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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혜자’를 넘어서

2016. 6. 17. 06:58

GS25를 순전히 도시락 때문에 간다.

학교에 편의점이 GS25밖에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김혜자의 MOM 도시락 브랜드가 런칭되기 전에도 GS25는 원래 도시락을 잘 하는 업체였다. 내가 ‘아 이제 가급적 GS25로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무렵, 편의점 도시락은 대체로 2500~3500원 선이었다. 싸게 먹으면 2800원, 큰맘먹고 좋은 것 집으면 3500원, 혹은 싼 것에 음료수 할인구매를 붙여서 3700원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GS25의 ‘갓혜자’ 도시락들은 전부 3000원이 넘는다.

개인적으로 이 어찌된 귀신 곡할 노릇인지 지금도 그 영문을 모른다. 도시락 하나를 삼천 원 넘게 받고 주는 게 무슨 ‘갓혜자’인가? 누구 말마따나 어디 가서 밥버거 두 개를 배부르게 먹을 돈일 뿐더러, 삼각김밥 3개를 사도, 아직은, 삼천 원이 넘지 않는다. 그런데 부르기로는 여전히, 도시락 하나가 3000원에 좀더 푸짐해졌다는 이유로 ‘혜자스럽다’라는 말을 만들던 그 시절의 감각 그대로, “갓(god)혜자 상품”이라 부르고 있다.

아니, 사실은 무슨 영문인지 잘 안다. 사실은 이것 비슷한 사태가 나라처럼 생긴 이 지옥 반도 사방에서 가열차게 일어나는 중이다. 지금 우리는 공급자에게서, 기업에게서, 자본에게서 상품과 서비스와 인간적 규모의 합리성을 구하지 않는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둘러보면, 도대체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들에게 구하고 있는 것은 ‘은혜’다. 그것도, 거의 자선에 가까운 은혜.

잠시 은혜라는 개념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독교적 용어의 은혜란, 창조주적 존재가 피조물적 존재에게 별 이유 없이 베푸는 호의 또는 그 결과의 소득을 의미한다. 두 가지 핵심은 영향력 관계의 절대적 일방성, 그리고 타당성 확인 없이 임의적으로 (arbitrarily) 주어진다는 점이다. ‘선물’에 자주 비유되는데, 그러므로 받는 쪽은 주는 쪽에게 원칙적으로 요구를 할 수 없으며, 주는 쪽의 호의에 감사하는 것이 받는 쪽의 할 일이고, 주어지지 않거나 다소 엉뚱해 보이게 주어지더라도 혼자 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은혜 관련 교리의 핵심이다.

이 교리는 그야말로 교리, 신앙, 종교의 차원이기에 성립한다. 다시 말하자면, 영향력 관계가 절대적으로 일방적이기 때문에 그 선물은 ‘은혜’가 되는 것이며, 그 선물을 주는 이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로, 우리는 토기장이의 손 안의 진흙으로 인정된다. 일상적 차원의 ‘선물’이 은혜와는 엄연히 실천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선물이란 때로는 받는 쪽으로부터 요구되기도 하고, 주는 쪽이 일종의 책무를 가지는 경우가 상황 맥락에 따라 있을 수도 있잖은가. 그것은 사람 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감히 사람이 베풀 수 없어 보이는 크나큰 호의가 베풀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은총은 은혜의 다른 말이다.)

이 시점에서 잠시 편의점 도시락이란 게 뭔가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편의점 도시락을 GS25로부터 선물받는가?

아니. 돈 주고 산다. 바싹불고기도시락을 진열장에서 꺼내서 계산대에 올려놓을 때, 누구도 ‘구하옵나니 제게 이것을 내려 주옵소서’ 빌지 않으며, 바코드가 두어 번 찍힌 다음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질문을 받았을 때 황송해하는 사람은 없다. 내 돈 주고 내가 사 먹는데 무슨 놈의 선물이야? 우리는 오히려 포장지에 쬐끄맣게 붙어 있는 “음료 무료 제공” 광고를 귀신같이 확인하고 “이거 사면 OOO 주시죠? OO맛 있어요?” 너무나 당당하게 묻는다. 굳이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그 당연함을 조금 벗겨내자. 우리의 구매 행위는 단 한 번도 선물을 받거나 은혜를 입는 과정이었던 적이 없다. 거기에는 지불, 제공, 그리고 그 거래 바깥의 사회적 합의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요소만이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왜 값싼 도시락을 파는 (것으로 선전되는) 이를 일종의 ‘신(god)’으로, 그 도시락을 은혜로 받아들이는가? 뭐 간단하다. 돈이 신이거든.

