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의 새벽 - 김어진 07.02.27
섬 너머의 오렌지빛 야경에 비쳐서
병동 한가득 밝혀진 창들은 더 하이얬다.
내 입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공기는 차갑게 깨끗했다.
깜박이는 비행기 불빛보다 북두칠성이 더 밝았다.
중앙교회의 기도회는 새벽 두 시부터 진행된다고 한다.
작은 별똥별 두 개가 분명히 떨어졌다.
소록도의 새벽 - 김어진 07.02.27
섬 너머의 오렌지빛 야경에 비쳐서
병동 한가득 밝혀진 창들은 더 하이얬다.
내 입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공기는 차갑게 깨끗했다.
깜박이는 비행기 불빛보다 북두칠성이 더 밝았다.
중앙교회의 기도회는 새벽 두 시부터 진행된다고 한다.
작은 별똥별 두 개가 분명히 떨어졌다.
커다란 교회 - 김어진. 07.02.10
처음에 천막으로 시작했다는 한 교회
이제는 빌딩숲에 비좁이 들어선 커다란 빌딩 교회
지하 2층부터 지하 7층까지가 주차장
지상에서 7층까지 복층에
금괴 같은 예배당 의자에서
까맣게 묵념하는 아무개 성도들
그 머리 위 8층에 전산실, 여신도회
그 위에 남신도회, 목양실
위층에 행정실, 옆엔 케이블방송 안테나
그리하여 꼭대기엔
빨간 네온사인의 십자가
그리고 그보다도 높은 자리, 십자가의 정수리에
피뢰침
처음의 천막은 지하 1층 역사관 창고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어젯밤 오늘 만든 매드무비 하나 (2) | 2007.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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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의 기억 (2) | 2007.12.01 |
내멋대로 번역가사
만군의 주 온 만물이 주 시인해
땅 위에서 크신 이름
하늘에서도 영광의 주 높이니
주의 명성이 넘치네1. 이루신 일과 베푸실 일
모든 호흡 찬송하네
온 마음들과 열방의 소망
오직 주만이 오직 하나님2. 새벽 밤하늘 빛나는 별
모두 눈 들어 주를 보네
삼기신 세상 주의 기적
아름다우신 주를 드러내
어젯밤 오늘 만든 매드무비 하나 (2) | 2007.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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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의 기억 (2) | 2007.12.01 |
지금 열혈제작중인 내 웹폰트 '가분수'(유사이래 가장 작은 웹폰트라 자부함)는 과연 네이버 붐에 뜰 수 있을까? 천하의 귀여니가 다시 소설을 쓴다한들, 그 자체로 다음 UCC 광고를 만들 수 있을까? 일류 스타의 코믹연기로 포장해야 겨우 팔리겠지? 한때 세상을 휩쓸었던 마시마로와 졸라맨이 거대 스케일과 최고의 퀄리티로 찾아온들, 무한도전 매드무비보다 더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동네 도서관의 부당한 대출사례에 분노하는 40분짜리 다큐보다는 차라리 쓰다 망가진 아이팟이나 믹서기에 갈면서 과학실험인 양 까부는 40초 동영상을 만드는 게 더 낫다. 베스트에 올라가기도, 알려지고 홍보되기에도 말이다.
User-Created Contents라나 하는 개념이 요새 유행이란다. 처음에는 유튜브가 하는가 싶더니 구글 비디오, 엠엔캐스트, 다음, 네이버, 이제는 메가패스까지. 세상에 당신을 나타내는 새로운 길, 당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뉴 미디어. 웃기지 말라고 해라. 이건 순전히 대형 포털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다.
