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가 좀 덜 내리게 되었으므로 그제야 그들은 거길 가볼 생각이 났다. 간밤에 그들이 사람을 죽인 곳을. 숫자로 말하자면 일가족 총 세 명을, 행정적으로 말하자면 관악구 어딘가의 반지하에 세들어 사는 세 명을, 언론 보도를 인용하자면 '모 노동조합 지부장 모씨와 그의 언니인 발달장애인 모씨 그리고 그의 10대 딸 모씨'를 죽인 그곳을.
이동 중 그들이 보인 굳게 닫힌 입과 별다른 표정이 없는 그 얼굴은 언뜻 보면 최소한의 염치를 가진 일반인, 혹은 그 죽음에 대해 송구함을 표해야 할 입장인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창문 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근엄하게 생각했던 것이란 실은, 근데 관악구가 어디쯤이었지, 아 모르겠네 안 간지가 오래 돼서, 따위의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렇게나 태평했다. 아니지. 어떤 종류의 살인은, 제 몸과 제 정신을 완전한 거짓으로 둘러입고 사는 자만 할 수 있는 법이니까, 고쳐 말하건대, 그들은 그렇게 내내 태평할 생각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오와 윤은 거의 동시에 그 자리에 도착했다. 둘 다 같은 검은색 신사용 대형 우산을 직접 들고, 노란색 윗옷을 입고 현장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 자리에 가까워올수록, 안 그래도 축축한 골목에 비가 다 마르지 않아 더욱 질척거리는 듯한 땅과 공기,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현장을 보존하고 수습하기에 여념이 없는 일선 경찰과 공무원들, 그 모든 갑자기 낯설어진 주변을 걱정스럽게 구경 나온 주변 주민들, 그들이 뿜어내는 인열 등등에 대해서, 윤도 오도 거의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반사적으로, 그 어떤 악의도 없이, 받은 메스꺼움을 그대로 뱉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들의 평소 습관대로.
서성이던 윤과 오는, 그 주변에서 상황을 설명하던공무원에게 다가가서 가만히 경청하는 것으로, 그 심리적 알리바이 형성 작업에 착수했다. 그 설명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모른 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실 바로 그것, 모르는 체하기야말로 그들의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었다. 그들이 그간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그 나이가 되도록 이렇달 굴곡 없이 출세가도를 타고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기득권층으로 편입한 덕분이다. 계획적인 살인범은 공모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들은 다른 살인범들이 꼬드겨 세운 공모자였고, 이제 그들 자신도 경력 살인범이 될 참이었다. 차라리 그 자리는 자격 시험에 가까웠다.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하게 모르는 체를 해야 했다.
오는 그래도 비슷한 걸 몇 번 해 본 입장이었지만, 윤은 이런 종류의 시험이 처음이었던지라, 아무래도 그렇게 속단했던 거 같다. 이거 너무 쉬운 거 같은데. 그냥 적당히 걱정해 주는 말이나 해 주고 혀나 좀 차 주고 명복이나 빌고 가면 되겠구만. 속단한 것은 속결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윤이었으므로 그는 그 주변에 나와 있던 다른 주민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넌지시 혼잣말처럼 말을 걸어 물었다. 근데 여기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은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 "미리 대피한다는 게 가능한 줄 아느냐, 15분도 지나지 않아서 순식간에 모든 게 급변한다, 순식간에 땅이 꺼지면서 삽시간에 물이 불어나는 걸 모르느냐" 같은 말이 들려왔지만 윤은 전혀 듣지 않았다. 자기가 말했고 상대방이 반응했다. 그러면 대화는 성립한 것 아닌가.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오는 그걸 옆에서 바라보며 내심 걱정했다. 이러다가 우리가 범인인 걸 들키는 건 아닐까 하고.
윤은 내친김에 사건과 관련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다른 말도 더 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대피하고 싶어도 수압 때문에 문이 안 열리게 되기 때문에 못 나간다" 하는 누군가의 고성이 끝나가고 있었어서, 그걸 요령 좋은 반말로 뚝 부러뜨리고, 거기에 제 말을 찔러넣었다. 아 문이 안 열려서? 아니, 어제 엄청났던 것이, 서초동에 우리 제가 사는 그 아파트가, 전체적으로는 좀 언덕에 있는 아파트인데도, 거기가 1층이 지금 물이 들어와가지고 침수될 정도니. 제가 퇴근하면서 보니까 벌써 다른 아파트들도 아래쪽에 있는 아파트들은 벌써 침수가 시작이 되더라고. 그러니 뭐. 제가 있는 아파트가 약간 언덕에 있잖아요. 그런데도 그 정도니. 그건 분명, 제깐에는 최선을 다해서, 보아하니 참 힘들어 보이던데 당신들도 참 힘들었을 거 같고 여기 사셨던 분도 참 힘드셨을 거 같다, 하는 소리를 한다고 한 셈이었다. 무식해 보이리만치 무모했을지언정 틀리지는 않은 연기였다. 어떤 비전문가가, 살인범이, 자기가 죽인 사람을, '힘들었겠다'고 공감해 줄 거라고 믿겠는가.
오는 이쯤이면 됐으니 적당히 다시 자리를 뜨고 싶었다. 적당한 곳에 숨어서 뉴스를 지켜보며 자기가 다시 나서도 되는 시점을 골라야 했으니까. 하지만 윤은, 자기의 범행 현장에 처음 와 본 살인자답게, 현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시 가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어느샌가 그의 발걸음은 그 반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말렸다. "여기는 아직도 여전히 사비로 양수기 써서 물을 퍼올리고 있다. 지하에 6가구가 살고 있다. 당신을 들여보내도 좋은 상황이 전혀 아니다."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층계참을 좀 지난 애매한 위치에 엉거주춤 주저앉아서는, 뭐라도 한 마디 할 생각으로 그 계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보통 사람은, 아니 그 자리에서 그 사건의 범인이 아닌 이상에는 누구도 결코 느껴볼 일이 없는 대단히 특별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 그런가. 이게 여기가 이렇게 됐단 말이지. 그렇군. 여기가 지금 저 사람들 눈에는 이렇게 보이는군. 그런 거군. 그러면서, 그는 별 말 없이 그 자리에 잠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 이상 현장에 다가갈 수는 없다는 공무원의 제지를 받으며 윤은 끌려나오다시피 그 계단을 벗어나 건물 밖으로 인도되었다. 사실 이제 용건은 더 없었지만, 아직 그들은 정말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윤의 입장에서는, 그 세 사람이 실제로 죽어가던 그곳의 정취를 아직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그 반지하방 안을 볼 방법이 있는지 찾고 싶었다. 아마 윤이 '창문으로 탈출 못하나?' 같은 멍청해 보이는 질문을 해서 유도를 받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오와 윤은 그 창문 앞으로까지 안내를 받았다. 그들의 얼굴이 그 창문 앞에 다다랐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어둠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들여다보여지는 저편 방향에서는 역광에 비친 그들의 몸뚱아리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고, 그 속에서마저 그들의 퍼런 안광이 번뜩였을 것이다.
둘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당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안을 바라보기 바빴다. 겉으로야 티가 안 났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은밀한 흥분을 감추며 그들이 살인을 자행한 곳의 진짜 광경을, 그것도 낮밤을 바꾼 시간대에, 어떤 고소, 고발, 탄핵소추, 주민소환, 용의선상 조사 취조도 받지 않는 자유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순간 정도에만 진실로 감각하고 경탄할 수 있었다. 자기가 안전하고 정당하며 우월하고 결백한 존재라는 것을. 자기는 저 자리에서 죽어나간 사람도 아니고, 저런 어둡고 지저분하고 쿰쿰한 곳과 관계 있는 사람도 아니고, 저곳에서 죽을 만한 사람을 죽여 줬을 뿐이라는 것을.
한동안 그런 비정상적인 감각에 도취돼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신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이 우산을 받쳐들고 쪼그려앉아 그 안을 들여다보느라 다리가 저려 와서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이 현장을 뜨자는 뜻에서, 서로 간단한 눈빛만 주고받은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 창문 앞에서 시바이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건 남 일이라는 듯이, 내 일이 아니라는 듯이, 잘은 모르겠지만 참 안됐고 그러니 이건 절대로 내가 죽인 건 아니라는 듯이.
야 이거 참, 왜 대피를 못 했을까. 그러니까요. 왜 대피를 못 했을까요. 햐 참 진짜 이거 반지하가 문제야. 여기는 지대가 낮으니까 이게 다 직격탄 맞잖아. 서울시가 반지하가 너무 많아요. 이거 다 이제 금지시키든가 해야지 이게 무슨 일이야 그래. 우리는 저기 그런 거 없나? 강수량 측정해서 국민들 알려주는 앱 같은 거 없어? 그런 거 좀 만들라고 해봐.