굳이 물신(物神, mammon)이 뭔지를 백과사전 뒤져서 설명할 것도 없다. 그 설명들은 밥값 몇천 원과 보증금 몇천만 원을 겪어 보지 못한 형이상학적 서술이기 때문에 별로 설명력이 없다. 물신은, 배금주의나 수전노적 행태의 숭배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허구적으로 부여받은 신적 권위를 실제적으로 행사하는 가치 저장 체제라는 차원에서 신이라 불릴 따름이다. 초고도로 발달한 신고전적 시장 경제 체제에서, 이 허구적 권위는 정말 그럴듯하게 부여된다.

돈님께옵서는 자기의 권능을 내보일 때는 저 멀리 무슨 기업의 시가총액이나 강남 어디의 전세집 같은 곳에서 자신을 한없이 높여 감히 사람이 거역치 못할 온갖 위력을 떨치다가도, 가끔은 낮고 천한 편의점 같은 곳에 임하셔서 우리의 몇천 원 푼돈의 노력으로도 한 끼 밥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신다. 개념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지만, 큰 의미에서 보면 물신이 관통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같은 상황이다. 적어도,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는 점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무력하다. 백날 모으는 ‘포인트’가 티끌 모아 티끌인 것도 문제지만, 돈님의 진노 앞에 우리는 하룻밤 들꽃처럼 시들어 버릴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는, 돈님께서 그 은총을 거두시면 누구나 즉시 춥고 배고프고 정처 없는 신세가 된다. 도시가스 민영화에 따른 가격 합리화! 프리미엄 건강 혜리 도시락 4900원! 사람 세 명 누울 월세방 하나가 1000에 70! 정말이다! 모세가 노래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잘 모르겠지만, 당장 우리가 돈을 우리 통장에 모시지 않으면 무슨 참혹한 형벌이 주어질지는 넘나 명백한 것!

그리고 이 와중에 굳이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돈을 써야 쌓아서 쓸 수 있는 ‘포인트’는, 그리고 “합리적 소비”니 “절약”이니 하는 것은, 사실 모두 그저 ‘노오력’ 환원주의의 결과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하등 다를 바 없으며, 그러므로 아무 희망도 대책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논의하지 말자. (절대로 방금 GS POINT로 펩시 하나 사먹고 왔더니 포인트가 확 줄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뭘 논의해야 하느냐고? 뭐긴 뭐야, 우리가 “갓혜자”로부터 은혜 대신 사회적으로 정당한 거래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를 논의해야지. 다시 말하자면, 물신을 거꾸러뜨려 돈이 단지 돈이기만 하도록 만들 방안을 찾아야지.

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달리 말하자면, 시장 가격이 오르내린다는 이유로 그 대상 상품의 실제 가치가 쉽게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도록 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다.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도시락 하나가 몇십만 원을 호가할 이유는 하늘땅별땅 요만큼도 없다. 도시락에 금가루 뿌리고 영양제 섞으면, 한 사람 한 끼 밥이라는 본질이 갑자기 확 달라지는가? 그래서, 일반론의 차원에서야 천부당만부당하지만, 본질적 효용 총량의 jump가 일어나지 않는 일부 상품에 대해서는 최고가격제가 유효하다고 믿는다. 예컨대 도시락이 그렇고, 고위급 임원들의 연봉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규제는→나쁘다’의 공식만을 가히 전체주의적으로 떠받들어 왔고, 그 덕분에 지난 몇십 년간 겉으로는 모두가 돈을 많이 벌게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생산-소비된 상품과 서비스들의 본질적 효용 총량에 비해 그 금액이 물신의 권능에 의해 굉장히 부풀려졌음에 틀림없다는 점에서, 결국 언젠가 꺼질 크나큰 거품이다. 그리고 이 버블샤워 속에서 누구도 “야 이건 아무리 그래도 다들 너무 비싸”, “왜 싸게 팔아주는 게 고마울 일이야? 전체적으로 깎아야 한다니까?”를 말하지 못한다. 뭐, 누굴 탓하기는 어렵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고 싶은 것뿐이고, 우리는 300원 더 오른 것 때문에 밥을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통제권을 가져와야 한다. 우리가 통제권을 가졌다는 사실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은혜를 입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통제를 받는 시장이어야 한다.