인터넷 초창기에는 그것이 분명히 소통과 개방과 공유, 그리고 Creativity의 수단이 되었다. 기억하는가? 뿌까와 우비소년, 졸라맨의 새 에피소드가 뜨기를 기다렸던 그때를, 그리고 아기자기한 웹폰트로 꾸며진 다음 까페에 연재되는 인터넷 로맨스 소설을 스크롤바 내려가며 읽던 시절을. 이리 생각하면 그때야말로 UCC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 누가 이걸 UCC라고 불렀나? 없다. 용어를 규정할 필요도 없었다. 본디 인터넷은 창조적인 공간이고 수단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초록상자 파란상자가 TV 스크린에 나타났고, 엄청난 마케팅과 융단폭격에 가까운 전략으로 사람들이 일방소통을 하게 되고 말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혹은 포털이 사람에게 무조건 쏘아대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포털은 점점 문제를 알아차렸다. 큰일났다. 소스가 없어졌다. 손님 없는 까페는 망하는데. 방법을 찾았다. 저들끼리 우리 안에서 놀게 해 주자. 우리는 입장료만 받아도 두둑해진다. 그래서 UCC라는 것을 포털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자, 보아라. 너네들도 방송사처럼, 마빡이처럼, 지미 헨드릭스처럼 될 수 있다. 해 봐라, 너 뜬다. 어디서? 여기서! UCC! 유저가 만드는 컨텐츠! 이 얼마나 멋지고 간지나는 1인 미디어냐! 시끄럽다! 우리는 너네 포털들이 나발 불기 전부터 잘 놀았, 아니, 그 전엔 더 잘 놀았고 더 놀 줄 알았다 이거야!
UCC의 단점들이 있다고들 한다. 저작권, 패러디의 대량생산과 천편일률적인 컨텐츠로 인한 질의 하향평준화, '비주얼'하지 않은 컨텐츠의 소외와 수용 가능한 범주의 한계성, 기업과 방송사의 개입 등등. 그 모든 문제의 근본이 여기에 있다. 놈들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우리 본능을 한낱 '셀프스펀지' 수준으로 격하하고, 이를 예쁘게 포장해서 과대선전해 온 때문에 이리 된 것이다.
웹폰트를 만들고 어쭙잖게 소설이랍시고 끼적이고 심심하면 이상한 동영상까지 만들어본 UCC-C(creator)로서 나는 지금 UCC에 물음표를 던진다. 누가 감히 엄연한 법적 저작권자인 나를 일개 '유저(user, 사용자)'로 떨어뜨릴 수 있단 말이냐?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P.s 2 나는 칭찬듣는데만 익숙하려는 놈이다. 못났다. 원래 상수랑 두는 법인데 일부러 나보다 급수 낮은 놈 찾아다니며 3점바둑 두는 근성은 아직도 남아서- 알든 모르든 고민하고 생각하는 습관이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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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생태계라고? (2) | 2007.11.28 |
칠판에 낙서를 하다 말고 황급히 시침을 본다. 낙서를 지우는 것도 잊고 부리나케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탈옥이다.
다행이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공원으로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평화롭다. 햇살이 비친다. 옆에는 사서 교사를 대신하는 친구놈이 얌전히 앉아 책을 보다 말고 "왔냐?" 인사한다.
책이 꽂혀 있다. 소파가 사람을 기다린다. 모니터 열두 개가 빛을 발한다. 점심 나절의 일광(日光)은 썩 좋다. 잡지들이 앉아 있다.
이곳은 본디 지식과 정보의 공원이로되,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별로 즐기지 않아 '도서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추억해 본다.
내가 라이브러리란 곳을 처음 겪었던 게 그 언제던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때의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로 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의자들이 높았다. 그러나 거기 앉아 내가 보고 싶은 것 보는 데 아무도 잔소리하지 않는다. 시간이 좀 빠르게 간다. 만화와 학습만화, 어린이 과학도서를 읽노라면 길거리에서, 운동장에서 공이나 차고 있을 동년배가 전혀 부럽다거나 내가 초라하다던가 느끼지 않았다.
내 발로 찾아가서 손수 고른 책을 종류에 상관없이 언제까지고 보고 읽고 즐기다가 시간이 되면 아쉬워하던 그 때. 그때부터 나는 도서관과 도서실을 예찬하는 이가 된 게다.
이 시대의 학생들이 매일 아침 지식의 옥으로 출근한다.
감옥. 자유는 없다. 뒤집기도 없고 변혁, 심지어 수정과 의지도 없다. 오로지 굴종의 내면화와 지식의 노화만이 착착 진행되는 곳이 있다.