정말 끔찍한 일은 말이지, 하고 그가 새벽 세 시 오 분 경의 무거운 침묵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나는 우선 그의 들어올리는 목소리와 여전히 키보드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열 손가락을 관전만 하고 있으려고 했다. 정말 끔찍한 일은 내일 일어나지 않을 거야. 잠시 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앗차, 나도 그만 그 침묵의 링 안으로 난입했다. 그럼 언제 일어난다는 건데, 내일 일은 별로 안 끔찍하단 소리냐, 무슨 말을 그렇게 모호하게 해, 나도 모르게 너무 자질구레하게 되물어친 다음에 들려오는 컴퓨터 본체 냉각 팬 소리는, 그래서 무슨 야유처럼 내 말이 끝나고서부터 38평형의 텅 빈 사무실에 붕붕 메아리친다. 탭댄스가 잠시 멈추었다. 그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정규방송이 중단된다.
내일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하지만 지금껏 날 곁에서 지켜본 너만은 내일 그렇게 많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 끔찍한 일은 내일 일어나는 일 같은 건 아닐 거니까. 내일 너무 놀라거나 끔찍해하지 마.
그럼 정말 끔찍한 일이란 건 뭔데.
음, 그가 잠시 그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수천 년 전 제 나라 임금의 죄상과 차후 멸망상을 예언하러 가는 선지자가 그렇게 했을 법한 억양과 분위기로 조심스럽게 표현의 2차 시기를 시도했다.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있어?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어느 공항의 모든 교통편과 운항 일정이 전부 끊겼어. 사람들은 갈 길이 멀고 바쁘지만 아무 방도가 없으니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그런데, 이게 중요한데, 공항 측에서 자꾸 무슨 표를 발급해. 어떨 때는 공짜로, 어떨 때는 돈 있는 몇 사람에 한해서. 잠시 후 비행기가 도착하면 제일 먼저 타고 나가게 해 주겠다, 버스가 오면 순서대로 타고 나가라, 소포나 중요한 걸 따로 보낼 수 있게 해 주겠다 운운하면서 말이지. 밖은 위험하니까 절대 나가지 말고 교통편이 올 때까지 무조건 실내에 있으라면서 심심하지 않게 음악이나 DVD도 틀어 주고 말이지. 그런데 이 공항의 유리창엔 온통 선팅이 되어 있단 말야. 왜냐면 밖은 이미, 음, 공항 주변이 싸그리 원폭을 맞고 무슨 호수 한가운데 인공섬처럼 고립되어 버렸거든. 그리고 공항에 직원은 없어. 모든 건 방송과 기계에게 맡겨 놓고 폭격 직전에 참모부터 말단까지 모두 대피했으니까. 사람들은 내일이면, 모레면, 두 시간 되면 다시 원래대로 일정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별 의미도 없는 순번표 수십 장을 지갑 속에 꽁꽁 숨겨놓고 웅크리고 있는데, 공항은 그 반경 5km 근방이 민간 절대 통제 구역으로 영구 지정되는 거야. 자, 그가 속사포같이 쏟아내던 등골 서린 괴담을 중단하고 날 보았다. 그가 고쳐 쓴 안경이 번득이며 내게 물었다. 며칠이 걸릴까, 공항 내 생존자 절멸까지는?
붕, 붕, 냉각 팬 회전하는 소리가, 붕, 붕, 38평형의 텅 빈 사무실에서 수도 없이 메아리쳐 울었다. 그는 다시 모니터로 그 안경을 돌리고, 몇 번의 거액의 주식거래를 대강 마쳐둔 뒤, 마지막으로 몇 개 은행의 개인 계좌 잔액을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USB 메모리를 뽑고 드라이브 포맷 작업을 예약해 두고 일어났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는 대강 짐작했다.
이제 어떡할 거야?
글쎄, 신문배달을 할까 싶어. 나도 내집마련의 꿈을 좀 이뤄야지, 안 그래?
우리는 웃지 않았다. 그 그가 무슨 작은 종이를 두 장 내밀었다. 무슨 영수증이 한 장, 하와이주 어딘가를 가리키는 주소가 적힌 쪽지가 한 장이었다.
이게 뭐야?
천국으로 가는 주소랑, 그건...
조선일보 구독 신청 영수증을 왜 나한테 줘? 이거 우리 집 주손데?
지옥을 보여준다는 순번표야.
나는 영수증에서 떼지 못하던 나의 시선을 번쩍 들어 그를 보았다. 어딘가 대단히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몹시 불쾌해하는, 흡사 지옥 문 앞까지 잠시 순찰을 나간 성 베드로 사도처럼 내게 말했다... 아니 웃어보였다. 드드득, 예약 작업이, 드드드드득, 시작되어, 드드득, C드라이브가 바스러지고 있었다.
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군대에서 물려받아 쓰던 노트에 적혀 있던 초고. 김진혁님의 "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한 문장에 꽂혀 있던 시절에 쓴 것이라 구체적인 시놉은 없고 프롤로그밖에 없다. 이걸 쓸 당시에는 그저 막연히 상상만 했을 뿐인데, 정말 이 그림에 대충 들어맞는 사건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뭐라 할 말이 없달까 도리어 창작 의욕이 솟질 않는다...
한규현의 현대미술강좌 중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에 대한 tribute로서 이 시리즈의 1번을 이걸로 선택했다. (그는 바로그찌라시의 양태가 다분히 현대미술에 가깝다고 골백번 강조했다.) 사실 위주에 각색만 더해서 쓰는 종류의 글이기 때문에 좀더 문학적인 표현과 감성팔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 철판도 한 장이었고 찌라시도 한 장이었다는 사실을 좀더 부각하고 싶었다.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내후성강판이 생각보다 여러 장소에서 사용되더라. 아 그것들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규자의 다음 강좌를 어서 듣고 싶다. 후후
금감원 카페 알바를 이틀만에 짤리고 규장각 가서 작업이나 하려고 버스 타고 신촌 가다가 떠올랐던 소재를, 골치 썩지 말고 그냥 막 화내면서 쓰자는 느낌으로 간단히 옮겼다. 뭘 써놓고 나서 그 후속 에피소드가 모락모락 생각나는 건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운 기분이지만, 일단 추세를 지켜볼 생각. 시드노벨은, 아무리 전체수준이 낮네 로리만 파네 왜색이 짙네 해도, 여전히 가장 한국적으로 라노베를 해석하고 있는 사회이다. 참고로 갑자기 혜화동9시반이 생각나서 용준이란 이름을 따왔다. ㅋ
자료조사를 하면서 예상보다 더 많이 쏟아져나오는 뒷이야기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상당한 격려가 되었다. William Crotch, 오르간에 재능을 보였던 한 어린이가 전공자가 되어 어느 날 교수들이 시켜서 작곡한 한 장의 악보가 빅 벤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는 그의 음악이 캠브릿지 차임스에 사용되는 것 정도만 보다가 영면하였을 것이다. Epics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결자라는 번역어를 생각해 봤는데 이건 좀더 생각해 보자. 여튼 참으로 epic이라 할 만한 얘깃거리였다.
백만년만에 로그인해서 글을 써 봅니다. 잉여는 아니지만... 이런 썰을 풀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일상물", 그것은 생산 및 소비가 과열 팽창해 있는 일본 서사 산업에서 등장한 장르입니다. 시청자의 경험, 미디어가 만들어낸 stereotypes 혹은 그에 준하는, 별다른 엄청난 사건의 기승전결이 없는, 소소한 신변잡기적 일화와 그 주인공으로서 각자의 개성이 잘 설계된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즐기는 장르이지요. 이 장르의 대중화가 <아즈망가 대왕>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큰 반론은 없을 겁니다. <미나미가>라는 명작, <러키☆스타>라는 시대의 총아, <A채널>이라는 극단주의 작품에서 <일상>이라는 제목의 변칙이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주로 미소녀물의 대표 장르 중 하나로 일본 시장에서 정착해 왔고, 그 외의 외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아침드라마'는 일상물이 되지 못하지요. 기승전결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본인은 이런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물이란 '일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비일상이 배제된 상태'를 다루는 것뿐이다."