정말이지 모든 게 이런 식이다. 건물주가 1층에 값싼 카페를 취미생활로 운영하는 것을, 결국 공간주가 계획한 이용 방식대로 낼 돈 다 내 가면서 쓰는 공간인데 ‘누구나 오셔서 자유롭게 어울리는 복합 문화공간’ 운운 생색 내는 것을 최근 들어 좀 지나치게 자주 목격하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낀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작동시킬 거라고 믿었지만, 그 이상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결과 우리가 얻은 것은 “갓혜자”다. 모든 게 시혜이고 은혜가 됐다. 저녁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우리는 각종 가격 결정자들이, 석유 공급자들이, 부동산 소유주들이 착한 마음을 계속 가져 주기를 기도하며 조마조마 살아가는데, 맨큐는 우리가 합리적 경제인입네 수요가 감소하면 가격이 하락합네 물정 없는 소리를 한다.

많이는 바라지 않고, 일단은 갓혜자가 없이도 걱정 없이 도시락 한 끼를 먹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핵심은 갓혜자가 없다는 데 있다. 편의점 도시락은 ‘혜자의 MOM’ 브랜드이기 때문에 값싸서는 안 되며, 지불 용의가 5천 원이 넘지 않는 배고픈 사람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값싸야 한다. 차라리 반찬 수를 줄일지언정 말이다. (양을 늘려주는 대신 가격을 올려 받는 것도 실제 소비자 입장에서는 사실 굉장히 위선적이라고 느낀다. 아 ㅅㅂ 그니까 양은 됐고 액수나 좀 맞추자고! 내가 정말 양이 부족해서 이러는 거면 두 끼 값을 모아다가 9900 고기뷔페를 가서 한번에 찢어지게 처먹겠지 여길 오겠냐 이 개자식들아!)

생각나는 방안이 최고가격제 뿐이긴 한데, 말고도 더 있을 것이다. 아무튼지간에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하니 모두가 우려하던 대로 자본의 신격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는 무산자들이 자본으로부터 일방적이고 임의적인 신적 은혜를 구하게 된 지금의 상황인데, 그 단적인 사례가 ‘GS25 god혜자 도시락’인 것이다. 우리 이거보다는 좀 덜 상스럽게, 쪼끔만 더 성스럽게 살면 안 될까? 일단 김혜자 선생님 당사자 입장에서, 모두가 자기 이름 앞에 ‘god’을 붙여 부르면서 도시락이나 깨작거리는 꼴이 얼마나 씁쓸하고 부담스러우시겠느냐 말이다. 진열대에 뻔뻔스럽게 자화자찬하듯 붙어 있는 “갓혜자, 다 아시잖아요” 공식 POP를 보고 있는 내가 이다지도 거북한데.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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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 연예인들의 못난 행태를 비판하고 욕하고 싶어질 때마다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걸 당신의 눈앞에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도 굳이 테이프에서 잘라 와 ‘살려서’ 내보내는 이들이 저기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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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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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임금과 기본소득

급하고 추하게 고도산업화된 나라라서인지 이곳에서의 일〔勤務〕이란 일종의 속죄 내지 고행이 되어 있다. 다들 논다는 것, “숨만 쉬고 사는 것”을 끔찍하게 금기시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공포와 금기시의 이유가 사후적—수입이 없어지거나 생활에 지장이 가거나 파산 상태가 되거나 등등—차원이 아닌 사전적 차원, 즉 사상적/이념적인 차원에 있다는 점이 슬프게 흥미롭다.
모두가 이미 아는 바, “취업 안 하면 어떡해?”의 발화에서 장래 일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의도되지 않는다. “취업을 안 할 수는 없다”라는 무의식적 규범을 스스로에게 돌려 말해 들려주는 것이 의도되어 있을 뿐이다.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냥 넌 그럼 뭐 할 거냐고 묻겠지. 할 거 없으면 취업이나 하라는 식으로.
일해서 돈 벌어 식솔을 부양하는 것이 유일하게 허용된 긍정적 선택지인 마당에 실존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생활이라는 실존을, 인간 존엄을 위한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하자는 것은 그래서 단순 생떼가 될 수 없다. “수입”으로 대표되는 자유자본시장경제를 포기하는 비용보다는, 그 수입의 최저선을 인격적 수준으로 합의하는 비용에 우리는 더 지불 용의가 있다.