옳고 뚜렷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지만, 소위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것 아래 틀리고 뒤떨어진 것들도 정당해져서 바로잡히질 않는다. 앎의 기쁨 운운하는 것은 개소리다. 뭘 배우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다. 사상과 정보를 억지로 넣어서 수치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 교과서의 실험 장면은 화석이 되었고, 미술 교과서의 그림들은 예술이 아니라 실기평가의 전형이다. 두꺼운 언어 교재에는 감상이 없는 대신 밑줄과 모범답안만이 복사되어 있다. 대화와 타협을 가르치는 교과서를 들고 있던 교사가 다음 날 가위와 자를 들고 돌아와서 젊은이들을 틀에 넣고 재고 째고 비튼다. 젊음은 늙어가고 지식엔 거미줄이 친다. 배움이며 생활이며 모든 게 무기력해질 즈음 출소하게 되지만, 지금껏 밀어넣은 지식은 모두 녹초가 되어 쓸모가 없고 갈 곳도 없고 기쁘지도 않다. 이 세상엔 지식의 옥이라는 곳이 있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지식의 공원으로 뛰어들어가고 싶다.
모두가 제 발로 찾아들어온다. 누구도 뭐라고 간섭하지 않는다. 정답과 자신의 생각을 끝없이 대조하며 왜 난 그르고 이건 옳을까 고민하다가 무릎꿇는 모습도 없다. 시키는 이도 없고, 부림받는 이도 없다. 저마다 고개는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하나같이 앎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스스로! 최신 뉴스부터 고전명작까지가 총망라되어 있지만 교사용 지도서는 없다. 모두가 교사고 모두가 학생이다. 지식이 살아 숨쉬며 자유롭게 노닐고 마음껏 활개를 친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과 손끝도 살아 있다. 학교가 지식의 감옥이라면 도서관은 지식의 공원이라고 할까?
나는 학교가 지식의 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옥만은 되지 않기를 꿈꾼다. 사실, 몇천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지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어떤 모습이 될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감옥밖에는 달리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꿈꿔 본다. 지식이 어딘가에 갇혀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달은 이상.
UCC에 던지는 물음표 (4) | 2007.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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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기 운동 (0) | 2007.11.29 |
국기에 대한 경배 (0) | 2007.11.29 |
커뮤니티의 생태계라고? (2) | 2007.11.28 |
어느 날 (4) | 2007.11.28 |
남(아니 적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들이 뭐라하든 무조건 옳으니까 몸과 마음을 바친다. 무조건 옳은 이유는 사실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막연히 좋은 것 같다. 주변 동무들도 다 그렇게 한다. 과학적이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아무튼 줏어듣기로는 우리네가 최고다. 이런 특권과 은총에 두고두고 감사 찬송을 하지 않으면 배신자다. 괴롭지 않은가? 이렇게 무지몽매한 종교는 종교도 아니고, 이것처럼 황당한 애국심이 있어선 안 된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고, 옳은 것은 옳다고 여겨 의심치 않을 만큼 판단력이 충분한 사람의 진심어린 충성이야말로 종교생활의 발전이나 나라의 앞날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나의 충성은 가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안 하게, 혹은 못 하게 하는 집단일수록 불행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는 법이다.
하인스 워드에게 지나치게 많은 렌즈를 들이대는 언론과, 경쟁력 강화를 지적받고 있는 '한류'에 대한 우리네 맹목적인 신용 그리고 우리가 초딩 때부터 멋모르고 읊었던 국기에 대한 '경배'에서―기형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애국심, 아니 파시즘을 본다.
P.s
초등 모교에 가 보니까 국기에 대한 '맹세'라고도 하더라. 맹세! 초등학교에서 그런 어휘를 쓰다니. 그냥 웃음만 나온다.