그것은 일본식 일상물 특유의 클리셰적인 전개 그 자체와, 거기에 일체의 잡음 내지 변수가 배제된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의구에서 왔습니다. 1화는 신학기, 2화에서 5화까지 대충 캐릭터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 6화에서 여름방학과 불꽃놀이와 바다, 7화쯤에서 새 캐릭터, 8화에서 마지막회 직전까지 다시 2학기와 일상과 '문화제', 마지막회에서 뭔가 결말을 내야 하는 이야기 및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이 클리셰적인 프로그램 구성, 바로 이것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등장인물 누구도 어느 순간에도 경제적 위기를 겪지 않고, 부모님 등의 어른이 시종일관 일체 관여하지 않으며, 아파 보아야 감기에 걸리는 정도이고, 뉴스라 할 만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의 이야기란 말이지요. 물론 이런 '있을 법한 것이 없다'라는 반론은 매우 값싸게 제기되고 간단하게 반박되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일상물"의 일상과 우리의 '진짜 일상'이 같을 수 없는 결정적인 다른 이유가 따로 있는데, 그것은 일상물에 최소한의 세월(歲月)의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times)이란 무엇인가? 세월이란 연쇄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시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인간 이성의 본능적 작용에 의한연관 찾기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은, 반복이 되는 듯하면서도 최소한의 인과 혹은 전후가 인지되도록 재구성되고, 그와 동시에, 어떤 일관된 방향이 있는 'season'을 보내면서도 이런저런 돌발 이벤트가 발생하는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당장 여러분이나 여러분 친구의 트위터(혹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가만히, 월 단위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의 일상도 그저 지리멸렬하게 쳇바퀴를 돌고 있지는 않으며,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누구의 일상도 할리우드 추격전 영화처럼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두 가지 패턴 사이의 미묘한 배율, 거기에 일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려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매일이 같지만 매일이 다른 것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당위'와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일상이란 개념에 대한 존재론/인식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실제 일상 생활이란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일상물'의 일상은 바로 이 세월 개념이 완벽하게 배제된, 그래서 클리셰적으로만 운용 및 각색되는 하나의 뼈대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5월 히나마츠리와 여름방학 유카타 불꽃놀이와 문화제와 크리스마스와 신년참배는 그토록 이물감이 느껴지는 작위적인 장면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행사들 중 하나는 거르지 않겠는가 하는 따위의 무성의한 의심 이전에, 왜 그렇게 일련의 이벤트들을 치르는 것이 그토록 맥락 없이 당연하게 떡떡 주어지느냔 말입니다.
2화니까 친해지려고 도시락을 같이 먹고 3화니까 꽃놀이를 가고 4화니까 하복으로 갈아입는 식인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지난 회차의 심경 변화를 이어받는 것도 없고, 새로 설정이 추가되는 일도 극히 드물고, 그 모든 것 이전에 그저 날씨에 맞추어 자동 인형처럼 너무나 전형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이 그 숱한 일상물들의 위화감의 정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대체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의 그 똑똑한 서사 산업 관계자들은 왜 이렇게 일상이 아닌 일상을 뻥튀기 기계 돌리듯이 계속 돌리고 있느냐? 그래야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일상들, 일상에 일정 비율 섞여있음으로서 더욱 일상을 일상답게 하는 변칙적 사건들을 배제하는 것이, 캐릭터들의 특징과 만담과 매력과 모에 포인트를 어필하는 데 조금이라도 여력을 더 투입하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일상물 장르는 초창기에 분명 "일상의 느긋함"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치유계의 범주에 속했던 것이, 점차 쓸모 없는 노출, 패러디, 새 캐릭터로 밀어붙이기 따위로 점철된 "미소녀 캐릭터물" 범주에 속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나미가>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일반적인 범주의 세자매로 버틸 수 없게 되자 일반적이지 않은 범주의 주변 인물을 마구잡이로 동원하여 이제는 일상이라 부를 수 없는 특별한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장르 중 하나가 분명하게 시장에서 승리한 이래 "어쨌든 '미소녀'가 뭔가를 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라는 사고가 공급자들 측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리고 미소녀 캐릭터를 개발한 다음 그들을 출연시킬 곳으로서 가장 안전하게 세울 수 있는 무대가 바로 일상물이 구축해 놓은, "세월이 배제된 춘하추동"의 원형극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쨌든 미소녀들 중 한두 명만 인기를 얻고 나면 어떻게든 된다"라는 안일함이 우후죽순으로 양산한 질 떨어지는 일상물들인 것입니다. <학생회의 일존>, <에비텐> 따위가 여기에 속합니다. 차라리 줄거리라도 있었으면 욕이라도 덜 먹었을 것을, 오로지 개성 있는 캐릭터가 매회 바다다 합숙이다 도전과제를 해내는 따위의 이야기로 때우면 어쨌든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무책임하게 만들어진 작품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물에 대한 재정립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와전된 개념―"비일상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목가적 가능세계"―이 아니라, 세월이 존재하고 캐릭터가 그 세월에 반응하는 식으로 굴러가는, 상황과 인물 성격과 세계관 설정에 더 구체적인 현실성이 부여된 채 그런 세상의 별다를 바 없이 매일 흥미진진하고 잔잔하게 파도치듯 일렁이는 삶의 향연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잘 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쓸 수 없다면 애당초 일상물이 아닌 다른 장르나 소재나 기승전결을 구상하기 위해 '딴 데 가서 알아봐야' 할 것이고,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만 일상물을 써낼 때에야 일상물은 소기의 목적 내지 온전한 존재 양태를 달성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픽션과 서사를 통해 구제받고 부각되어야 할 중요한 소재의 하나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월의 개념이 "일상물의 일상"에는 없게 되었기에, 그 개념을 일상물에 넣든지 아니면 일상물 장르를 폐기하든지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야 관계자가 아니니 속사정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비자로서 이 한 가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다지 모에하지도 않은 미소녀들이 그 밥에 그 나물로 따분하게 보내는 사계절로 구성된 13화 분량의 산업 쓰레기가, 다시 또 양산되어 재고로 쌓일 뿐입니다.
이미 영화나 책으로도 여러 번 다뤄졌었고 야구 팬들이라면 대충 다 알지만, 소재 자체가 워낙 파워풀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이런 류의 글을 쓰려고 일부러 관련 영화를 다운받아 본 건 처음인 듯. 그거랑, 초반 도입의 hook이 약하다는 이전 버전에 대한 피드백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갈아엎은 게 잘한일. 공유를 해 주신 분이 "눈물도 살짝 날 뻔했다"라고 코멘트해 준 걸 봤는데 눈물이 살짝 날 뻔했다. 수많은 잡지들의 막대한 텍스트들을 보고 기가 죽으려고 하는 이 시기에 큰 힘이 되었다.
이 괜찮은 소재를 잘 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좀더 흥미진진하게 각색해서 쓸 걸 그랬나 싶다. 소창영이란 사람은 이후 SBS의 <세상에 이런일이> 취재진이 수소문했을 때 찾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센세이션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글에서도 언뜻 비쳤지만, 우리나라의 생방송 사고 역사가 음모론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뜻깊다.
'바로그페북 페친들이 라즈베리 파이에 관심을 가질까?'라고 지레 겁먹고 들어갔던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어려웠다(내 기억이 맞다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세 번인가 했다). 특히 도입부가 어려웠다. 생소한 것을 소개할 땐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법한 소재를 쓰니까 바이럴이 알기 쉽게 터진 글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소재에 천착할 순 없는 법. 어떡하면 아즈망가 대왕이란 만화 자체의 대단함을 각인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만화의 '구별됨'에 집중하게 됐다. 조사 과정에서 고바우 영감으로 소재를 바꿀까 고민했었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의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똑똑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모든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출처]
이번 화에서는 연주 장면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작품에 쓰려고 만든 데모 부틀렉이 스튜디오애니멀 본사 창고에 있다는 모양인데 실제로는 접해 보지도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은 필자가 상정한 이미지에 맞는 곡들을 가지고 억지로 묘사를 해 보기로 한다.
분량이 갑자기 길어졌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13회 안에 구겨 넣으려다 보니 안배가 안 되기 시작하면서 좀 조급해진다. 원래 시나리오를 전부 하나가 되게 써 놓은 덕분에 토막을 내기가 어렵다. 발상을 바꾸어 읽을거리가 많아졌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말이 너무 길어졌다. 나머지는 이제부터 재개할 서사로 말하겠다.
세팅이 끝났다.
사방이 콘크리트로 조악하게 마감되어 음악을 연습하기에는 한없이 부적절한 그 격납고 안에, 세미한 하울링이 무슨 환청 혹은 백색 소음처럼 울리고 있다.
소희가 마이크 스탠드를 붙잡고 앞으로 기대는 자세를 하고 있다가, 그녀의 뒤에 자리한 세 명을 한 번 쭉 둘러보고 물었다.
“준비됐지?”
잠시 후 형준이 스틱을 네 번 치고, 4인조 플래닛셰이커의 역사적인 첫 연습이 시작됐다.
지구방위고등학교
#2 우리는 지방고 플래닛셰이커였다
형준의 드럼이 잠시 쿵짝거리며 독주를 하는가 싶더니 동철의 기타와 형직의 베이스가 동시에 들어오면서 메인 모티브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일단 연주는 별다른 변주 없이 각자의 악보대로 진행됐다. 베이스 라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기타 역시 지난 며칠 간의 맹연습으로 커버한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카피를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 수준이긴 했다.