2. 패션좌파와 진보적 정치문화의 의제

패션좌파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소비적 문명 자체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어차피 똑같은 아메리카노 사 마실 바에는, 앉아서 돈백만원 벌자고 꼼지락거리는 구차한 삶보다는 자본권력이며 체게바라며 운운 꿈과 이상을 늘어놓는 것이 더 “쿨”한 것이다. 좌파성이 라이프스타일과 분리 가능한 별개체로 기능할 수 있는 이상, 윤서인이 맨날 두드려패는 헬조선 타령 깨시민들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온전히 기성 좌파의 직무방기의 결과다. 세상에 싸울 의제가 몇이고 바꿔야 할 삶의 디테일이 몇인데 그저 닭그네 까는 법만 가르친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진보적 정치는 지금의 삶과 세상에 만족하지 말자고, 좀 덜 불가능하게 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구체적으로 꿈꾸는 정치여야 한다(잠 안 자고 깨어만 있어서 만사에 예민하게 구는 깨시민질이 아니라).
그렇기에 진보적 의제들은 ‘더 나은 세상’, 나와 동네와 법률과 습관과 전통의 변화라는 것을 구체화해 눈앞에 들이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여기서 흡연을 금지한다, “병신”이라는 표현을 인격모독으로 간주한다, 청년 1인에게 매월 51만원 상당의 온누리상품권을 지급한다 같은, “어 그럼 난 뭘 해야 하지”가 튀어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크 이런거 되게 멋있지않냐 넌 몰랐지? 이게 진보야” 같은 거드름 대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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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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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의 “여혐” 이력을 이야기해야겠다.

한창 논술 실력이 인문계 대입을 좌우한다고 난리를 치던 고3 때였다. 학교에서 단체로 인하대인지 어딘지로 모의논술 시험을 보냈다. 시험 문제를 딱 받아봤는데, 결국 엄청나게 스트레이트한 질문 하나였다. “교사임용시험에서 여성들에게 가산점을 줘야 하는가?”

고딩의 눈으로 보기에도 출제의도가 뻔한 것이었다. 순순히 “아 네 그럼요 당근이죠”라고 써냈다간 0점을 받을 판이었다. 왠지 다들 그렇게 적고 있을 게 너무 뻔하게 보였고. 그래서 다른 생각을 적었다.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남성들에게 역차별이 될 수 있다, 교사라는 직군에서는 여성이 더 많고 다수이기 때문이다, 운운.

그리고 그 답안은 그 모의시험 전체 1등 답안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소문이라서, 진위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 요즘 말로 “여혐”을 해서 이득을 취한 이력이다.


여성혐오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잘못 던진 질문에 알맞은 답이 안 돌아오듯, 여성혐오라는 잘못된 워딩 때문에 ‘난 여성혐오 안하는데’ 따위 무의미한 리액션이 되돌아온다고 본다. 혐오라, 과연 여자(여성) 그 자체를 음식물 쓰레기나 썩은 고양이 시체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남성들이 점차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정적 감정,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들이 선호의 차원이 아닐 거라는 말이다. 그 반대말이 “여성사랑” 같은 게 돼 버리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라는 표현은 “된장녀” 비난과 “개념녀” 칭송의 이중적 행태를 아울러 설명하지 못한다. 장동민 같은 인간 말종에게, 기타 숱한 김치남들에게 어떻게 애인이 애인이 있는지 역시 ‘혐오’의 차원에서만 보면 설명되기 어렵다. 코르셋론이 빙빙 맴도는 이유는, “난 코르셋이 좋아, 허리 날씬해지고 싶어”와 “코르셋은 나빠, 넌 건강을 해치고 있어”가 접점 없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여성에의 억압이다.

