교 건물 등 뒤에 동아리 전용으로 조잡하게 조립해 놓은 가건물 구역이다. 항상 학교 뒤쪽 아파트의 그늘 아니면 학교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끔찍할 정도로 음습하다.
“아, 그건 걱정 마.”
“그래도 좀...”
잠자코 튜닝하던 표동철이 듣다 못해 한 마디 한다.
“야, 그럼 넌 그 곰팡내 나는 데서 베이스가 치고 싶니?”
형준도 마침 마지막으로 양손에 심벌을 들고 나와서 거든다.
“그리고 거기서 연주하면 주민신고 땜에 쫓겨나서 안 돼.”
형직은, 납득은 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게 많아 불편하다는 심기를 애써 감추고 있었다. 소희가 그걸 알아차렸다.
“됐고, 얘 악보 줘. 일단 쉬운 걸로 한 곡 가자.”
형직은 악보를 한 번 훑어보고서야 할 일은 하겠다는 표정으로 아까부터 메고 있던 베이스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앰프에 꽂고 조율을 했다. 물론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럼 세팅이 훨씬 더 늦게 끝났기 때문에 베이스 때문에 시작이 늦어지지는 않았다.
세팅이 끝났다.
사방이 콘크리트로 조악하게 마감되어 음악을 연습하기에는 한없이 부적절한 그 격납고 안에, 세미한 하울링이 무슨 환청 혹은 백색 소음처럼 울리고 있다.
소희가 마이크 스탠드를 붙잡고 앞으로 기대는 자세를 하고 있다가, 그녀의 뒤에 자리한 세 명을 한 번 쭉 둘러보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