세 명의 그루브가 아직은 맞는 듯 안 맞는 듯 위태위태한 가운데 30초가 훌쩍 지났고, 이제 소희가 특유의 당찬 소리 대신 일부러 그 발성을 죽인 듯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연주에 올라올 차례였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난 정말
항상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이젠 아냐 이제 난 당신 없인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사실 이 곡은 메인 모티브가 거의 연주의 전부를 차지하고 semi-chorus에서의 제2모티프 그리고 후반부 ‘달리는’ 파트에서만 신경을 쓰면 되는, 무난한 모던록이다. 원곡의 달리는 파트에서는 신디사이저가 메인으로 들어오지만, 키타(숄더 키보드라고 하는 건반악기)나 신디사이저가 없는 것도 문제고 있다 해도 관리가 어렵고 해서 여러 이유로 신디 파트는 소희가 육성으로 카피하기로 덮어둔 채 플래닛셰이커에 신디는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재 플래닛셰이커는 기타리스트 보컬과 기타, 드럼 그리고 방금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베이스의 4인조 진용을 갖추었다.
내가 좋아하던 많은 것들도
이제 내게 의미가 없고
이제 난 당신과 함께할 뿐
소희의 목소리가 사운드 전반을 덮고 있는 동안 동철은 자기 연주 잡기 바빴고, 형준은 동철과 소희의 눈치 그리고 형직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기 바빴고, 형직은 이 곡의 주된 루프를 파악하자 점점 눈치를 보지 않고 있었다.
이때 verse의 마지막 한 줄을 남겨 놓고 소희가 나머지 세 명 쪽으로 돌아섰다. 신호를 주는 것이었다. 이제 세미코러스로 넘어갈 것이었으니까.
그게 나의 행복이에요
과연 이제 막 들어온 베이스는 처음 보는 악보를 재빠르게 읽어내고 아까와는 사뭇 다른 리프를 카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하이햇이 퉁탕퉁탕 두드려 맞고 있고, 소희는 ‘요’를 한참 길게 뽑고 있었다. 이제 세미코러스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잠깐.”
소희가 왼손을 들어 연주를 멈추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린 순서대로 드럼, 기타, 베이스가 연주를 그만두었다. 다들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듯 소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스 진짜 안 들린다.”
“그러니까.”
형직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두었다가, 형준의 대답을 듣고는, 쟤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소희가 거기에 덧붙인다.
“넘어갈라 그랬는데, 앰프 터질 거 같애서 안 했거든.”
“잘 했어.” 동철도 한 마디 한다. 그렇지 않아도 기존의 기타 라인, 보컬 라인에 더해서 이번엔 베이스까지 한 개의 앰프에 다 꽂아 쓰다 보니 동철 역시 아까부터 입력이 오버될까 봐 시원스럽게 스트로크를 긋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스까지는 무리인가...”
소희가 이제 생각을 해 보겠다는 뜻으로 말끝을 흐리는데 이번엔 형준이 오른손을 들고,
“내가 말야.”
발표를 시켜주길 바라는 눈치다. 모두가 주목하는 것 같자 형준이 잽싸게 들어온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생각해본 게 있거든.”
“?”
이번엔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형준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 봐.”
그러고는 일어나 모두를 가로질러, 로봇의 오른팔 아래를 지나 일직선으로 저쪽 가장자리의 정비반으로 들어간다.
정비반 내부는 여기저기 그을리고 잘려나가는 등 한 번도 교체해본 적 없어 보이는 단단한 작업용 나무 책상 몇 개가 있고, 벽 한 쪽을 가득 메운 각종 공구며 자재며 아직 덜 끝난 작업물로 가득한 찬장이 있다. 그 반대편 벽 저쪽 구석에 달린 출입구를 열고 들어온 형준이 불을 켜자, 보호창으로 덮인 형광등과 전등갓을 쓴 백열전구에 그리 밝지 않은 빛이 들어왔다. 깜박거리며 켜지는 형광등 빛을 헤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발걸음으로 형준은 문이 달린 정 반대편 구석으로 급하게 걸어와 찬장 제일 안쪽 아래층 구석을 뒤지며 중얼거린다.
“보자... 그 선을 내가 여따 놨는데...”
그리고 과연 거기서 어떤 검은 선들이 한 무더기 나온다.
“아, 있다!”
그 뭉치를 한아름 안고 형준은 아까 갔던 그 경로 그대로 다시 돌아와서는 나머지 셋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게 웬일, 통제탑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나? 모두가 한참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가 기어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야, 너 어디 가냐?”
표동철이 약간 큰 소리로 불러서 묻는다.
“통제탑에,”
형준은 뒤룩뒤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디를 올라가는 운동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덩치의 소유자였다. 계단을 올라가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서, 대답을 할 때나 이따금 옆을 돌아보아 답을 던져 주었다.
“방송실, 있잖아?”
“너 설마?”
“어, 그 설마야!”
방송실이란 말을 듣고서야 다들 그 검은 줄들이 뭔지를 눈치챘다.
“이게 라인 젠더랑 연장선이거든?”
지금 형준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면 상상도 못 했고 실천도 못 해봤을 만한 계획을 실행해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대식당이 3번인데 여길 기타로 깔구, 병기반이 왼쪽이니까 여기따 5번 라인 줘서 베이스 틀고, 6번 라인으로 시공반 쪽에 깔아서 드럼이 출력되게 하는 거야.”
음, 눈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설명하겠다. 한마디로, 지금 형준은, 통제탑에 있는 격납고 방송 시스템을 멋대로 만져서 각 구역의 스피커를 악기 연주에 이용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여기쯤 말했을 때 이미 형준은 통제탑의 허술한 출입문을 따고 들어가 전방 강화유리 창문을 열고 있었다.
소희가 묻는다. “그럼 보컬은?”
“보컬? 아 그거야,”
창문을 열고 상반신을 한참 앞으로 뻗어 내민 형준이 득의양양하게 머리 위를 가리킨다. 천장 H빔 서까래에 달린 조명 사이사이의 스피커들이 보인다.
“당연히 1번 중앙방송이지!”
이때 형준의 안경이 천장 조명을 받아 쨘 하고 번득였다.
형준이 위에서 “이건 베이스!”, “이건 기타!” 등을 외치면서 선의 한쪽 끝을 집어던지면 아래에서는 시키는 대로 그걸 악기에 연결해서 세팅하고, 위에서는 gain과 전체 프리셋을 맞추면서 소리를 테스트해 보는 식으로 세팅이 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기술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고,
“지잉~”
“와 쩔어!”
뭘 하나 설치할 때마다 감탄하기 바쁜 탓이었다.
둥둥. 챙챙.
“우와 대박!”
디리리리리-익, 뜬뜬 뜨든.
“이거 신기한데?”
아, 아, 하나 둘 하나 둘.
“이거 지금 내 목소리야?”
“테스트 계속해 봐!”
“싫~어!”
“야 소리지르지 마! 여기선 더 크게 들린단 말야! 아나 보컬 gain을 줄일 수도 없고...”
두 번째 세팅이 끝났다. 이번엔 드럼 쪽에도 마이크를 하나 놓고 빈손이었던 소희도 세컨드 기타를 잡았다. 그렇게 세팅해도 중앙방송 믹서는 자리가 남았다. 형준이 이걸 알았을 때 탐을 낼 만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하자면 여기가 거대한 돌비서라운드 시스템 같은 거거든!”
물론 스피커는 조잡한 방송용이지만, 여러 곳에서 여러 개의 스피커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비견할 만했다 하겠다. 다시 형준도 통제탑에서 내려와 드럼 자리에 앉았고, 이제 소희가 신호만 주면 시작할 수 있었다.
“준비됐지? 간다!”
다시 시작된 드럼 독주 두 마디는 이번엔 모두의 오른편에서 들려왔다. 시멘트 벽에 울리는 메아리를 받아 겹쳐 들려오는 드럼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원곡의 드럼 소리와 흡사했다.
그리고 기타와 베이스 리프. 그들의 바로 등 뒤 왼편에 있는, 학생 및 교직원 전체의 최대 150%까지 수용할 수 있는 지하대식당에서는 기타의 메인 모티브가 시원시원하게 울렸다. 오른쪽에서만 들리던 드럼의 비트 위에 베이스가 왼쪽 병기반 스피커로부터 가세하면서 이제 쿵쿵거리는 느낌이 양방향으로 들려왔다. 이건 대단한 감각이었다.