억압의 차원에서 된장녀-개념녀 드립을 살펴보면, 된장녀 비난은 개념녀를 더욱 억압하는, 개념녀 찬탄은 된장녀가 되지 말라고 억압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장동민의 애인 역시, 그 남자의 미개하리만치 전근대적인 억압적 여성관이 승인하고 허용한 여성으로서, 그러므로 이 여성관이 존속 가능하다는 피동적 증명 수단으로 존재하지, ‘나비’라는 한 개인으로서 누군가의 애인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장동민은 비로소 위자료만 받아가는 이혼녀를 개그 무대에서 비꼴 수 있다—그의 여자는 이혼녀이기는커녕 세상에 둘도 없는 예쁜이이므로!

요컨대 혐오하는 방식은 한 가지일지언정 억압하는 방법은 두 가지일 수 있다. 말 잘 들으면 칭찬해 주고, 말 안 들으면 때리는 거다. 비슷하게, 최근 몇 년간 특정 여자 연예인들이 “여신”으로 떠받들리는 것도 실은 칭찬하는 억압이고 그런 의미에서 “여성혐오”의 한 축이다. 나는, 설현이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별개로, 설현이 절대적 추앙을 받는 작태가 그런 차원에서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예쁨받기 합당한 여자가 설현 정도밖에 없다니 이 무슨 집단 이지메인가?

억압이 혐오만을 이용한다면 지속할 수 없는 아수라의 군상은, 그것이 칭찬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개그맨들의 “여혐 개그”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조립 생산된다. 웃긴 분장을 하고 소리를 빽 지르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냥 웃긴 법이다. 그 내용에 농담 명목의 실질적 여성억압을 넣고 소리를 빽 지르면 뭐가 돌아올까? 일단 터진 웃음과 “난 장동민 웃기고 좋은데? 진지충들​​” 하는 쉴드가 돌아온다. 그렇게 억압 행위가 칭찬을 받으면, 왠지 또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엄청나게 정당해 보이거든.

나만 봐도 그렇다. 모두가 YES 할 때 혼자 NO를 외치면 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 득볼 수 있다는 게 제도적으로 보장을 받으니, 봐라, 대놓고 역차별이 어쩌니 괴상하게 조립된 논리로 비열한 여혐을 서슴지 않았잖나.


억압은 자동적, 피동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대항은 수동적, 능동적이어야 한다.


참 묘하지? 말 몇 마디가 사람을 옥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여길 벗어나지 마,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게 뭐라고 처음엔 괜히 신경이 쓰이고, 그 다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점점 ‘아 내가 뭘 잘못했나보다’ 느끼게 만든다. 그러다가 잠시 후엔 자기가 자기도 느끼지 못할 만큼 새삼스럽게 이 억압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래, 여길 벗어나면 안 돼, 누가 그러던데.

인스타그램 속 설리가 각광받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누가 그랬는데, 좆까 정신이라고. 실로 그렇다. 그러면 안 된다, 동생 같아서 그러는데 결혼 어쩌려고 그러냐 따위의 내면화된 억압 앞에 “읭? 왜안됨? 니들 븅신” 픽 비웃고 더 자기답고 싶은 사진을 공중에 뿌린다. 굉장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그럴 테지, ‘설리가진리’니까, 누가 뭐라고 압박을 주건 말건 스스로 직접 온전히 자기이고 있으니까. 장동민의 (레알)여혐 발언에서 파생된 구호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고. 딱 그대로 억압의 방향과 정반대로 뻗는, manually active한 해방 투쟁 방식 말이다.


이것은 통제, 억압, 소유, 승인, 기득권, 그러므로 제도의 문제이다. ‘혐오’라는 워딩이 불안한 이유다. ‘억압’ 내지 ‘통제’라고, 사태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어 말할 필요가 있다.

“날 혐오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날 사랑해 주세요”가 된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김치남들이 만들어낸 허수아비가 바로 ‘메퇘지’인 것이다. 더 쨍하게 말하자. “날 억압하지 마세요”, “날 통제하지 마세요”라고 말하자. 이건 달리 말하면 “당신이 어떤 종류의 나를 원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나답다는 이유로 당신에게서 무슨 허락이나 비난을 받을 이유는 하등 없으니,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세요”가 되니까. 훨씬 정확하고 명쾌하지 않은가?

어떤 인간도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억압하지 않으시므로. 어떤 여자도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여자는 인간이므로. 어떤 여자도 혐오되어서는 안 된다. 혐오는 억압의 한 형태이므로. 그러나 어떤 여자도 어떤 몇몇 이유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추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여성 억압을 승인하고 공고히 하는 주요한 메커니즘의 하나이므로.