UCC에 던지는 물음표 (4) | 2007.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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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기 운동 (0) | 2007.11.29 |
지식의 옥, 지식의 공원 (0) | 2007.11.29 |
커뮤니티의 생태계라고? (2) | 2007.11.28 |
어느 날 (4) | 2007.11.28 |
안복진은 남학생이었다. 그는 1cm도 되지 않는 머리카락 때문에 짱구임이 잘 보이는 두상이었고 비쩍 마른 팔다리에 눈만 유난히 컸으며 이는 고르지 못했다. 그의 말로는 매일 아침 열심히 이를 닦고 온다고 했지만, 자주 그의 머리카락 위에서 비듬을 볼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어눌했다. 어휘력은 초등학교 6학년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교실마다 누군가는 그렇듯이 급식 먹는 속도도 늘 느렸다. 선착순 줄서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체육경기도 늘 꽝이었다. 무슨 행동의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면, 그는 늘 알아들을 수 없는, 또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유 때문에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심부름을 시키면 고분고분 하기는 하는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흔했다. 안복진은, 그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칠삭둥이란 저런 것이려나? 하고 한 번쯤 생각하게 했다. 게다가 그의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는 수업에 별 흥미가 없었다. 학기 초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무단결석을 하도 심하게 해서 선생님들이 골치를 앓은 바가 있다. 중학교 교실의 어디에서나 이런 학생은 꼭 한둘 있게 마련이다. 안복진, 그야말로 꼭 그런 꼴통집단의 견본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이것저것 교실의 궂은일이라면 자연히 도맡게 되었다. 다행히 본인도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냥 그저 그런 녀석이려니 하고 보아 넘겼다. 따지고 보면 안복진 그가 우리에게, 또는 사회에, 또는 인류에 무슨 죄지은 바가 있는가. 다만 좀 졸고, 학교 가끔 빠지고, 행동거지 엉뚱하고, 위생 조금 불량하고, 그 정도. 그만하면 중학교 정도의 사회에서는 참아줄 만한 정도다. 그래서 그냥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런 놈이려니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학교 교실마다 한둘 떠맡아야 하는 필요악적 존재가 2학년 5반에 하나 더 있었다면, 그건 아마 이지호와 그 패거리였을 것이다. 이런 무리들에 대하여 몇 마디 짚고 넘어가자. 어느 누구라도 중학교 생활에 있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
“야, 배복!”
하루는 그들이 점심을 다 까먹고 나서(사실 이런 패거리들은 점심밥도 절반 이상을 남긴 뒤 학교 밖으로 빠져나가 무엇이든 돈을 주고 사먹어야 직성이 풀리거니와), 아직도 식판을 기울이고 있는 안복진(일명 배복이지만 왜 이런 별명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을 불렀다. 그는 국에 푹 담근 윗입술을 식판에서 떼고, 눈을 치켜뜨며 자신의 앞쪽에 앉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갔다. ‘반삭’ 즉 절반만 삭발한 헤어스타일 뒤통수에는 구멍(이른바 ‘땜빵’)이 성냥개비 모양으로 찍 못나게 박혀 있고, 작으나마 또릿또릿한 눈, 콧잔등에는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이지호는 두 다리를 책상에 똑바로 올려놓고 자기와 뜻이 맞는 놈들 몇과 함께 뭐라고 지껄이다가, 뒤돌아도 보지 않으며 안복진을 부른 것이다. 그가 거기까지 갔을 때, 그는
“야, 배복”
“왜 불러?”
“이 개자식, 너 말투 재수 없다?”
‘개자식’은 싸움꾼 이지호의 전형적인 욕이었다. 그건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아니꼽게 말투라니 뭔가.
“왜? 뭐?”
이것이 안복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시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말투 고쳐, 이 개자식아. 그건 그렇고, 야. 너 먹을 거 있냐?”
“먹을 건 왜?”
“아, 이 개자식이 진짜 말투 고치라면 고치지!”
“알았어.”
“먹을 거 있냐니까? 대답해 짜샤.”
“없어.”
“껌도 없냐?”
“없어.”
“아우, 이 개자식이 그냥...”
하면서 그는 천천히 다리를 내려 일어났다. 그의 주변에 둘러선 서넛은 짠 것처럼 다들 외투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있었다. 이지호는 일어나, ‘배복’의 하복부를 좀 때렸다.
“이게 진짜. 말투 너 고치랬지?”
안복진이 이지호에게 맞는 것은, 마치 교장선생님이 훈화를 할 때마다 주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옳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일화를 막 이야기하는 것과 흡사한, ‘당연한 문제’였다. 그러니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안복진은 다시 제자리에 앉아, 식사를 마쳤고, 급식차는 잠시 후 왔던 길로 돌아갔다. 이지호 패거리도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안복진에게는 그걸로 고만이었다. 다만 하루빨리 3학년이 되어 이지호와 결별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을 수 있겠다.