소희가 잡은 세컨드기타는 일단 4번, 모두가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정비반으로 깔았다. 분명히 아까는 네 명의 곁에 있던 앰프에서 세밀하고 자잘하게 나던 소리가, 이번엔 지구방위로봇이 들어찬 거대한 지하 벙커의 사방에서 마치 우연의 일치로 노래를 틀어놓고 합친 것처럼 크고 엉성하게 섞여 들어왔다. 아주 색다르고 좋았다. 그러나 전율을 느끼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었다.
소희가 노래를 시작하자, 메인 보컬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보컬의 등 뒤가 아니라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전체 통제 방송 아니면 수업 종소리만 나오는 그 스피커에서, “...이젠 아냐 이제 난 당신 없인...” 노래가 완전 라이브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소희는 순간 얼떨떨해서 하마터면 가사를 놓칠 뻔했다. 자기 귀로 자기 목소리를 듣는 데 실패할 정도로 신기한 것이었다. 모든 교실과 작업실마다 베이스, 기타, 드럼이 산발적으로 소리를 뿜어 섞고 있고, 그 위로 어떤 크고 조용한 목소리가 “...목마르고 숨쉴 수 없이 거칠어...” 노래를 포괄하여 얹는다.
마지막 하이햇 일곱 번.
4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마지막의 모두 같이 쫙 커지다가 확 멈추는 부분은 실패한 채 기타와 드럼의 잔향이 남아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지금은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하여 경탄할 때였다. 한참 넋이 나가 있던 소희가 “와우! 하이파이브!”를 외치고 뒤로 돌아 점프를 뛰며 나머지 세 명에게 번갈아 하이파이브를 건넨다.
“어때 죽이지?”
형준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맞춰준다.
“어, 끝내줘! 목소리가 막 천장에서 울리니까 짜릿짜릿한데?”
소희의 왼손이 오늘따라 힘차고 화끈한 동작으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치우고 가자’ 제스처를 했다. 베이스를 해체하는 동안 형준은 나머지 두 명에게도 소감을 재촉한다.
“야, 형식아, 괜찮지?”
쳐다도 안 보고 베이스 만지며 대답하던 형직이, 이름을 잘못 불린 데 대해서는 지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는지
“아까보단 잘 들리는데... 그리고 난 형직”
까지 말하면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형준은 동철에게 쫓아가 있었고 형직은 안중에 없었다. 동철도 한창 고무고무 고무되어서 형준과 떠드는 중이다.
“그냥 앞으로도 이렇게 가자! 너 이거 어떻게 생각했냐?”
“어, 그냥, 뭐, 나도 드럼 마이크 써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뭐랄까...”
소희가 마이크 라인 정리하면서 한 마디 거든다.
“가만 보면 형준이가 전기기술에 소질 있어.”
형준은 아주 당황스러워한다. 누군가가 언젠가 자기에게 말하리라고 생각했던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응? 내가? 내가 무슨 소질이 있다고?”
“사고치는 소질이 있지.”
이 목소리는 선생님 2의 목소리다. 음, 그러니까 어른들의 사정상 구체적인 이름은 밝히지 못하는 선생이, 방금 이들이 걸어 내려왔던 계단의 저 위쪽 거의 꼭대기에서 펜스를 붙잡고 내려다보며 혀를 차고 있었던 것이다. 셋이 다 그쪽을 주목했다. 그래야만 했다. 누가 이 시간에 여길 온 것은, 그들에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생님 2의 목소리가 큰 폭으로 불분명하게 울린다.
“이게 누구야, 지구는 안 지키고 사고나 치는 사고메이커들 아니야?”
표가 발끈한다.
“누가 사고메이커에요?! 우리 이름은...”
선생님 2는 그의 말에 관심이 없다. 그냥 하려던 말을 계속한다.
“이놈들아, 공부도 지지리 못하면 지구라도 열심히 지켜야지 놀고 있냐?”
하형준이 송형직 쪽을 한 번 눈으로만 쳐다본 뒤 대꾸했다.
“우리라고 다 공부 못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난 너네들을 잡으러 간다는 억양으로, 선생님 2는 하던 말을 계속하며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간다.
“오냐 그래 그 똑똑한 머리로 뭔 짓을 하길래 이렇게 시끄럽게 구나 볼까?”
위를 쳐다보던 네 명의 시선은 자연히 다시 서로에게로 모였다. 뭣됐다. 이제 어떡하지? 나머지 세 명이 자연스럽게 형준을 본다.
“...얘들아?”
“?”
“내가 뛰라고 하면...”
형준이 허리를 굽혀 집어든 한 가닥 전선의 끝을 보여주자마자,
“전선 뽑아들고”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뛰어!”
거기서 꽥 소리를 지르니, 지금 뛰라는 건지 좀 있다 뛰라는 건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자동으로 자기 악기와 한 가닥 줄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아무 데로나 뛰었다. 형준은 잽싸게 반대편 끝을 뽑아 주러 통제탑으로 달려갔다. 선생님 2는 저 위 우측계단에서 아직도 한창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는 좌측계단으로 애들이 올라가 도망치면 그땐 잡기 어려워진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리고는 다급한 마음에 몽둥이를 휘두르며 괜히 목청만 높인다.
“야이놈들아! 거기 안 서?”
“서란다고 서는 병신이 어딨긔”
고함소리와 계단 뛰어내려가는 또는 올라가는 소리가 탭댄스 돋게 오후 여섯 시의 격납고에서 신나게 울렸다. 이것이 역사적인 4인조 플래닛셰이커의 첫 연습이었다.
플래닛셰이커가 4명을 모아 학교에서 연습한 게 역사적인 사건으로까지 강조되는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야, 너 밴드 안 할래?”
“네? 저요?”
“그래 너. 너 이름 조안나지?”
사실 그날 안나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입학식 날부터 며칠 내내 영 말이 없고 뭔가 대단히 불만족스럽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쏘아보듯 하는 눈매로 1학년 AP반 맨 뒤에 앉아 자기 등을 째려보고 있던 ‘소문에 따르면 이 학교 교장 손녀딸’인 신소희가, 갑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아침부터 자기에게 그렇게 다짜고짜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놀랍게도 한 번도 안나의 자기소개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소희가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러나 소희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말해 보았자 입만 아프다.
“아 됐고, 밴드 할래 말래?”
”글쎄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그렇게...”
“근데 넌 왜 존대말을 쓰냐?”
“제가 생일이 느려서...”
물론 이건 변명이다. 그녀에겐 특히 소희가 더더욱 남으로 느껴져서인 것뿐이다. 소희는 밴드를 할 생각이 없는 1인을 재빠르게 무시하고 대화를 끊는다.
“아 어떡하지? 밴드를 해야 되는데.”
다리를 앞으로 뻗고 상체를 젖혀 의자를 뒤로 넘길 듯 까딱거리던 소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도, 교실에 들어오는 보조승무원마다 다 불러세워서 일일이 “야, 너 밴드 안 할래?” 물어보고 있었다.
물론 아무도 락밴드 따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상해 보라. 장소는 무려 지구방위고등학교고 때는 2027년이다. 버스로 지하철로 걸어서 학교 교실까지 납시어 자리에 앉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인 사회였다.
다음 날 소희는 A4지에 흑백으로 이따만큼 뭔가를 복사해 왔다. 한 손에는 투명테이프, 한 손에는 그 광고지를 들고 교실 게시판마다 복도마다 화장실마다 그걸 붙이고 다녔다. 라이브 공연 중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모습의 락커 사진으로 지면을 꽉 채운 뒤 그 위로 짧고 굵은 광고문이 올라와 있었다.
지구방위고등학교
유일의
락밴드
REBORN!!!
planetshakers
문의 1-AP 신소희
신소희는 ‘소문에 따르면 이 학교 교장 손녀딸’이었다. 뭐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소희가 광고지를 학교 사방에 붙이고 다니면서 아무나 붙잡고 “야 너 밴드해 보고 죽을 생각 없어?”라고 물어본다는 소문이 전교생에게 퍼진 것은, 비단 소희가 그렇게 ‘나댈’ 것 같이 생기지 않은 세련되고 귀여운 외모여서만은 아니었다.
“플래닛셰이커를 알아?”
“1학년이?”
“야 이거 플래닛셰이커 재결성인가?”
3학년의 나희영, 김국환 그리고 2학년의 윤덕희가 뿜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플래닛셰이커의 팬클럽 <새틀라이트>의 멤버였다.