하루라도 좋으니까 좀 사람이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때 논술 선생이 ‘우리 학교에서 인하대 모의논술 전체1등이 나왔다’ 떠들고 다니던 게 그렇게 부끄러웠던 이유에 대해, 나조차도 이제야 좀 생각이 드는 마당이다. 갈 길이 멀고 밤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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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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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반사

2016. 4. 4. 14:05

1.


일로 만났다가 이래저래 안면을 튼 친구가 그 일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프로페셔널 프리랜서가 되어 다른 일들을 받아서 하더니, 문득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더라.

중복기고한 글들과 글이 모자라 실리지 않게 된 것들까지 포함하면 족히 스물 다섯 개 쯤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도통 쓸모 있는 글을 써내지 못하고 있다. 크게 사랑스러운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 기간 생각하고, 오랜 기간 고민하고, 나름 정제해 내놓은 글들은 읽히지 않거나, 쉽게 무시당한다. (출처)


삶이 피폐하고 워낙 바빠 치이다 보니 자기 삶으로 시작해서 자기 애정을 잘 담아 멋지게 내놓는 글이 쉽게 나오지 않고, “시류에 밀려 큰 고민 없이 금방 금방 써내려가게 된 글들이 '더 많이 팔린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는 거다.



2.


이 친구 심정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음, 다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적어도 프로라고 한다면,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떠밀리듯 이어져서 쓰게 되는 글이 잘 나와야 하고, 그걸 부끄러워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걸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 역시 자기 작업 방식의 일부가 돼야 한다. 내가 요즘 기회만 되면 외치는 ‘척수반사’ 이야기다.


나도 절실하게 느끼는 바다. 매일 적당히 쳐야 할 드립이 있고 충분히 채워야 할 지면이 있다. 달성해야 하는 일정량의 생산성과 내놓아야 하는 최소한의 크리에이티브 기준선이 주어져 있다. 요즘 그걸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면, 나도 못 믿을 정도로 해내고 있다. 정말이지, 반사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3.


콧속이 가려우면 재채기를 한다. 허벅지에 뜨거운 기름이 튀면 벌떡 일어나게 된다. 이걸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고민해서 정제한 다음 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이게 이런 몇 가지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과학 상식 정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척수반사라는 개념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사무실에 앉아 듀얼모니터를 바라보며 소제목을 짓고 변수명을 정하고 회의록을 작성하고 각종 자잘한 일들을 하다가 농담을 치다 보면, 내 뇌가 문득 놀라는 일이 왕왕 있다. 손발이 먼저 어떤 일에 대해 반사적으로 조치를 해 놓은 것을, 뇌가 제정신이 들어서 살펴보고 외치는 거다. ‘야 너 미쳤어?’ 근데 또 결과물을 볼작시면 그리 썩 못나지 않아서, 이성과 뇌가 데꿀멍을 먹기를 반복하고 있다. (최근 점점 심해지고 있다.)



4.


예컨대 빠른년생들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쓴 기사를 고칠 일이 있었다. 흩어진 문단들을 내용별로 모으고 손질하고 소제목을 달고… 하다가, 중간에 넣을 짤방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머리가 했다. 그러고서 그 생각을 머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내 손이랑 사무실 키보드가 막 뭔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모두 빠른년생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뇌가 (그리고 이런 척수반사적 드립을 꿈에도 못 꾸었을 원문 작성자가) 기겁했다. “아니 다 좋은데 너무 과격하자나여;;;” 그 말을 듣고 뇌는 ‘어떡하지’ 생각하고 있는데, 손이 멋대로 위키백과 검색을 하고 있었다. 스티븐 호킹, 앤서니 기든스, 그레고리 맨큐.



5.