그렇다. 이것이 학교에 포진해 있는 불량배들의 전형 또는 모범이요, 교실마다 독버섯처럼 자리 잡은 한인들의 작태다. 그렇지 않은가? 공부를 잘 하길 하나, 끼가 있기를 하나, 그렇다고 (뭐가 됐든지)자기 소신과 가치관이 뚜렷하길 하나.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야 고작 진종일 듣는 가요를 똑같이 흉내 내며 음높이 못 맞출 때마다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고, 되는 대로 욕설하고, 인기 연예인을 생각 없이 모방하고, 맘에 안 들면 부모고 뭣이고 뒤돌아서서 단체로 그냥 병신 취급하고, 줏대도 없이 (그나마도 백주대낮에는 결코 이러지 않으나)그저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어떻게 구한 것인지 계속해서 돈과 술과 담배를 꺼내며 겉멋 꾸미기에만 전연 미친 집단들. 어떻게 하면 TV와 인터넷 소설에서 보았던 것처럼 놀아볼 수 있을까, ‘우와 XX, X나게 폼 난다’ 따위 한심한 망동과 지독한 사상뿐인 왈패들. 그래도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들어가는 놈들인데, 그나마도 오래 못 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둘 중 하나다. 퇴학(또는 자퇴), 아니면 공중해체. 사회에서는 더욱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학창시절을 아니꼬워하며 견뎌 온 인걸들이 제몫을 할 뿐, 뭔가 깨우쳐야 할 때 아무것도 모르고 겉멋들이기에 눈멀어서 동분서주 돌아다니다가 결국 어디론가 그렇게 사라지는 게 그들이다. 어찌 보면 불쌍한 족속들이다. 생각해 보면 구제받아야 할 중생들인 셈이다. 그들이 한 마흔다섯 살쯤 되면, 쉰여덟 살쯤 되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왜 그런 우화가 있지 않은가? 망나니 자식이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어머니 귀를 이로 꽉 깨물며 이르기를 ‘어째서 날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뒀느냐’ 했다더라. 참 그 우화가 지금 마음 아프게 회상되는 이유는 뭘까? 그런 이야기는 이쯤 하자.
또한 안복진은 5반의 물 당번이었다. 물 당번. 주전자에 식수를 채워오는 직책. 주전자에 물이 있느냐 없느냐는 안복진의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유일하다시피 한 요소였다. 여름날만 되면 물주전자의 필요성은 절실해진다. 특히 안복진 없는 날에는, 주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군가 양심 있는 이가 대신 물을 받아와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물 당번이란, 참 귀찮은 일이어서 누가 시켜야만 하는 일이었지 결코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도맡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을 안복진이 아닌들 누가 해내랴.
그러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나 보다. 하루는 꽤 무더운 날 체육시간 직후였는데, 안복진은 잽싸게 자기 직책을 다하고자 교실에 가장 먼저 후다닥 들어가 옷도 안 갈아입고 주전자를 들고 식수대로 달려갔다. 그날따라 더위로 인해 수도관에 붙어 있던 중금속 성분이 좀 많이 녹았던 모양이다. 제일 먼저 안복진의 주전자에 손을 벌린 것도 이지호였고,
“야, 배복!”
제일 먼저 불평한 이도 이지호였다. 안복진은 벗던 윗도리도 내려놓지 못하고 그에게로 갔다.
“야, 물맛이 왜 이래?”
“어떤데?”
“이게 진짜. 야, 장난해? 너 왜 수돗물을 떠 왔냐? 너 일부러 수돗물 떠왔지?”
“아니, 전혀.”
안복진은 ‘전혀.’를 내뱉은 직후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미간은 잔뜩 찌푸렸다. 입맛도 다시는 것 같았다. 즉시 그 두 글자에 대한 응대가 되돌아왔다.
“전혀? 그래? 전혀? 누가 뭐랬냐? 웃기고 있어. 암튼 니 또 이딴 물 같지도 않은 물 떠 오면 그 땐 아주 죽는다. 알았냐, 어?”
안복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어.”
대답했다.
“크게 못 해?”
“알았어.”
그 대화를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일방적 의사소통에 의아함을 갖는 이는 없었다. 그래, 없기야 없었다. 이지호를 빼고도 5반에는 이지호같은 왈패들이 더 있었으나 그들은 별 말이 없었다. 하여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학생 하나가 멀뚱히 서 있는 안복진의 옆을 지나갔다.
다른 어느 하루였다. 안복진은 밥을 먹은 뒤 주전자에 물을 잔뜩 채워놓고 컵을 씻으러 수돗가로 갔다. 수돗가는, 각층마다 있는 식수대와는 판이하게 본 교사(校舍) 왼편으로 왕래가 적은 그늘진 곳에 있었다. 쓰레기를 모아놓는 쓰레기장이 수돗가 바로 옆에 있었다. 자연히 그곳은 외따로 된 곳이었고, 거기에 오는 이는 성실히 청소당번 직책을 수행하는 모범생 아니면 끽연하러 오는 불량학생,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날도 으레 그랬다. 마지막 컵을 다 씻어가는 무렵 안복진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지호를 포함한 여럿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안복진은 별 말이 없었다. 누구라도 조금은 당황했을 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어떤 촐랑이같이 생긴 녀석이
“야, 돈 있냐?”