돌발 과학퀴즈 하나. 행성을 도는 위성이 있다고 치자. 어느 날 그 행성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면 그 위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1번, 같이 없어진다. 2번, 행성이 없어지던 순간의 진행 방향으로 투포환이 날아가는 원리와 같이 날아간다. 3번, 폭발한다. 4번, 돌던 궤적을 점점 축소시켜 한 자리에 고정된다. 음, 실은 나도 정작 문제는 냈지만 답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몇 년 전 지방고 동아리 통폐합 대집행 때 플래닛셰이커라는 행성을 잃어버린 새틀라이트에게, 정답은 1번이었다. 학교의 명물이 될 수도 있었던 이 락밴드는 면학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안 된다는 학교의 탄압을 받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그때의 영광을 아련히 기억하던 선배들 몇 명만이 구전으로 그 존재를 전해 왔다. 그것을 나희영이 1학년일 때 2학기에 당시 3학년이던 몇 명이서 부활시켰다. ‘지구를 지키는 고등학교’의 락밴드 동아리는 패기부터가 다르다. 나희영과 김국환은 그때 보았던 기절초풍할 감동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들은 훌쩍 졸업하고 중견 기업에 취직해 가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플래닛셰이커 벌써 두 명 들어갔대는데?”
“진짜?”
“저 봤어요.”
“아 깜짝아. 누구세요?”
“저 덕희에요. 윤덕희. 왜 그 재작년 기말 공연 때 중학생인데 왔었던...”
“아 그게 너야?”
“뭘 봤는데?”
“지금 보니까 드러머랑 기타가 들어왔어요. 제가 혹시나 해서 C섹터 가봤더니 있더라고요. 그래서 Anthem 가르쳐줬어요.”
“니가 Anthem을 알아?”
“아 그때 들은 곡들은 제가 다 안다니까요! 어, 근데 저 죄송하지만 이름이...”
“어, 나는...”
나희영과 김국환과 윤덕희가 이 일을 계기로 원년 새틀라이트 멤버로서 자연스럽게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면서 일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2학년 중에는 윤덕희와 더불어, 첫눈에 소희의 당당한 모습(과 아마도 외모 버프 때문)에 반해 버린 AP 석미령이 주모하여 새틀라이트의 부활을 도모했고, 1학년 중에서는 주로 멤버들의 친구 위주로 플래닛셰이커의 부활과 새틀라이트의 재집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제대로 된 활동을 한 게 없으니 나설 기회가 없었다 뿐이지, 일이 여기까지 오자 플래닛셰이커의 부활과 새틀라이트의 존재는 학교에서 공공연한 것이 돼 버렸다. 다만 이번 학기에 기말 공연 잡혔네 멤버가 벌써 4명으로 갖춰졌네 하는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 일이 진행되는 것이 없어서 판을 벌인 소희 입장에서는 초조하던 차에 오늘 드디어 베이스를 영입했고, 뜻밖에 격납고 믹싱 체제까지 성공해서 몹시 기분이 좋았다. 다만 망할 놈의 당직선생 때문에 저녁 일곱 시나 다 되어서 복날 개처럼 헐떡일 수밖에 없었을 따름이었다.
숨을 고른 소희가 주변을 둘러보니 번화가로 들어온 길이었다. 코코아톡 알림이 와 있었다.
표동철: 다들 어디야?
표동철: 난 일단 선생 따돌림
표동철: 나만졸라따라와 미친병기
하형준: 일단학교근처에 짱박혀있는중ㅋ
송형직: 집.
소희가 답장할 말을 생각하다 말고 궁금해서 물어본다.
신소희: 벌써 집갔어?
송형직: 학교 옆이야, 우리집.
신소희: 헐ㅋ
다시 위치 파악으로 돌아간다. 다들 족히 15분은 뛰거나 숨거나 따돌리기 바빴기 때문에 서로 잘 피했는지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신소희: 학교근처 어디
하형준: 나PP렌트
형준은 지금 만화 소설 비디오 종합대여점 체인으로서는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PP렌트 한구석 CCTV 바로 아래 초조하게 쪼그리고 앉아, 미처 다 넣지 못한 라인을 얼키고설킨 그대로 책가방에 우겨넣고 있었다.
송형직: 거긴 왜?
하형준: 아직라인정리 다못했거든ㅋ가봐야돼
신소희: 가긴뭘가? 내일해
표동철: 그래 그만하고 내일하지
이때 소희한테 전화가 온다. ‘할아버지’다.
“여보세요?”
“방금 당직선생이 전화가 왔는데, 너 또 학교에서 밴드했냐?”
“...네.”
코코아톡 알림은 통화 중에도 계속 온다. 귓전에 댔던 휴대폰을 좀더 떼야 했다.
하형준: 아맞다
“너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준다고서 억지로 지방고 다니게 한 건 내가 미안한데,”
하형준: 내일 창군기념일이잖아
이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형직도, 골목에서 다시 나갈 길을 찾던 동철도, 와이파이가 잡혔다 안 잡혔다를 반복하는 복잡한 상점가 속의 소희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자꾸 수화기 스피커로 할아버지가 귀찮은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너도 그 나이나 됐으면 공부할 생각을 해야지, 마냥 가수놀이나 하자고 학교 갈 거냐?”
결국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핸드폰 화면을 봤다.
하형준: 낙원상가가자
“그럼 당연히 가야지!”
“응? 뭐?” 기가 차서 터져나오는 한숨이 두어 번 이어진다. “너 진심이냐?”
“네? 아, 아니에요. 그 얘기 아니에요. 저 바쁘니까 끊을게요. 지금 가요.”
송형직: ㅇㅋ.
신소희: ㅇㅇㅋㅋㅋ아개웃겨
표동철: 뭐가 웃겨
신소희: 아몰라 낼 말해줄게 오늘 수고했고 낼봐
곧이어 형준은 PP렌트를 나오며 주변 눈치를 살핀다. 그때 소희는 네거리를 지나 점점 어두워지는 저쪽의 버스 정류장을 찾아 달려가고 있었다. 동철은 일반 주택 반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는 중이었고, 형직은 불도 켜지 않고 옷도 벗지 않은 채 가방만 던져 두고 자기 방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원래 90분 내지 100분짜리 장편 극장용 시나리오로 짰던 이야기를 1쿨짜리 TVA 시나리오로 바꾸다 보니 스토리 전개에만 260분을 소요하는 좀 늘어지는 듯한 시나리오가 됐다. 이 이야기가 만약 재미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두었던 원래의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TV판으로 수정했기 때문이거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지 못한 채 글로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재미있었다.
나머지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서사로 말하겠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 농담은 아주 치밀하다.
원안
스튜디오 애니멀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서 카메라 줌을 아주 크게 당겨 잡으면, 저쪽에 조그맣게 창백한 푸른 점 하나가 보일 듯 말 듯한 거리에서부터, 어두컴컴한 무중력과 진공의 공간을 거의 일직선의 같은 속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에도 그렇게 찾아왔듯이, 이번에도 지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각본
엽토군
화창한 화요일이었다.
지구방위고등학교 1학년 시공B반 교실은 창문을 있는 대로 다 닫고 있던 탓에 그 교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가 밖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오른쪽 턱을 괴고 창 밖으로 눈을 고정한 시공생 표동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이다. 햇빛이 사선으로 비쳐 들어오는 교실에서 혼자 무심하게 창 밖을 보고 있다니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같다. 그리고 잠시 후 동철의 책상 서랍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 너머에서, 전학생이랍시고 교실 앞문을 열고 미소녀들이 등장할 것인가? 그런 일은 한국에서는 없다. 대신,
“조용히 안 해?”
수업시간과 쉬는시간을 혼동하고 미친 듯이 떠드는 3류 실업계 고등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애꿎은 교탁만 매질하는 미묘한 미모의 여교사가 있을 뿐이다.
동철은 그때에야 표정을 무슨 생각 비슷한 것이 났다는 표정으로 조금 바꾸며 교실 앞을 본다.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감수
전경진, 김진혁, 허희정, 고지영, 장선녀, 조은수
쿠구구구구구구구...
그것은 낮고 육중하게 울리며 직감적인 공포를 일으키는 소리를 내며 푸른 별 지구를 향해 가속도 서행도 하지 않고―음, 잠깐, 방금 내가 진공의 공간을 날아오고 있다고 했던가? 그러면 그것은 소리를 낼 수가 없겠군. 다시 말하겠다.
(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무음)...
그것은 별다른 소리는 안 내며 한결같은 속도로 푸른 별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협찬
디시인사이드 한국애니갤러리
동철이 고개를 반사적으로 앞으로 돌렸다가, 문득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겨 교실을 한 번 훑어본다.
국어 교과서를 구겨 판치기를 하는 놈들, 뛰어다니는 놈들, 불량식품 간식 먹는 놈들, 서로 낙서를 주고받는 놈들, 자는 놈들, 잠꼬대에 욕을 섞어 꽥 지르고 다시 자는 놈들.
음, 별일은 없다.
안심한 동철은 다시 앞을 본다. ‘교 훈’, ‘지구를 지켜라’가 걸린 액자 아래로 지구방위사를 가르치는 여교사 구지영이 서툰 솜씨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주의를 끈다.
“얘들아 집중 좀 해. 이제 끝났어. 정리해 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집중을 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동철은 선생을 보고 있었지만, 그건 그냥 달리 볼 것도 없는데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두면 혼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을 뿐이니 무효라 하겠다.