돌이켜 생각해 봐도 미친 것 같은 과정이다. 논리의 비약이 너무 많아서 삐약삐약 하고 싶은 심정이다. (봐라, 또 이런 식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량적으로 통제가 안 된다는 거다. 생각을 하고 계산을 해야 견적이 나오고 ‘아 여기쯤에 뭐 넣으면 아귀가 맞는군’ 하는 “통빡”(“와꾸”라고도 한다)이 나오는데, 그게 아니라 원초적이랄지 무개념이랄지 하는 극단적인 직관에 그걸 맡겨버리는 짓이다. 무모한 도박에 불과하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을 바꾸고 있다. 이건 무모한 갬블링이 아니며, 갬블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요컨대, 자기의 직관을 평소에 충분히 갈고닦아 뒀다가, 전문가적 수지타산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멍이 있을 때 그 직관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척수반사’라고 부르고 있는 이 짓도 어떻게 잘 살려 볼 문제일 따름인 것이다.



6.


항상 홈런을 치는 타자는 없다. 항상 탐험대로부터 탈출하는 타잔은 없듯이. (음 이쯤되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사실 사람인 이상 항상 best output이 나와서도 안 된다. 모름지기 개연성(verisimilitude)이란 자연분포를 따르는 묘한 비율의 예외와 부족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기 때문에 뇌의 사용에 한계가 있어서, 항상 베스트를 찍을 수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프로들에게는 항상 the best output 내지는 the second best one이 요구된다. 항상 자기가 맡은 업무 분야에서 최고를 내놓지는 못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훌륭함은 갖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업무분야에 대한 두뇌 사고 이외의 매커니즘, 이를테면 척수반사적인 직관적 드립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중급 이상의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이제는 이걸 할 줄 알아야 한다.



7.


일상툰은 사실 굉장히 심도 깊은 분야라고 한다. 누구나 자기 삶에 재미있던 일 대여섯 가지는 있게 마련이므로 일단 덤벼는 보는데, 어떤 벽에 다다르면 다들 나가떨어진다고. 그 벽은 다름아닌 장기연재의 벽이다. 이제 털어먹을 자기 삶이 없다는 거지.


글쎄, 과연 이 변명이, 생활툰 분야에만 한정한다고 했을 때, 조석이나 스노우캣, 난다, 마조앤새디(심지어 그 이전에 마린블루스도 했던)의 정철연 등등 앞에서도 통할까? 안 통할 거다. 이 사람들이 매주 어느 요일을 채우는 방식은 절대 자기 일상을 열심히 궁리해서 머리로 그리는 게 아니라, 누구는 발로, 누구는 망상으로, 누구는 곁다리 이야기로, 하여튼 각자의 전략으로 돌파해서 머리 바깥의 것으로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 바다. 평생의 공을 들여서 딱 하나의 좋은 것을 내놓는 일, 그까짓 것쯤은 사실 디씨인사이드 아무 갤러리에서나 한 명씩은 다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힛갤로 가겠지. 하지만 그렇게 자기 안에 과포화돼 있어서 못견디고 ‘토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자기 안에 있거나 없거나 재료를 받아다 처리 작업을 해서 완성품으로 ‘제조되는’ 것도 있다.


둘은 완전히 취급 방식이 다르다. 이 사실에 대한 자각과 각오가 얼마나 있느냐, 그게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한 가지 척도일 것이다. 생활툰 도전자들이 자기 생활을 몇번 토해내다가 연재를 중단하는 것과, <마음의 소리>가 연재 1000회를 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9.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힘든 일인 건 사실이다. 말이 25편이지, 하루에 두 꼭지 써도 보름이 넘게 걸리는 분량인 건 사실이니. 그래서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 좀 길게 설명조(아마 실제로는 훈계조)로 써 봤다. 어떤 시점이 되면 프로들은 척수반사로 일을 하게 된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기의 직관과 ‘쪼’ 그리고 인성을 평소에 갈고닦아 놨다가 여차하면 휘두를 수 있으면, 그게 진짜 프로가 아닐까 싶다. 중국사에 남은 어느 시인은 술에 절어 떡이 되어서도 궁중 예악에 필요한 가사를 지어냈다지 않던가.


그러니, 그 친구나 나나 좀 파이팅하자는 얘길 좀 하고 싶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이제 아마추어 시절은 끝났다는 얘기니까. 다만, 이제 업으로, 커리어로, 포트폴리오로 하는 일이라면 지금부터는 조건이 갖춰져야 뭘 해내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같다. 무조건반사에 가까운 창작, 척수반사 같은 크리에이티브, 해 놓고 나서 다시 봤을 때 자기 머리와 보스와 클라이언트가 함께 놀라는 그런 지경, 자기가 어느 정도쯤인지를 아는 그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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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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