“응?”
“아우 이게 진짜. 너 돈 있냐구?”
“없어.”
“백 원도 없냐?”
“......”
안복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복진은 뜬금없이 몸을 조금 추슬렀다. 그 촐랑이 같은 녀석이 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막 내리치려는 순간 안복진은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야, 냅둬.”
이지호가 뒤에서 한 마디 쏘았다. 그 녀석은 손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며
“왜?”
“아, 돈 없다잖아. 니만 팔 아프니까 냅둬라.”
하였다. 그제 녀석은 피, 콧방귀를 뀌고 뒤돌아서서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머지도 슬슬 뒤돌아섰다. 안복진도 어느 정도 몸을 다시 펴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때 다른 아이들은 앞으로 가고 있었고 이지호만 뒤로 휙 돌아서서 안복진을 음흉하게 노려보곤
“재수 없는 새끼.”
안복진을 향해 이 사이로 침을 틱 뱉었다. 안복진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거기에 ‘쫄아서’ 뒤로 조금 물러났을 뿐이고, 조금 뒤에 그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자 조심조심 컵을 정리해서 교실로 들어간 것뿐이었다.
이런 사건도 있었다. 방학이 다가오면서 학생들은 자연 풀어지기 시작했다. 학기 초에 잡혀 있던 남학교 특유의 군기는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지만, 이건 통제가 어려워지는 수준이었다.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선생이 떠드는 사람 지적하고, 사제간에 말장난이며 잡담 따위를 하느라 매 45분은 얼음 녹듯 흐물흐물 지나갔다. 그 시간의 흐름은 기분 나쁜 것이었다. 적어도 언제부턴가 그저 잠만 자는 몇 명에게는. 그리고 많게는, 교직원을 포함해서, 학교에 밥 먹으러 오는 왈패들을 뺀 거의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4교시가 끝났다. 선생은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뛰쳐나갔다. 안복진은 물당번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급식당번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원칙으로만 말하자면 직책이 있기에 엄연히 남보다 더 먼저 밥을 먹을 권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뒤로 밀려나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학기 초가 조금 지나서였는데, 그 때는 이유를 알 것 같았으나 점점 모두가 묵인만 하고 있었지 이유는 기억하지 못했다. 안복진도 그랬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급식차와 멀찍이 떨어져 얌전히 서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지호가 책상에 두 발을 올려놓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끝내
“아 진짜. 당번 꼭 해야 되나? XX. 야, 배복!”
‘배복’은 이번에도 얌전히 그 앞에 가서 고개를 조용히 숙이고 들을 준비를 하였다.
“니가 오늘 내 대신 당번 좀 해. XX 귀찮으니까.”
“......”
“안 할 거야?”
안복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지 고개만 살짝 들어서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그게 이지호의 눈에는 반항의 침묵으로 보였나 보다.
퍽!
안복진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이지호가 왼발로 그의 가슴께를 밀친 것이었다. 안복진이 찌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이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안복진 위에 올라타서는 그의 뺨을 연거푸 딱딱 치면서
“해, 말어?”
“......”
“해, 말어!”
이지호는 안복진 뺨 때리는 것을 조금 더 세게 했다. 표정은 대단히 불만스럽다는 모양이었다. 안복진은 두 팔로 뒤에 버티고 일어났다. 이지호도 비켰다. 그는 재빠르게 손을 씻고 와서 말없이 주걱을 집었다. 이지호가 물론 배급 줄의 맨 처음에 섰다.
“야, 새꺄. 왜 밥이 이거밖에 안 돼?”
안복진은 다시 올려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조금 더 밥을 집어 그에게 덜었다. 그는 한 번 안복진을 째려보고는 돌아서서, 자기 친구라는 것들과 함께 실컷 웃었다. 그 날 밥이 모자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복진은 그 날 진종일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날 자진해서 집에 가장 늦게 갔다. 사실 주번들은, 기다리기 귀찮아서, 안복진을 자주 마지막으로 내몰고는 자물쇠를 아무 데나 팽개치고 내빼곤 했다. 선생이 청소검사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렇게 내빼고 나면 안복진은 어느 때인가는 그 교실 문단속을 하고 열쇠를 교무실에 보관해 놓고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날 안복진은 이지호의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몇몇이 교복차림으로 축구를 하는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교실 천장을 살펴보았다. 못 보던 것이 천장에 성기게 붙어있었다. 안복진은 꽤 오래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어쨌든 모두는 살아간다.