교탁에 내려놓았던 분필을 급하게 집어들며 선생은 말한다.
“자 다시 정리해보자. 뭐랬지? 10여 년 전만 해도 외계인이나 UFO의 정체는,”
칠판으로 휙 돌아선 지영의 오른손이 칠판 가득 어지럽게 적힌 글자들 중의 ‘無’ 자에 닿자마자 분필은 그 글자를 동그라미 치고 선생이 말한다.
“없는 셈쳤다고 했지?”
교사의 말이 칠판에 적은 내용과 큰 차이 없이 겹치기 시작하면서 동철의 귀에 선생의 말은 점점 들리지 않았다. 칠판을 가만히 살펴 보니, 판서는 크게 3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현대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고비에 관한 것이었다.
UFO. 외계인. 2017년까지만 하더라도 이것들은 이 세상에 ‘전면적이고 총체적으로 등장’한 일이 없었다는 이유로 과학계로부터 이미 귀납적 존재 증명을 하지 못했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그 해 12월 3일까지만 말이다.
미 국방부는 그 날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Invasion by Monster’s Falldown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지구방위사 교과서에 따르면, 그 날 “거대 외계도약체”가 서울 테헤란로에 낙하하여 2시간 가량 “축소”한 후 “급팽창”해 다시 날아갔다. 불과 9시간 동안 지구에 닿았다가 사라진 외계 생물은 우리에게만 25조 원 규모의 막대한 참사를 일으켰다.
당장 다음 해에 UN 직속 지구방위회의가 신설되었고, 전세계적으로 군비가 증강되었으며, 한미연맹은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강력해졌다. 우리나라는 그 외계도약체의 피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받은 나라로서 특히 이 문제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 국민들의 대처 역량을 강화하고 한미연합 및 지구방위회의를 위한 전력과 인재를 증강하는 목적의 특수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지구방위고등학교’가 설립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동철이 칠판의 세 번째 단쯤을 보고 있는데 마침 교사가 목청을 높인다. 아마 수업시간이 지났는데 종이 울리지 않아 마지막으로 속도를 높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너네가 이 명문 지방고에 다니고 있는 거잖니? 어때, 알아야겠지? 시험에 나오겠지?”
누군가가 핀잔을 준다. “몰라요.”
명문이었던 건 정말 한때였다. 그때 훈련은 본격적이었고 장비는 최첨단이었으며 학생들은 전세계의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듬해에 ‘거대 외계도약체’는 오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오지 않았다. 사실은, 그렇게 지난 지 벌써 10년째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벌써 2027년인 것이다.
그리고 구지영이 무슨 핀잔인가를 더 주려는데 드디어 종이 울렸다. 선생은 급하게 교과서와 다른 소지품을 챙겨 나가며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다. 사실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시끄러운 교실이었다.
“얘들아 제발 중간고사 준비 좀 해. 아무리 시공반이라지만, 응?”
누군가가 한 번 더 선생의 등을 떠민다.
“아, 어차피 또 시공반일 텐데요 뭐.”
이쯤 되면 그냥 빨리 나가는 게 상책임을 알고 있는 여교사는 앞문도 닫지 않고 1-시공B 교실에서 도망간다.
이제 이 학교에는 긍지도 없고 지구를 지킨다는 생색도 없다. 이제 지구방위고등학교, 줄여서 ‘지방고’는, 그냥 진학률 낮은 수많은 동네 골칫거리 3류 실업계 고등학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말없이 지켜만 보던 동철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머리를 벅벅 긁는다.
“아이씨, 공부를 하긴 해야 되네.”
혼잣말이 끝나려고 하는데 앞문이 세차게 탕탕거리며 옆 반에서 온 웬 놈이 “야 대박! 완전 대박!” 소리를 지른다.
동철도 그렇지만 웬만한 시공B반 학생들은 모두 다 그를 주목했다. 그가 뜸 들일 겨를도 없이 바로 결론을 말해 버린다.
“지금 신소희가 플래닛셰이커 얘기한대! 중대발표!”
교실이 순간 들썩이고 동철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눈치 빠른 몇 놈들이 창가로 뛰어왔다. 창가 자리에 앉은 동철이 그 주변 분위기를 한 발 늦게 파악하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을 때쯤, 이미 동철은 창 밖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고 쳐다보려는 꼴통 시공생들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싸여 있었다.
간신히 밖을 확인하니, 세상에 무슨 싸구려 일본 드라마도 아니고 구령대 한가운데에 일렉기타를 멘 신소희가 마이크 하나 들고 위풍당당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분위기의 동급생이 포커페이스를 하고 서 있었다.
소희가 학교 창문에다 대고 왼손으로 특유의 삿대질을 해 가며 외친다.
“야 잘 들어!”
가뜩이나 우렁찬 기차 화통 목청에 교장 전용 마이크 라인을 사용하니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부로 플래닛셰이커에 베이스가 생긴다!”
애먼 동급생들과 선배들을 삿대질하던 소희의 왼손이 그 포커페이스로 휙 돌아간다.
따라서 모두의 시선도 그에게로 휙 쏠린다.
“송형직이라고 한다!”
쿵!
“이번 기말고사 직후에 한 건 할 테니까,”
쿠웅!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
쿠구웅!
“이상!”
왠지 이리저리 카메라로 왔다갔다 해야 할 것 같은 강한 임팩트의 외마디 연설이 끝나고, 신소희가 “가자.”라며 형직의 어깨를 툭 치고 마이크 라인을 정리하고 있는데,
“헉, 헉, 헥헥...”
3층에서 한걸음에 뛰어나온 표동철과 하형준이 구령대와 정문 사이에서 헐떡거리며 신소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맞다.”
둘 중 누군가가 먼저 입을 떼긴 뗄 건데 숨이 차서 둘 다 말을 못 하고 있는 상황임을 파악한 소희가, 허리에 오른손을 얹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일러준다.
“내가 너네한테 먼저 말하는 걸 깜박했네.”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애니멀
음, 방금 내가 아까 그것이 한결같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고 했던가?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보니, 그것은 신소희와 하형준과 송형직과 표동철의 머리 위로, 지구로, 10년 전에 지났던 그 궤적을 타고―점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방위고등학교 #1 이것저것 다가오고 있었다
제작
지구방위고등학교 입학처
새틀라이트
스튜디오 애니멀
이 네 명이 잠시 후 햄버거 먹으러 들어간 패스트푸드점 역시, 밖에서 보면 조용했다.
시끄러운 최신 가요 때문에 가게 안의 손님들은 거의 악을 썼고, 그 때문에 이 네 명 역시 거의 악을 썼다. 그리고 혼자만 2인분을 시킨 하형준은, 패티를 우적우적 씹으며 하던 얘기를 한다.
“아니, 그럼 얘기만 미리 좀 해 주지.”
표동철도 동의한다.
“그러니까. 베이스가 필요하긴 필요했잖아.”
“근데 그게 너무 이렇게 갑자기 말이야.”
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신소희가 한 마디 해 준다.
“그니까. 내가 좀 서둘렀지? 미안미안. 아니 근데 진짜, 얘를 빨리 영입을 해야겠는 거야. 그래서.”
형준이 패티를 삼킨 후에 조심스레 묻는다.
“이름이...?”
“송형직.”
이번엔 동철이 소희에게 묻는다.
“얘가 그렇게 대단해?”
“내가 얼마 전에 집에서 교회 가래서 한번 갔거든?”
그런데 학생부 예배 시작 전의 어수선한 틈에, 어디서 많이 본 애가 강대상에 혼자 올라가 앰프에 라인 꽂고 혼자 베이스를 치더란다.
“너 교회 다녀?”
동철의 질문에 형직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실 형직은 함부로 거기 올라가면 안 되는 것이었고, 잠시 후 준비 완료된 찬양단이 올라오자 형직은 당황해서 서둘러 라인 뽑고 내려가려다가 보기 좋게 굴러떨어졌다.
“쭉 봤는데 잘 치더라고. 그래서.”
그러더니 소희가 콜라 컵 커버를 벗기고 한 모금 벌컥 마신 다음 컵을 땅 내려놓고 형직을 가리키며 득의양양
“알고 보니까, 얘 오피. 오피.”
뭔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뭐라고? 형준과 동철이 동시에 물었다.
“너 OP야?!”
형직은 당황해서 쑥스러워하는데 소희는 문득 괘씸한 생각이 불끈 솟았다.
“야 너네 뭐냐? 내가 초A급 AP인 건 놀라지도 않냐?”
“아니 너야 원래 할아버님한테 배운 것도 있고 하니까 보조파일럿 하는 거고.”
동철이 그 부분은 짧게 지적한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묻는다.
“야 근데 OP는 머리 좋아야 하는 건데?”
“너 머리 좋아?”
형준까지 그렇게 한없이 단순하게 질문하니 형직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 뜸을 들이더니,
“...어, 좋아. 머리.”
“야~ 잘 왔다! 너 아주 잘 왔어!”
형준은 몸을 뒤로 젖혀 가며 반가워하더니 몸을 앞으로 확 일으켜 건너편에 있는 형준의 어깨를 툭툭 친다.
“야, 우리 플래닛셰이커가 말야, 공부도 지지리 못 하면서 맨날 논다고 얼마나 눈치 받고 살았는지 아냐? 이제 우리도 공부 잘 하는 애 있다고 해야겠다, 그지?”
하형준의 오버액션을 쌩까며 소희가 일어나 말한다.
“됐고, 일어나자. 다 먹었지?”
“어 잠깐만!”
형준이 그래 말해 놓고 남은 설탕 덩어리 샐러드를 허겁지겁 먹는 동안 나머지 세 명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동철이 물었다.
“연습 가?”
“야, (우적우적) 그럼 당연히 가야지, (꿀꺽) 엉? 새 멤버가 왔는데!”
“다 먹고 말해. 제일 늦는 사람이 내일 빵 사기.”
“기다려, 소희야!”
이제는 삼면을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지방고의 운동장은 그래서 더욱 크고 허전하고 쓸쓸한 노을빛으로 물들려 하고 있었다. 그 오후 네 시의 텅 빈 운동장을 그 넷이서 오른편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근데 얘가 그렇게 잘 쳐?”
“작살난다니까?!”
학교의 오른편 현관은 자전거 자물쇠로 잠겨 있다. 앞장을 선 소희가 그 잠긴 현관으로 걸어가며 자세를 자연스럽게 낮춘다.
“오늘도 이 모양이네.”
문 앞에 쪼그리고 다가가서 문을 밀어 충분히 열리는 현관문 틈새로 오리걸음을 걸어 들어가는 소희의 뒤를, 나머지 셋이 그대로 따른다.
“도둑 들어도 모르겠다.” 형준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동철이 면박을 준다. “훔쳐갈 거나 있냐.”
모두가 동의하는 뜻에서 잠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우측 현관에서 가운데 쪽으로 좀 걸어가면 아래로 이어지는 널따란 계단이 있다. 지하로 하염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이 계단을 걸어갈 때 이야기를 하면, 소리가 위아래로 쩌렁쩌렁 울린다. 동철이 입을 연다.
“근데 여기 원래 이 시간에 잠그는 거 아니래매.”
“진짜?”
형직이 반응을 보이자 형준이 바로 대답해 준다.
“몰랐어? 원래 정비는 여기 5시까지 무조건 남아서 점검하고 가야 돼.”
이건 천하의 신소희도 몰랐나 보다.
“근데 왜 안 남아?”
“왜겠냐? 점검할 게 없으니까 걍 집에 가는 거지.”
“원래대로 하면 너네도 학교 끝나고 내려와서 교육 받고 가야 된대.”
동철의 말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소희가 묻는다.
“누가 그래?”
“원래 그게 규칙이야, 몰랐어?”
“진짜?”
대화가 이쯤 되었을 때는 그들이 학교의 지하 1층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불 꺼진 ‘격납고’는 최소한의 빛만 보이는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거기서 동철이 익숙한 발걸음과 동작으로 스위치가 달린 벽을 더듬어 불을 켠다. 펑, 펑, 펑, 저쪽 먼 구석부터 이쪽으로 천장 조명이 점등되고 있었고, 발 밑이 제대로 보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하던 얘기를 하며 걸음을 다시 떼었다. 소희가 앞서 가며 뒤편에 대고 물었다.
“야, 그럼 원래대로는 우리 지금 다 땡땡이야?”
“그런 셈이지.”
“근데 뭐, 학교에서 문을 잠그잖아.”
형준과 동철의 대답에 소희가 맞장구를 친다.
“아 맞네. 완전 웃긴다.”
그렇게 앞서 가는 셋과 거리를 점점 벌리고 있던 송형직을 하형준이 문득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본다.
“뭐해, 형식아? 여기야 여기.”
다시 형준이 돌아서서 가던 길 가는 것을 확인한 형직이 몇 걸음 바삐 따라잡으며 혼자 궁시렁거린다.
“...형직인데.”
천장 높이만 30m를 넘는 격납고의 정 중앙에는 상시 출격 가능 상태의 거대 로봇이 태권도의 준비서기 자세로 학교를 등지고 서 있다. 그 로봇의 머리 위로는 운동장이 있다. 3층짜리 학교 건물의 밑에는 로봇의 왼쪽 뒤편에서부터 지하 대식당과 파일럿 대기실, 비상 발전시설이 위치해 있고 통제탑은 파일럿 대기실과 발전 시설 중간쯤에 따로 높이 서 있다. 로봇의 왼쪽엔 병기반, 오른편엔 시공반, 앞에는 정비반이 있다.
원래는 여기서 밤낮없이 지구방위 기술을 훈련받고 교육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제 여기는 매년 하는 교육훈련만을 정규 수업 중에만 대충 시키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방과 후의 격납고는, 미승인된 밴드 동아리가 한 대의 거대 로봇을 관중으로 세워 놓고 매일 고래고래 연습을 하는 초대형 연습실이 되었다. 드럼과 앰프와 마이크 세트를 짱박을 장소는 진작에 찾았을 정도다.
자기가 칠 드럼을 발전실에서 끌고 나오며 낑낑거리는 형준을 뒤로 하고 동철은 한창 튜닝 중이었고, 형직이 조심스럽게 소희에게 묻는다.
“저기, 이런 건 C섹터에서 해야 되는 거 아냐?”
C섹터라 함은 학교 건물 등 뒤에 동아리 전용으로 조잡하게 조립해 놓은 가건물 구역이다. 항상 학교 뒤쪽 아파트의 그늘 아니면 학교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끔찍할 정도로 음습하다.
“아, 그건 걱정 마.”
“그래도 좀...”
잠자코 튜닝하던 표동철이 듣다 못해 한 마디 한다.
“야, 그럼 넌 그 곰팡내 나는 데서 베이스가 치고 싶니?”
형준도 마침 마지막으로 양손에 심벌을 들고 나와서 거든다.
“그리고 거기서 연주하면 주민신고 땜에 쫓겨나서 안 돼.”
형직은, 납득은 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게 많아 불편하다는 심기를 애써 감추고 있었다. 소희가 그걸 알아차렸다.
“됐고, 얘 악보 줘. 일단 쉬운 걸로 한 곡 가자.”
형직은 악보를 한 번 훑어보고서야 할 일은 하겠다는 표정으로 아까부터 메고 있던 베이스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앰프에 꽂고 조율을 했다. 물론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럼 세팅이 훨씬 더 늦게 끝났기 때문에 베이스 때문에 시작이 늦어지지는 않았다.
세팅이 끝났다.
사방이 콘크리트로 조악하게 마감되어 음악을 연습하기에는 한없이 부적절한 그 격납고 안에, 세미한 하울링이 무슨 환청 혹은 백색 소음처럼 울리고 있다.
소희가 마이크 스탠드를 붙잡고 앞으로 기대는 자세를 하고 있다가, 그녀의 뒤에 자리한 세 명을 한 번 쭉 둘러보고 물었다.
이제 인기는 검색어에서 확인되고
막장은 드라마의 세상이 되었다
청춘은 콘서트로 기획되며
강남엔 이제 좌파가 산다
희망은 고문이 되었고
댓글은 알바가 달고
노예는 계약되었고
하의는 실종됐다
문득 묻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월가는 점령되었을까
언제부터 촛불은 시위를 나갔을까
언제부터 우린 그렇게 스마트했을까
언제부터 투표가 나쁠 수도 있었을까
언제부터 모든 게 서바이벌이 되었을까
언제부터 우리의 집회는 불법적이었을까
언제부터 버스를 타며 희망을 걸게 됐을까
그냥 단순하게 즉흥적으로 써봤음.
저들에게 어휘를 빼앗기지 맙시다. 무슨 개념이든 좋으니 우리가 선점합시다. 잘못된 신조어라고 생각되는 거 있으면 제보해 주세요 추가해 넣게.
이 반도에선 50년째 뭐 하느냐고 시허옇게 비웃으며 유유히 헤엄쳐 가는 구름, 솜털구름, 새털구름
20사단 결전교육대에서 훈련 잘 마치고 지금은 5823부대 1중대에 있습니다.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이포우체국 사서함 2호 제5823부대 1중대 2소대 2생활관 이병 김어진 앞으로 읽을거리 좀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후속작 "자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줄은 "흙빛이다."로 시작할 거고 그 다음은 생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