그리하여, 하계방학이 시작하기 아흐레 전날이 되었다. 그 날 식단에는 3첩 외에 우유가 40팩 정도 나왔다. 남자 중학교의 식사 풍경은(그렇다고 여중이라 하여 별 수가 있지는 않으나) 소란하다. 아수라가 이런 곳일까. 뚜껑도 열지 못한 급식차 앞의 엄청난 인파 속에 파묻힌 안복진은 뒤에서 이지호가 무어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지 못했고, 그 대가는 의례 그렇듯 또 손찌검이었다. 또 의례 그렇듯, 어찌 항변하기가 어려운 사항이 구실이었다.
“야, 내가 내 것도 가져오랬잖아!”
다시 안복진은 자리에 앉았고, 그러면 또 고만이었다. 이지호는, 결국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자기가 직접 가져올 것이었으면서 꼭 가만히 앉아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는 양으로 뻗질러본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고만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고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반 이상을 남긴 이지호가, 아직 모두가 식사를 하느라고 조용한 복도로 나갔다. 그러고 보면 왈패들은 밥 먹는 시간이 아까운 것일 수도 있다. 복도는 참 조용했다. 안복진은 복도 쪽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패거리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안복진은 여전한 동작으로 밥을 펐다. 소리의 수가 점점 더 가세하더니,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 욕설, 벽 때리는 소리 같은 것이 복도 전체에 퍼졌다. 여기서 한 가지 참 이상한 것은, 암묵적 인정인지 아니면 무언의 항변인지 열다섯 개쯤 되는 괄괄한 목소리들에 대해 이렇다 할 제재가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식사에 바빴다. 그렇게 잠시 동안, 즐거운 침묵 그리고 이단아들의 소란이 그 복도 전체에 퍼졌다.
그 때 문제가 터졌다. 떠드는 소리들 중 둘의 억양이 변했다. 꼭 표제음악의 2악장으로 막 넘어온 느낌이었다. 욕설의 개수가 많아졌고 완력에 의한 효과음도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더 끼어들었다. 그 소리의 광경을 보려고 일부러 밥을 쏟아 붓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경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싸움이 붙었다. 두 명이 주축이 되어 전체적으로 두 패로 나뉘었는데, 듣자하니 암만해도 어떤 권리의 분배 때문에, 또는 거기에 어떤 ‘특수이익의 충돌’이 겹쳐서―아무튼 한 번 대판 싸울 분위기였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든 선생님들은 1층의 급식실에 있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이지호의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눈을 돌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XX새꺄! 한 마디가 일인의 왼뺨을 질렀다.
옛날 이상이라는 시인도 읊었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구경 세 가지는 불구경, 운 좋은 공짜티켓 그리고 싸움 구경이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세 번째만큼은 시커먼 놈들만 모아놓은 학교에서는 확실했다. 비명이 나와야 할 것인데 자연스러운 환호성이 터졌다. 놈들은 싸우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 놈들이었다. 뒤이어 맨 처음 완력을 사용한 놈의 뒤통수를 어떤 누군가가 다시 갈겼다. 이윽고 그 꼴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입으로 돈 없는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가 잘 싸운다, 누가 지겠다……. 몇 분 뒤에는 누구의 것이었든 교복이 찢어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는 피가 떨어졌다. 열다섯 막무가내들의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도 아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던 태도와 뿌리를 같이하는 모습일까? 복도 한가운데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고, 뜯고, 잡히지도 않는 머리채를 쥐고, 거기에는 이지호도 섞여 있었다. 계속해서 누구 이겨라, 누구 져라, 이기는 편 우리 편……. 소란했다. 소란하되 상당했다. 말리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고함은 여기서 저기로 섞여 반사되고 또 콘크리트 벽을 차올라 저기서 여기로, 그 좁은 복도 길쭉이 거기로, 천장으로, 저 너머로, 유리창으로, 주먹이 치고, 다리는 채이고, 크게 뜨인 눈, 욕지거리, 원시적인 비명, 치고 치이는, 맞고 때리는, 뭔가 바닥에 떨어지고 공중에 날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벌어진 입에서 끊임없이 욕과 타액이 번갈아 튀기고, 일으키고, 다시 쓰러지고, 찢어지고, 패고, 눕히고, 퍽, 철썩, 그악스런 소리, 다시 고함, 비명, 환호성, 비속어, 괴성, 난동…….
바로 그 때였다.
천장 여기저기에서 물이 샤워기 모양으로 터졌다. 최근 천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가 갑자기 물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맞추어 그 다음부터는 으악! 하는 비명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광경에서 참 놀랍고도 재밌는 것은, 그 시끄럽던 곳이 조금 있자니까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싸움은 일시에 진압되었다. 구경꾼이고 시정잡배고 간에 너나없이 저마다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고개를 수그리기에 바빴다. 구경꾼들은 속히 흩어졌다. 난데없는 비를 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는, 건달들―그나마도 네댓 명 정도나 아무렇게나 엉킨 채 남아있었다. 이지호도 거기 있었다.
한참이나 모두가 넋을 놓고, 또는 어리벙벙해서, 또는 스프링클러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자코 있자니까 드디어 물이 잦아들었다. 바닥은 흥건했다.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고되지 않은 소나기는 기계, 종이, 교과서, 가방, 식판, 아직도 리모델링하지 못한 마룻바닥―아무튼 말 그대로 온통 막심한 수해가 나서, 온 4층이 모두 도탄지고에 빠졌다. 이지호는 교실로 돌아왔다. 안복진은 보이지 않았다. 이지호는 교실의 한 스프링클러가 조금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연기에 그을린 흔적이 스프링클러 주변에 짙게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알아두라. 습기를 머금은 물체는 불완전연소를 하게 마련이므로 탈 때 연기를 많이 낸다는 사실을.
그리고 얼마 뒤 안복진은 손에 그 타다 만 우유팩을 쥐고 학생부실에서 나왔다. 이지호의 싸구려 지포라이터는 학생부실 책상서랍으로 들어갔다. 처벌은 의외로 약해서 안복진 5일 정학, 이지호와 및 서너 사람 반성문과 3일 사회봉사 정도였다. 그나마 배상을 하라는 말이 없었으니 약한 것이었다. 담임선생이 어떻게든 참작을 한 모양이었다. 뭘 참작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서야 증거물인 우유팩을 왜 안 뺏었으랴. 안복진은 수업 중이던 자기 반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제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둘러멨다. 사실 수업이라기보다는―앞서 말하지 않았는가마는―사제간에 피차 한담이 오고가고 있었다. 안복진이 신발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뒷문으로 나가려니까 선생이 가만히 있다 갑자기,
“얘, 너 어디 가니?”
불러 세워서는 물었다. 일시에 80개 정도의 눈동자가 그에게 집중했다. 조용해졌다. 안복진은 그 조용한 풍경을 눈으로만 슥 둘러보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끝내는 엉뚱하게 픽 웃으며
“혼나러 가요.”
닫는 문 뒤로 고요를 조금 더 남겨 놓고 거길 나갔다.
그리고 당장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아니 저 녀석, 지금껏 학생부실 가서 혼나고 온 놈이 또 혼나러 어딜 간다는 거야? 각종 루머가 또 급조되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이럴 거야, 아냐……. 그렇다니까 저 녀석 병이 있는데, 어쩌면……. 그리고 그날따라 유난히 널따란 그리고 아무도 체육수업을 하러 나오지 않은 텅 빈 운동장에는 뜨뜻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고, 안복진은 오른손에 신발가방을 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자연히 늘어진 두 팔을 편히 벌려 중앙현관으로부터 정문으로, 운동장을 느릿느릿 가로질렀다. 시계는 중양현관 옆에 있으되 그 순간에만은 잠시 멈췄을 것이다. 운동장 언저리마다 심긴 나무들도 팔을 느긋하게 벌리고 사락사락,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깨끗한 띠구름, 뭉게구름은 역시 깨끗한 하늘 밑으로 빠르게 흘렀다. 여전히 안복진의 입에는 아까 웃었던 그 기분이 묻어 있었다. 감긴 눈가로, 팔로, 다리로 그 기분은 흥겹게 흘러내렸다. 문제의 바로 그 우유팩은 그리고, 아니 그러나 최후에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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